나나미 켄토 드림

[주술회전] 정착

나나미 켄토 드림 5편

한참 나나미의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지고, 입맞춤을 퍼붓던 마유가 멈춘 건 나나미가 울음을 그친 뒤였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무슨 말인지 판단이 어려웠다. 무엇을? 주어가 빠진 문장을 맥락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사고능력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눈가를 빨갛게 물들인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나나미의 모습에 마유는 당장이라도 그를 붙잡고 숨도 못 쉴 정도로 키스하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혼자 씻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씻겨드릴까요?”

“혼자 괜찮습니다.”

“그래요.”

 

마유는 웃으면서 나나미가 내던진 수건을 정리하고 새 수건과 목욕가운을 꺼내 젖지 않을 곳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힘들면 바로 불러달라는 말과 함께 목소리가 들릴 정도의 틈만 남기고 문을 닫고 나갔다. 나나미는 먼저 세수부터 하고 천천히 몸을 씻은 다음 새 목욕가운을 입고 나갔다. 몸을 닦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왔더니 마유가 새 수건을 들고 다가와 머리를 닦아주었다. 이젠 저항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 물기가 사라진 뒤 마유는 나나미의 손을 잡아 그를 어느새 제 자리로 돌아온 침대로 이끌었다.

 

“자, 여기 앉아요. 누워도 괜찮습니다.”

 

눕고 싶다. 아까 지나치게 흥분해서 그런지 피곤함에 그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나나미는 사양하지 않고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베개에는 이미 수건이 깔려 있었다. 머리카락을 헤집는 마유의 손과 헤어드라이어의 열풍에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모터 소리에 생각이 점점 둔해진다. 옷이 오면 깨워드릴 테니까요. 그 말에 의식을 깨우려는 노력도 멈추어 버리고 잠들었다.

 

 

 

나나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마유가 그의 왼손을 잡고 손톱을 줄로 갈고 있었다.

 

“...? 뭐 하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제 두 개 남았어요.”

 

마침 약지였다. 줄로 갈고, 무언가를 적신 화장솜으로 손톱 가루를 닦아내고, 무언가를 손톱에 바른다. 마유는 일련의 과정을 새끼 손톱에도 똑같이 하고 나서 끝났다고 작게 말했다.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지금 몇 시...?”

“오후 1시 40분입니다. 옷은 아직 안 왔어요.”

 

1시 40분. 아까 점심 식사를 12시 30분까지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나? 자는 동안 먼저 먹었을까. 물어보기엔 조금 어색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마유가 웃으면서 손등에 입 맞추었다.

 

“점심 식사를 준비시킬게요.”

“네... 고전엔 언제 갑니까?”

“식사 후에 옷이 오면요.”

 

마유는 아까 아침 식사를 주문했을 때처럼 전화를 걸었고, 얼마 안 있어 아침 식사보다 한층 더 호화로운 식사가 실린 트롤리가 들어왔다. 여성은 나나미가 침대에 누운 채인 걸 보고 침대를 조작해 매트리스 각도를 조정하더니 침대 위에 접이식 상을 올려 식사를 차렸다. 마유는 침대 옆의 테이블에서 나나미와 같은 것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나나미는 마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 사람 상대로 뭘 물어봐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지금이 편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식곤증으로 잠시 졸고 있자니 마유가 옷이 도착했다며 다시 그를 깨웠다. 아까처럼 옷을 갈아입는 건 스스로 하게 해 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마유와 다른 셋이 병원 앞으로 나왔을 때, 네 사람을 기다리는 건 지난번과 같은 차량이었다. 나나미는 마유가 문을 열어주는 대로 차에 탔다. 지난번처럼 닛타와 쿠기사키가 맞은 편이었다.

 

“고전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네. 다행히도 그쪽에서 주소를 알려줬습니다.”

 

총감부와 거래를 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가 보지. 닛타와 쿠기사키는 서로를 자꾸 흘깃거리면서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 아마 메신저로 무언가 대화하느라 바쁜 거겠지. 나나미는 다리를 꼰 채 무릎 위에 손을 올려 마유의 접촉을 피했다. 그대로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더니 충분히 잤을 텐데 또 졸고 말았다. 그가 일어났을 땐 차가 고전의 운동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깜빡 눈을 떴다 감기를 반복하던 나나미는 그에게 담요가 덮여진 걸 보고 한숨을 삼켰다. 큰데다 도톰하고 부드러운 촉감은 한 번 만지기만 해도 고급인 걸 알 수 있었다. 차 안에는 운전사와 유미만 남아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마유 님께서 먼저 사무적인 이야기를 하고 올테니 깨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백미러로 나나미가 움직이는 걸 본 운전사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 사람도 ‘씨’가 아니라 ‘님’인가. 나나미는 고맙다고 짧게 인사하고 차에서 내렸다. 고전 건물로 향하니 어느새 따라왔는지 유미가 왼손 손가락을 잡았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뿌리칠 생각은 없었다. 조금 손을 움직여 유미의 손을 맞잡고 걸었다. 작은 손에서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손이 식어서 땀이 나지 않았다.

 

“어라, 나나미. 살아있었구나.”

“메이메이 씨... 무사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메이메이는 임무 때와는 달리 머리를 풀어 둔 채였다. 큰 부상은 없이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나나미는 안도하며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넸다. 그 말에 웃은 메이메이는 나나미의 왼편을 보고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아 유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고 보니 유미는 주령이었다. 공격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당황한 나나미를 놔둔 채 메이메이는 상냥한 목소리로 폭탄을 터뜨렸다.

 

“안녕. 유미. 오빠는 어디 가고 나나미랑 있니?”

“-네? 메이메이 씨. 유미를... 마유 씨를 알고 있습니까?”

“이런, 알고 이대로 데려온 거 아니었어? 내 고객이야. 유미에게 줄 주구나 주령을 정기적으로 공급하고 있어.”

 

주구나 주령. 그말에 시부야에서 개조인간들을 삼켜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저건 주력을 먹고 있었던 걸까.

 

“메이 언니이... 오빠 어디?”

“그렇구나. 나나미랑 오빠를 찾으러 온 거야?”

 

메이메이는 웃으면서 유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주령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쓰다듬고 말을 걸 정도로 익숙해져 있는 걸까. 새삼 놀라서 메이메이를 보고 있었더니 다시 몸을 편 메이메이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나미. 지금 뭘 입고 있는 거야?”

“아... 입고 있던 옷이 망가져서 마유 씨가 준비해 준 옷입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주술사로 일하게 되면서 옷은 의식해서 밝은색을 골랐다. 회사에 다니던 때를 생각하기 싫어서 일부러 정반대를 선택했다. 그런데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회사에 다니던 때와 비슷하니 메이메이 씨가 보기엔 어색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나나미는 메이메이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놀라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긴장해 침을 삼켰다.

 

“메이메이 씨...?”

“지금 너, 저주 그 자체를 입고 있는데. 나나미.”

“-네?”

 

나나미는 그 말에 흠칫 놀라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메이메이가 옷에 손을 대니 금방 알 수 있었다. 주력인지 주력의 잔예인지, 옷에서 시커먼 기운이 올라와 메이메이의 손에 휘감겨 졸랐다. 손을 한번 휘두르니 금방 사라졌지만 그게 긍정적인 게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지금 그것이 노린 게 주술사가 아닌 일반인이라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었다.

 

“메이메이 씨, 이 옷은, 방금 그건.”

 

자켓이라도 당장 벗으려고 단추에 손을 대니 메이메이가 손을 들어 멈추었다.

 

“괜찮아. 보기만큼 강하진 않으니까. 이건 질투심에 소유욕이 잔예처럼 묻어있는 거야. 이성이 접촉하니 민감하게 반응했겠지. 꽤 고급 브랜드니까 그냥 입는 걸 추천할게.”

“...질투심에 소유욕이요.”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누구의 감정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옷에 직접 손을 댄 적도 없을 것 같은데 이정도로 흔적이 남는다니 대체 어느 정도의 감정을 품고 있는 거야. 턱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고 있던 나나미는 이를 갈며 고전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어딘가에 있을까. 들어가서 찾아보면 금방 만날 수 있을까. 유미를 데리고 들어가도 되는 건가. 생각하던 그는 고전 건물에서 검고 커다란 것이 검고 가느다란 것과 나오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찾아서 뭘 하고 싶은지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당사자가 나타나 버렸다. 마유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그 옆을 이지치가 힘겹게 따라오고 있었다. 나나미와 메이메이에게 곧장 다가온 마유는 그들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메이메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메이 씨.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걸.”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

 

메이메이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마유는 나나미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과 표정을 본 나나미는 다른 미사여구나 설명 없이 지금 마유를 보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시선과 표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미와 같이 있어 줬군요.”

 

목소리가 온화하다. 나나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마유가 유미를 안고, 유미가 마유의 어깨 쪽에 모습을 감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절차가 끝났습니다. 인수인계를 하고 개인 사물을 챙겨서 돌아가죠.”

“그래서 이지치 군이 함께 왔군요. ...알겠습니다.”

 

주술사는 기본적으로 단건을 마치고 바로 보고서를 제출하는 걸로 인수인계를 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핑계를 대며 이지치가 온 건 아마 나나미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자 하는 거겠지.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마유는 태연하게 메이메이와 대화를 하며 나나미의 뒤를 따라왔다. 들려오는 대화는 주구의 구매에 대한 것이었다. 유미가 먹기 쉽게 날붙이가 아닌 것, 날을 미리 제거할 것, 가능한 한 강한 것으로, 예산은 어느 정도인지, 언제까지 준비해 주었으면 하는 이야기 등이었다. 지난 번처럼, 같이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말을 하면서 대화가 막힘없이 흘러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마유는 대체 얼마나 마유는 대체 얼마나 오래 주술사와 연관되어 있었던 걸까. 마히토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을까. 역시 지나치게 경계하는 걸까 싶었지만 나나미는 생각을 거듭하며 입 안에 신물이 퍼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오, 저기 온다. 나나밍!”

“이타도리 군. 후시구로 군도... 무사했군요.”

 

나나미를 맞이하는 두 사람의 옆에 쿠기사키가 서 있었다. 둘에게 눈에 띄는 부상이 없는데 안심하던 나나미는 학생들 뒤에 선 고죠를 보고 안도하며 웃었다.

 

“요, 나나미~ 무사했네!”

“고죠 씨야말로 다행입니다.”

“그래. 대충 사정은 들었... 지만. 거기 뒤의 신사분. 잠깐 우리랑 이야기 좀 할까?”

 

메이메이와 주구 구매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별것 없는 잡담을 하고 있던 마유가 문득 대화를 멈추고 고죠를 바라보았다. 막힘없이 흘러나온 대답은 예상 외로 간단한 승락이었다.

 

“이야기입니까? 얼마든지. 대화, 사교, 커뮤니케이션은 좋아합니다.”

 

마유는 메이메이와 함께 고죠와 학생들을 따라갔다. 이지치는 나나미를 데리고 사무실로 가더니 입술 위에 세로로 손가락을 세우고 휴대폰을 꺼냈다. 후시구로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사람과 영상통화 중이라고 표시된 휴대폰의 액정에는 마유가 비치고 있었다.

 

 

 

-이야기 전에 통성명부터 할까요? 처음 뵙겠습니다. 마유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유가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고죠는 그걸 받더니 작게 명함의 내용을 읽어내렸다. 나나미가 알고 있는 개인 트레이너라는 직업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대기업의 전무라는 직함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당신 나보단 연상이지? 그래도 꽤 젊어 보이는데 그 나이에 꽤나 대단한 직함이네~

-가업이라.

 

가업. 그래, 저 차도 운전사도, 병실의 크기도 옷도 시중드는 사람들도.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사람이 아닌 건 뻔했다. 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나나미는 순간 비틀거리다가 책상을 짚었다. 이지치가 서둘러 의자를 빼고 나나미가 앉을 수 있도록 위치를 잡아주었다. 화면의 마유는 태연하게 웃으면서 의자에 깊이 기대고 앉아있었다. 마유는 통성명을 하자며 명함을 주었지만 고전 측 사람들은 아무도 이름을 대지 않았다.

 

-일단 담임으로서 쿠기사키를 보호해 준 데 감사 인사를 할게.

-천만에요.

 

-그런데 왜 오늘에서야 데려온 거야?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설명해 주겠어?

-제가 나흘이나 지나서 고전에 온 건 나나미 씨가 오늘 새벽에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나? 갑자기 나온 본인의 이름에 나나미가 놀라 눈을 크게 뜬 채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았다.

 

-나나미가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에서야 왔다고? 그건 그렇다 쳐도 닛타와 쿠기사키가 우리에게 연락하게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동안 나나미 씨를 걱정하느라 그만. 보기엔 의심스럽겠지만 전 나나미 씨가 정신이 든 걸 확인한 뒤 바로 의복을 준비시키고 의복 준비가 끝나자마자 여기로 온 겁니다.

 

화면 밖에서 닛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이 맞아요. 제가 매일 병실에서 나나미 씨의 상태를 확인했었습니다. 어젯밤까지 의식이 없으셨어요. 그랬구나. 매일 와서 상태를 확인했구나. 그러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울며 달려온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그 부분은 넘어갈게. 그런데 당신이 나나미를 전속으로 지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 역시 그 이야기입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웃는 모양새가 퍽 얄미웠다.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 주변에서 혀를 차는 소리와 뭐야, 같이 한마디씩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제까지 의식이 없었던 나나미를 지명한 거야? 본인의 동의도 없이.

-무슨 생각... 무슨 생각이냐고요?

 

고죠 씨가 ‘의식이 없었던’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뻔했다. 아직 내가 만전이 아닌데 또 일을 하게 만드느냐는 거겠지. 마유는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보며 하아, 하고 길게 숨을 토해냈다. 그 한숨과 동작 하나하나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마유는 지금 그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걸 모르겠습니까?

 

자세를 고치고 말하는 목소리와 미소에선 한심하다는 느낌은 사라진 상태였다. 오히려 선생이나 보호자가 학생이나 피보호자를 가르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흠, 하긴 모르려나. 당신들은 나나미가 어떤 상태였는지 모르니까.

 

마유는 자기 휴대폰을 꺼내 조작하더니, 책상 위로 밀어 고죠에게 건넸다. 보여지는 화면은 메신저 어플. 상대는 마히토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고죠가 잠시 스크롤을 해 내용을 확인하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옆에 선 누군가에게 건넸다. 사람들의 손을 거친 휴대폰이 후시구로에게 건네진 듯 화면에 빛을 반사하는 기기의 액정이 비추어졌다. 거기 보인 건 상대방이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메세지와 화상을 보낸 이력이었다.

 

<저기, 마유 형~ 칠 대 삼 주술사 찾았어. 꼴이 엉망이야ㅋㅋㅋ>

 

그리고 보내진 사진을 가볍게 눌러 확대한다. 그 사진이 나나미 자신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던 건 베이지색 바지와 손에 쥐고 있는 주구, 반밖에 남아있지 않은 금색 머리카락 덕분이었다. 옆에서 이지치 군이 히, 하고 헛숨을 들이킨다. 나는 이런 상태였구나.

 

<지금 가는 중이다. 도착할 때까지 보호해 줘>

<응~ 알았어. 고칠 수 있으면 고쳐볼까?>

 

마히토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마유가 마히토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저 사람을 위해 자신을 고치겠다고 할 정도의 관계였다니. 후시구로가 아래로 스크롤하니 마유가 회신한 이력이 보였다.

 

<부탁해.>

 

마유의 짧은 회신 이후에 마히토에게서 동영상이 송신 된 이력이 있었다. 후시구로는 그것 또한 탭해서 재생했다. 자신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역사 내에 작게 울린다.

 

[말레이시아... 그래, 말레이시아... 쿠안탄이 좋겠어...]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하고 있었구나. 이번엔 조금 얼굴이 뜨거워졌다. 전화 너머의 나와 이지치 군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굳이 이런 것까지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에 후시구로 군이 동영상을 끄고 마유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마유는 웃는 얼굴로 휴대폰을 받아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다만 아까까지 자애롭게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 사진과 영상을 봤을 때의 내 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노기를 눌러 참는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인데도 감정이 저렇게 드러나다니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양손을 깍지 끼고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고 앉아있던 자세가 변했다. 마유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테이블에 팔을 올렸다. 왼손 검지가 일정한 리듬으로 휴게실의 나무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그 정도로 다친 나나미를 내가 살려냈습니다. 낫게 한 건 마히토지만 마히토가 내 부탁을 들어 줘서 낫게 해 준 것이죠. 그러니 내가 했다고 해도 딱히 비약은 아닙니다. 애초에 둘은 서로 적대하는 입장이라고 했으니 내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치료해 주지 않았겠죠.

 

톡, 톡, 톡. 손가락이 멈추지 않는다. 마유의 목소리 사이에 박자를 넣는 것처럼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운이 좋았다... 이 정도가 아니군요. 기적이었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어요. 마히토가 나와 유미에게 관심을 가졌고. 내가 마히토와 교류하기로 마음먹고. 마히토가 나나미를 알고 있었고. 다른 누구보다 마히토가 나나미를 먼저 발견했고. 나에게 나나미의 상태를 알려주었고. 나나미를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내 부탁을 들어 줘서 나나미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톡.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손이 주먹 쥐어졌다.

 

-그렇다면. 나나미에게 두 번째 생명을 준 거나 다름없는 내가, 나나미를 내 곁에 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설명에 이어 흘러나온 말은 어처구니없는 폭론이었다. 존댓말도 사라진 채, 목소리는 명백히 화가 묻어나온다. 웃고 있지만 목에 솟아오른 힘줄이 보인다. 이렇게 화를 내는 사람이구나.

 

-마유 씨. 그런 말은 이상해.

 

마유의 말에 이타도리가 바로 끼어들었다. 마유를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1학년 세 명은 마유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 만큼 지금 마유에게 말을 걸 수 있었겠지.

 

-지금 그 말대로라면 소방관이나 경찰, 의사들이 목숨을 구해준 사람들은 전부 자기를 구해준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 되잖아.

 

이타도리 군이 한 말 그대로다. 나나미는 마유가 뭐라고 대답할지 머릿속으로 몇 가지 선택지를 떠올리면서 가슴을 내리눌렀다. 아까부터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진다.

 

-그래. 방금 건 폭론이지. 그럼 이런 괴상한 이론이 아니라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감정론으로 들어가 볼까?

 

몇 초 안 되는 사이의 그의 웃음에서 분노가 걷혔다. 기회를 잡았다는 듯 검은 눈이 빛난다. 광기에 가까운 즐거움이 스며난다.

 

-감정론?

-사랑하는 사람.

 

사람들이 술렁인다.

 

-좋아하는 사람. 함께 있는 시간이 남들보다 편하게 느껴지는 친구. 내가 트레이닝을 전담하는 사람. 직장의 손님.

 

자신과 마유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그 말에 나나미는 작게 신음했다. 심장이 안쪽에서부터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꼴이 된 걸 봤을 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을 것 같아?

 

주먹 쥔 손에서 빠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타도리. 네 소중한 사람이 이런 꼴이 되었다면 어떤 심정일 것 같아?

 

마유의 질문에 이타도리는 침묵했다. 이타도리 군은 붙임성이 좋고 사람을 잘 따르는 아이다. 게다가 마히토를 조우하고 함께 싸웠던 자신을 고전의 다른 어른들에 비해 친근하게 여기고 따라주고 있었다. 지금 그 질문에 아까 본 내 모습을 떠올리고 마유의 심정에 공감해 버렸겠지.

 

-현대 의학으로도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를 큰 부상이었어. 살아난대도 심한 후유증... 반신의 화상, 한쪽 눈의 실명은 피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런 부상이 기적적으로 후유증 없이 나았는데.

 

마유의 주먹이 가볍게 테이블을 쳤다.

 

-그런데 간신히 살려냈더니,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꼴을 보라고? 웃기지 마. 그 꼴은 못 봐!

 

그 말에 나나미는 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왜 지금 그 말을 나에게 해 주지 않았던 거야...”

 

시부야에서 나를 안고 싶다고 했던 것, 깨어났을 때 힘줄을 자르겠다고 했던 것 전부 진심이겠지. 화가 나서 새어 나온 새카만 부분이겠지. 내 앞이라 방심해서 보인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 불온한 말도 괜히 가슴을 울렸다.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나나미와는 반대로 마유는 감정을 쏟아내고 진정했는지 주먹 쥔 손을 펴 다시 테이블을 검지로 두드렸다. 처음보다 느린 박자였다.

 

-나나미의 의사도 묻지 않고 지명했다고요? 어차피 임무 지시가 내려오면 당신들에게 거부권은 없지 않습니까. 전 어디까지나 고전의 창구를 통해 의뢰를 했고 그 과정에서 나나미 켄토 일급술사를 희망했을 뿐입니다. 그 임무가 주령 퇴치가 되느냐 자산가의 옆에 붙어있느냐 그 정도 차이가 생긴 정도예요.

 

어느새 존댓말과 온화한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 같았던 그 표정이었다. 고죠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하나 상냥하게 설명하고 설득해서 자기 행동을 이해시키고 납득시킬 자신이 있는 거겠지.

 

-당신이 그 과정에서 뇌물을 썼다는 것도 들었는데.

 

뇌물. 뇌물? 맞아. 그러고 보니 병원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달에 5천만을 낸다고. 그게 총감부에 내는 돈이었나?

 

-실례입니다. 제대로 된 의뢰비예요. 달마다 도쿄 고전에 5천만. 교토 고전에 5천만씩. 나나미 씨는 나와 함께 살게 되니까 생활 전반은 제가 책임지고, 봉급은 따로 드릴 겁니다.

 

달에 1억. 나 때문에 달에 1억? 생활비와 봉급은 따로? 피가 식는다. 이 옷이 어느 정도 가격이 나갈지는 따로 조사도 필요 없다. 메이메이 씨가 고급 브랜드라고 말할 정도니까. 한때 증권회사에서 일했던 나나미는 그 금액의 가치를 남들보다 쉽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액수가 마유의 감정의 크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왜 굳이 양쪽 학교에 돈을 내는 형태를 취한거지?

-아이들은 좀 더 나은 환경에 있을 권리가 있습니다. 기숙사도, 수업도, 훈련도, 임무에 가지고 갈 주구도. 돈만 있으면 좀 더 질을 올릴 수 있고 그러면 살아날 가능성도 올라가겠죠.

 

그렇게 말하는 마유의 시선이 이타도리와 쿠기사키를 향하더니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응시했다. 후시구로 군을 보고 있구나.

 

-저는 세 명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니까. 혹시 주술사를 그만두고 싶다면 교육이나 생활, 대학과 취업까지 서포트 할 의향이 있으니 기억해 줘요.

-총감부에도 따로 돈을 줬다면서?

 

마유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이 부정하는 모습과, 거기에 고죠가 더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뚜렷한 증거는 없는 것 같았다. 나나미는 옆에 서 있는 이지치를 바라보았고, 이지치는 나나미가 바라는 답을 주었다.

 

“...명당 일시불로 1억씩 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추정. 이지치가 말하는 추정이라면 거의 확정이다. 나나미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뛰지 않았다. 엉켜있는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휴게실까지 가는 덴 몇십 걸음도 걸리지 않았다. 휴게실의 문을 있는 힘껏 열어젖힌 나나미가 제일 먼저 본 것은 마유의 놀란 얼굴이었다.

 

“나나미 씨? 왜 그런 얼굴로.”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 울고 있었지. 나나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트는 마유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그에게 키스했다. 당황한 나머지 벌어진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고, 이빨이 부딪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안에 혀를 넣었다. 담배의 맛이 났다. 놀란 마유의 눈이 커졌다가 곧 온화하게 풀렸다. 손을 뻗어온다 싶더니 사람들의 시야에서 나나미의 얼굴을 가렸다. 짧다면 짧은 키스 후에 마유의 멱살을 놓고 떨어진 나나미는 길게 숨을 고르고 말했다.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마유는 나나미의 등을 보면서 입술을 핥았다. 어느새 그의 어깨에서 빠져나온 유미가 복도를 달려 나나미를 쫓아갔다.

 

“기다려- 같이 가-!”

 

 

 

복도를 걷던 나나미는 그를 따라온 유미를 보고 그녀를 팔에 앉혀 안아 들었다. 아이의 주령. 주령인 아이. 신기하게도 그녀와의 접촉에 더 이상 거부감은 없었다. 마유와의 접촉도 그랬다. 그 사람과 키스 할 수 있구나. 안도감인지 깨달음인지 모를 감정에 가슴이 다시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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