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소재
리퀘스트
가라르의 로톰은 정부에서 관리하는 포켓몬인데, 결국 정부에 납품하는 모기업은 매크로코스모스이며 로즈의 의사로 단델에겐 로톰의 관리정보를 알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10년간 챔피언으로서 쌓아온 이미지는 단델이 이 귀중한 정보로 불법적인 일을 할 리 없다는 인식을 주었고 정부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게 했다. 단델의 도덕적 잣대 역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다면.
“고소해도 고소해도 튀어나온다니까.”
금랑이 지껄였다. 술을 마셔 뺨은 발그레했다. 생각보다 긴 속눈썹이 내려갔다 올라오면 그 그림자가 푸른 눈동자를 더 신비롭게 만들었다.
금랑은 소위 말하는 자석이었다. 병신이 꼬인다. 샤워하고 돌아왔을 때 금랑의 장갑에 흰 액체가 묻어있는 일을 옆에서 목격했다. 금랑은 태연하게 우엑 소리를 내곤 증거로서 촬영하고 스탭에게 얻은 봉투에 넣어두었다. 금랑의 목울대는 분명 이상한 방식으로 움직였었다.
금랑이 혀가 꼬일만큼 술을 마시는 일은 드물다. 금랑의 최대 스폰서는 은행이고, 금랑은 이미지관리에 헌신적이다. 단델은 한 번도 자기가 목격했던 피해가 기사화된 것을 본 적 없다. 입술이 술에 젖어있었다. 혀가 느리게 움직인다.
“새 챔피언보다야, 내가~ 당하는 게 낫겠지만~”
“그렇게 말하지 마.”
“흐흐.. 단델은 상냥하네~”
이렇게 멋대로 착각해 주니까 이상한 놈들이 붙는 게 아닐까? 단델은 금랑을 탓하고 싶었다. 상냥한 금랑은 술을 잔뜩 마시고도 단델에게 안주를 먹이고 물을 챙겨준다. 금랑의 손 끝이 단델을 위해 움직이는 것을 본다.
“그렇지도 않아.”
“겸손도~!”
상냥한 금랑. 등을 내리치는 손길은 절대로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없는 힘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대로 손목을 꺾어 테이블에 쓰러뜨려 그 위를 덮어도 금랑은 단델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겠지. 술이 돌아 윤기를 더한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 차면 이슬같을까 파도같을까. 상냥한, 금랑이, 긴 손가락으로 단델의 목덜미를 짚었다.
“열이 있나, 단델? 그만 갈까?”
“..조금 피곤했나봐. 그래, 이만 가는 게 좋겠다.”
단델은 애써 웃었다. 상냥한 금랑. 단델을 걱정하며 먼저 일어나 계산해버리는 모양은 평소와 다름없다. 금랑은 강해서 모든 안티 테러를 차분히 처리했지만, 때때로 지치고는 했다. 단델은 단지 금랑의 휴식처를 없앨 수 없어 스스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금랑이 불러준 택시를 타고 딴 데 새지 말고 바로 집으로 들어가서 연락하라는 인사를 받아 투덜거리고 있자면 아머까오가 하늘로 날았다.
위에서 보아도 선명하게 보이는 주황의 반다나와 여전히 손을 흔들어주는 금랑을 끝까지 바라본다. 방범을 겸해 주변을 돌고 있는 스마트로톰을 확인하고서야 단델은 고개를 돌렸다.
단델의 도덕은 금랑에게만은 허락되지 않았다.
“로톰. 카메라를.”
단델의 스마트로톰은 소리를 내지 않고 단델의 앞에 떠올라 화면을 전환했다. 금랑의 것으로부터 전송되는 장면을 보고 단델은 마음을 놓았다.
흐릿하게 어둠에 좀먹히던 물빛은 다시 반짝이며 앞을 보고 있었다. 이따금 알짱거리는 로톰에게 웃으면서 포케스타그램이나 일정에 관해 말을 건다.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모두 잡아 들으며 단델은 양 손의 엄지끼리를 부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허물처럼 벗어가며 침실로 간다. 침대시트 아래에 숨겨진 손잡이를 잡고 들어올리면 침대 옆에 숨겨진 계단의 뚜껑이 열린다. 단델은 침대 위에 널부러진 생활복을 잡아 입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스마트로톰이 충실히 따라오며 현관문이 잠기자마자 볼륨을 높인 금랑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도착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아, 상냥한 금랑은 분명히 연락하라고 했었다. 단델은 천천히 메세지를 적고 틀린 말은 없는지, 이상하게 느껴질 주준은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언제나처럼의 문장인 것을 확신하고 메세지를 보내면, 화면 속의 금랑은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지으며 도착했나보다 하고 속삭였다.
“응, 도착했어. 집이야.. 안락하고, 아늑하고, 편한.”
손가락을 퉁기면 스마트로톰이 조명을 켰다. 단델은 깊이 숨을 내쉬며 방의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빈백에 웅크려 앉았다. 금랑은 상상하지 못 할 것이다.
한 번도 로토무를 받아들인 적 없는 순정기계들이 여기저기 걸려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대부분은 금랑이 힘들어하는 순간들이었다. 이상하게 호흡하며 숨을 삼키던 때의 목울대, 잘게 떨리는 손가락을 숨기려 꽉 쥐는 주먹, 애써 웃었지만 경령하는 눈가를 감추려 반다나를 끌어내릴 때의 표정 따위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단델은 빈백에 깊게 파고들어 등을 기대며 천장으로 고개를 올렸다. 천장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스크린엔 늘 자신에게 질 때의 금랑이 비추고 있다. 저 분한 표정이 새긴 둔한 불꽃은 여전히 꺼지지 않는다.
상냥한 금랑. 새 챔피언이나 어린 챌린저들에게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찍어준 사진들은 모두 어린아이가 칼로 긁혀 날카롭게 벗겨져 있었다. 상냥한 금랑. 라이벌의 어두운 마음은 하나도 모르고 혼자만 맑은 표정으로 있다. 상냥한 나의 금랑.
하나하나 모아온 금랑의 흔적들을 살피고 단델은 깊이 눈을 감았다. 금랑은 스마트로톰을 떼어놓고 생활하는 일이 적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알몸으로 욕실에서 뛰쳐나오던 때의 사진은 지금은 눈에 독이었다. 품이 넓은 반팔과 짧은 반바지로 소파에 웅크려 텔레비전을 보던 것도 무리다.
금랑이 약한 면을 보일 수 있는 단 한 명이 저라면, 단델은 절대 그 역할을 포기할 수 없다. 이 독은 홀로 삼켜야 한다. 단델은 금랑의 상냥함에 빠져 죽을 것이다.
“로톰, 잘 자.”
정해진 명령어에 로톰이 모든 기능을 정지시키며 충전모드로 돌아갔다. 조명과 스크린들이 일제히 꺼지며 완전힌 어둠 속에서 단델은 금색 눈을 떴다.
하다못해 네가 호수라면 그 위에 달처럼 떠오를 수 있을텐데. 상냥한 나의 금랑, 네가 나를 죽이고 있어.
오늘은 쉽게 잠들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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