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9/22~)

100일 챌린지_8일차 [박사팬텀] Harmonics

Ranunculus by 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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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면서 들은곡: Depapepep <風見鶏>

  • 요즘 자꾸 농땡이 부렸더니 글이 잘 안써져! 그치만 잘 안써져서 농땡이 부렸어요.

🎶🎵

창밖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함께 흥얼거리는 허밍, 낡은 금속현이 손에 닿아 끼릭끼릭 미끄러지며 우는 소리, 목재로 된 몸통에 손톱이 닿아 나는 박자감, 다소 낯설기도 하면서 익숙한 듯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는 박사의 모습을 팬텀은 감상하고 있었다. 비룩 무대는 협소한 집무실의 쇼파였고 자신은 박사의 반대편 쇼파에서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관람하는 관객이었지만 그것이 기타소리가 주는 평온함과 일상감과 어우러져 퍽이나 편안하고 따스했다. 박사가 연주하는 기타소리는 어쩌면 음악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에겐 가치가 없는 불협화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팬텀에게는 이 어설프지만 편안한 소리가 마음속의 불길한 종소리들을 잠시간 잠재우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엄지와 검지가 현을 위를 살며시 닿아 울리는 맑은 하모닉스가 하나의 곡이 끝나는 아쉽고도 깔끔한 마무리가 되었다. 팬텀은 무릎위에서 고롱고롱 우는 미스 크리스틴을 쓰다듬는 손을 살며시 들어 박수를 쳤다. 팬텀의 박수 소리는 유령인 그처럼 작디 작았지만 박수를 치는 그의 표정은 따스한 미소가 감겨있었다. 들어줘서 고마워. 잠시간 기타를 만지던 박사는 팬텀의 박수소리에 쑥스러운 듯이 기타를 꼭 껴안았다.

"있지, 팬텀은 악기를 배워본 적이 있어?"

"무대 위에서 필요로 하는 정도의 연주라면 조금은 배워본 적이 있다. 주로 피아노, 바이올린 같은 클래식한 것들이었지"

"그렇구나? 그럼 기타는 쳐본적 있어?"

팬텀은 잠시 고민을 한다. 기타를 배운 적은 있다. 그러나 그건 클래식 기타였고 그나마도 무대 위에서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쳐본적이 있냐고 했을때 자신있게 Yes라고 말할만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젓는 팬텀의 모습에 박사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한번 쳐볼래? 내가 알려줄게! 박사는 제법 신났는지 기타를 안고 자신이 앉아 있는 쇼파의 옆자리를 톡톡 쳤다. 팬텀은 박사가 기대하는 대로 박사 옆자리에 다가가 살며시 앉았다.

몸에 안은 기타의 크기는 생각보다 작고 또 작은데도 묵직했다. 이전에 극단에서 클래식 기타를 만졌을 때는 이거보다 더 컸던 기억이 있었는데 어쿠스틱 기타는 그거보단 크기는 작은 느낌이었다. 긴장한건지 아니면 기타가 부서질 것 같은 불안인지 팬텀은 약간 떨고 있었다. 박사는 그런 팬텀의 몸을 살며시 토닥이며 힘을 빼도록 교정해주었다. 괜찮아, 힘을 살짝만 빼고, 이거는 이렇게 응응 살짝 안고 오른손으로 지판을 잡아봐. 왼손은 아직은 두고. 곁에서 박사의 속닥이는 지시에 팬텀은 귀도 귀 안쪽에 뇌도 저 깊은 곳의 심장도 간질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악기를 배운다는 건 이렇게 재채기가 날것같고 편안한 기분이었던가? 이전에 악기를 배웠을때는 완벽해야 했다. 무대위에선 미숙한 성질의 것을 연기하더라도 완벽하고 완성된 것만이 오를 수 있었고 완벽함을 위해선 불완전한 소리에 가해지는 비난과 채찍들도 감수해야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됨을 알고 있는데 팬텀은 이미 익숙해져 버린 배움 속의 채찍이 없는 것에 어색하면서 박사가 자신을 잡아주는대로 따라했다.

띵, 첫음이 울렸다. 어때? 박사는 팬텀을 바라보았다. 박사는 팬텀의 손을 잡고 현을 닿을듯 말듯하게 튕겼다. 맑디 맑은 현이 울리는 파동이 팬텀의 손끝을 타고 심장을 건너 간지러운 귀를 톡 하고 건드리며 빠져나갔다.

"원래라면 어쿠스틱이니까 코드를 알려주는게 좋지만, 이거는 하모닉스라고 하는건데 보통 손이 지판을 눌러서 나는 소리와 다르게 굉장히 맑고 청아해. 난 이 주법을 자주 쓰는 연주를 좋아하거든."

띵, 팬텀은 방금 한것을 또 따라해보았다. 지판에 박힌 쇠 위를 지나는 현을 닿을듯 닿지 않을듯 톡하고 튕기는 것. 팬텀은 이것의 자세한 원리를 알지 못했지만 어쩐지 자꾸만 듣고 싶어서 그것을 계속 반복했다. 박사는 마치 신기한 물건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지판 위 현을 두드리는 팬텀의 손가락을 감상했다.

"잘하는데? 맘에 들었구나. 팬텀은 뭐든 금방금방 배우니까 언젠가... 그래, 나랑 같이 듀엣곡을 연주할 수도 있을지도 몰라."

듀엣, 둘이서 함께 하는 연주. 팬텀은 멀게만 느껴졌던 무대 위의 두 사람을 떠올려보았다. 줄곧 무대위에 자신은 혼자였다. 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무대 위를 거닐어도 자신은 늘 혼자여만 했다. 그런 자신이 듀엣을 할 수 있을까? 나의 소리를 박사에게 맡기고 박사 또한 자신의 소리를 자신에게 맡겨도 되는걸까? 결국 이 모든것이 나의 저주스러운 목소리에 의해 어그러져 불협화음을 내며 미로 속으로 빠지게 되지 않을까? 그때 박사는 지판위에 멈춰선 팬텀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아직 이 손가락에는 하모닉스의 잔음이 남아있었다. 지금 이 손에 닿는 느낌을 좀 더 기억하고 싶었다. 따스한 손의 온도와 하모닉스의 잔음. 이것을 기억한다면 설령 미로속에서 헤메이더라도 괜찮을거야. 귀에 들리지 않을 듯한 박사의 소리가 들렸다. 그래, 괜찮을거야. 혼자가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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