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

이성회복제

박사x실버애쉬/BL/둘이 이미 사귀는 중.

무지몽매 by koor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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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는 복도 주변을 가볍게 살벼본 다음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이 떨린다. 주머니를 뒤적거려보지만 손에 걸리는 게 없다. 아까 먹은 이성회복제가 끝인 모양이다. 박사는 비상용 안쪽 주머니에 담긴 빈 앰플을 보다가 내팽겨치고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근육 경련 오지 않음. 시야 멀쩡함. 짜증은 언제나 있음. 식은땀 남. 어지럼증 심하지 않음.

누워서 쉬면 해결 될 범위네. 밥 안먹은지 얼마나 되었더라? 박사는 끊기는 집중력을 끌어 생각을 이어보려고 하다가 포기했다. 의식하고 나니 배가 지나치게 고팠다.

박사는 떨리는 주먹을 들었다. 그리고 배를 툭 내리쳤다. 배고파 하지마 임마. 왜 배고파 해. 배고파 할 시간에 애너지 소모나 줄여. 툭툭툭. 주먹으로 두들기며 배가 고픈 탓을 신체에 전가해보아도 배고픔이 가시는 일은 없다. 오히려 작은 움직임에도 금방 지치기만 한다. 박사는 한숨을 내뱉는다.

왜 사람은 먹어야 하나. 왜 먹는 걸로 이성을 채우고 살아가는 걸까. 왜 뇌가 아니라 마치 배로 사고 하듯이 그렇게 신체는 반응하나...

살아있는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한다. 박사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후우..."

몸의 떨림을 진정하려 심호흡을 해보지만 몸 상태는 여전히 신체의 한계를 여전히 알리기만 할 뿐 뇌와 이성의 판단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빨리 회복하지 않으면 아마도 숙소에서 나오는 오퍼가 발견하겠지. 박사는 몇 번이나 반복된 익숙한 일에 넌더리치면서도 온몸에 힘을 풀었다.

식사와 관련해서 또 잔소리를 들을 판이다. 부족한 식사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반복된 이성회복제 흡입으로 인해 당이 종종 떨어지는 것 뿐인데... 밥 먹일 시간에 쉴 시간을 주라고.

왜 주변에서는 일을 줄일 생각을 하는 대신 혹사를 버틸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박사의 뇌를 혹사 시키는 것도 로도스고 그걸로 인해서 이득을 보는 것도 로도스다. 그런데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더라도 박사는 어떻게든 결국 일을 찾아서 할 성미라 결코 일과 떨어질 수 없다. 박사는 앞으로의 확정된 미래가 너무나도 서글펐다.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곧 발견되겠군. 그리고 켈시에게 이동되겠지. 이성회복제나 링겔을 달라는 요구는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죽으로 시작해서 디저트를 다 먹을 때까지 식당에 잡혀있을거야. 먹는 내내 씹는 횟수랑 삼키는 빈도도 체크당할거고 그 이후엔 몸무게를 재고 근육량과 골밀도 검사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잘 먹기만 하면 되는데 왜 안먹냐고하는 잔소리 무한 제공은 덤이다.

박사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사육당한다.

이럴 때마다 박사는 로도스에 사육당한다는 감각을 받았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국가와 집단에 의해 사육당한다. 인력이 곧 국력이고 집단의 이득이니까. 자살이 기피되거나 고통스러운 이유는 이런 단체의 이득에 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일 게 틀림 없다. 죽음을 고통으로 착각 시키고 뒤덮어서 강제로 살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해서 이득을 갈취한다…. 이 대지에 차라리 죽는게 편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생명 유지를 위한 행위들은 또 얼마나 추잡한가.

어지럽게 생각을 이어나가는 도중, 복도의 문이 열린다. 박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저 멀리 내던진 이성회복제의 앰플을 노려볼 뿐이다. 지금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누굴까. 배치도와 업무 내역에 대해 조금만 생각하면 도출 할 수 있는 답이지만 생각을 하고 싶진 않다.

인기척이 잠시 멈춰있다. 시선이 느껴진다. 박사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다.

"맹우."

"....응."

대답이 반박자 늦다. 숙소 앞에서 나온 실버애쉬를 보지도 않고 박사는 대답했다.

"쓰러진건가?"

"....아니."

"그럼 당이 떨어진거겠군."

느릿한 발걸음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박사는 힘겹게 고개를 돌리려다가 포기했다.

"식당으로 갈텐가?"

"...아니. 이성 회복제... 줘."

실버애쉬는 익숙하게 주머니를 뒤적여 앰플을 꺼낸다. 맡겨두었던 거다.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며 박사는 손을 뺕었다. 그러나 앰플이 손에 들어오는 일은 없다. 다가간 만큼 물러나는 앰플. 천천히 페이스 가드를 내리던 박사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엔시오데스!!"

당이 떨어진 여파로 짜증섞인 목소리가 필터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다.

"왜 식사를 하지 않지?"

"뭐야."

"대답하면 주겠다."

"나 밥 제때먹어."

"부실하지 않나."

"정량이야."

"네가 하는 일에 비하면 부실하지."

똑 앰플이 깨진다. 그리고 박사의 벌린 입으로 톡톡 한 방울씩 회복제가 들어왔다. 톡 쏘는 겨자의 맛이 정신을 짜릿하게 자극한다. 박사는 몸을 천천히 겨우 일으켜 실버애쉬의 손목을 잡고 회복제를 갈급하게 받아마셨다. 한 방울 한 방울 흘릴까 혀를 내밀어 핥으면서까지.

"종종 보면 넌 먹는 걸 혐오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응."

짧은 긍정. 손에 묻은 것 까지 핥아먹으려는 기세에 실버애쉬는 순순히 앰플을 박사의 손에 넘겨주었다.

 "왜지?"

"살기 위해 먹고 싶으니까."

빈 앰플을 물고 쪽쪽 빠는 박사를 보고 실버애쉬는 뒤로 살짝 물러난다. 이성이 바닥난 박사는 어딘가 미쳐있다.

"먹기 위해 사는게 아니라 살기 위해 먹으려고."

박사는 곧이어 빈 앰플을 저 멀리 던진다. 빈 앰플끼리 마주쳐 짤랑이는 소리가 났다.

"배고픔에 쫓겨 생각하면 뇌가 아니라 배로 사고하는 것 같잖아."

실버애쉬가 한숨을 내뱉는다. 박사는 아직 힘이 잘 돌아오지 않는 팔을 주물렀다.

"배고프면 사냥하고 먹고 졸리면 자고, 분명 그런 삶조차 이 시대에는 사치겠지만. 난 비스트처럼 살기 싫어. 식욕에 져서 살아있기 싫다고."

"식욕에 져서 살아있다라... 난 네가 금욕에 목매는 타입인 줄 알았다만."

"그랬으면 네 뒷구멍에 내 좆을 박지도 않아."

답지않게 직설적인 표현. 실버애쉬는 드물게 박사의 정신적 틈을 보았다.

"사실 너랑 하는 섹스 진빠지긴 해도 꽤 좋아해. 체력만 되면- 그래, 하루종일 진탕 해보고 싶을 만큼."

"오호."

"그래도 너랑 섹스한다고 내가 쾌락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

"그저 제때 먹는 것 만으로도 사람은 살 수 있어서 문제라는 거군."

"어."

박사는 바닥에 퍼질러 앉아 살짝 찌그려진 페이스 가드를 펴 얼굴이 착용한다. 잠시 마주친 시선 끝의 동공은 살짝 풀려있다. 실버애쉬는 확장된 눈동자가 스르륵 가면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숨조차 쉬지 않고 관찰한다.

그러고 보니 박사에게 삶과 죽음에 관한 가치관에 대해서 물어 본 적이 없다.

사람을 지휘하여 때로는 구하고, 때로는 사지에 내몬다. 승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버림패를 만드는 건 체스 기사에게 필연적인 행동이다. 체스 기사는 왕을 잡기 위해 최고의 패인 퀸을 교환하는 짓도 서슴없이 할 수 있다. 그리고 체스 기사이자 자기 자신조차 킹이라는 기물의 하나로 보는 그에게 있어... 퀸은 아마도.

실버애쉬는 척추에서부터 꼬리끝까지 타는 듯한 전류를 맞은 듯 작게 움찔했다. 퀸을 버릴 수 있는 체스 기사가 손해를 감수하고 자신에게 묶여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도 있지. 네가 본능으로 살기 싫어 먹고자 하는 욕구를 무시한다면 오히려 그 본능에 휘둘려 네 행동을 구속하는게 아닌가."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본능에 묶여서 생각하는 건 다른 범위거든."

슬슬 다시 평소의 페이스로 돌아오는 박사를 보고 실버애쉬는 혀를 찬다. 금간 정신이 슬그머니 이성 아래로 가라앉아버렸다. 바닥에서 발을 맹하게 까닥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 손으로 박사의 팔을 잡고 강제로 일으켰다.

"..어."

"식당으로 가지."

"으..응? 왜?! 갑자기?!"

허술한 듯한 반응에 실버애쉬는 가볍게 코웃음으로 대응하며 뻣뻣한 박사를 끌고 성큼성큼 걷는다.

"네가 나와의 섹스가 좋다고 하지 않았나. 하루종일 할 수 있을 만큼 체력을 키워라. 그러기 위해선 든든한 식사가 필수다."

"지금 밥먹는다고 바로 체력이 늘겠냐?! 오늘 할 것도 아니잖아!!!"

"오늘 할거다."

"뭐?"

갑자기 버둥거리기 시작하는 박사를 단숨에 제압하고 질질 끌고 간다. 192의 덩치에게 박사의 힘이란 아무리 전력으로 대응한다 한 들 미약할 수밖에 없다.

"아래를 적시고 갈태니까 기대하도록."

작게 속삭인 말에 버둥거리는 몸이 순간 멈춘다. 페이스가드에 가려진 얼굴이지만 실버애쉬는 박사의 표정을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12시 전까지 업무를 끝낼 수 있겠지?"

박사는 아주 조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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