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9/22~)

100일 챌린지_6일차[박사팬텀]가면

Ranunculus by 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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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면서 들었던 곡: 백예린<나도 날 모르는 것처럼>

  • 5일차도 펑크를 내버렸는데… 오늘은 2000자보다 조금 더 많아요…

딱딱, 손톱이 거슬린다. 손톱이 거슬린다는 것은 불안하다는 증거였다. 박사는 불안하면 손톱이 길어져 다듬어지지 못한 부분이나 손톱의 밑살을 물어뜯곤 했다. 주로 혼자 있을때 이런 버릇이 드러나곤 했지만 켈시나 아미야 같은 측근에 있는 사람들에겐 이미 알대로 알려진 습관이었고 그들은 박사의 그런 행동이 텅빈 자아가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불안에서 기인한 것을 알기에 걱정하면서도 만류하진 않는다. 하지만 박사도 그들의 걱정어린 시선을 알기에 어지간해선 다른 사람이 있을때 이런 행동을 하지 않으려 이성을 약간 소모할정도의 신경을 썼다.

달이 어슴푸레 차가운 빛을 창밑으로 내렸다. 박사는 지금 집무실에 혼자 있다. 혼자, 혼자라는 단어는 참 편리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자기만의 사고에 갇혀있다면 헤메였다면 꺼내줄 사람이 없다를 의미하기도 했다. 박사는 지금 아무도 없다고 믿고 싶었다. 지금 발밑에 그림자에 조금 무게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어쩐지 박사의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 것 같았다. 최근에 이런 시간을 가졌던게 언제였지? 근래 너무 많은 일들이 박사의 발걸음을 재촉해왔다. 돌아보면 로도스에 온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석관에서 깨어나고 로도스에 오고 그즘에 만난 어린 예비 오퍼들은 이제 한사람분 이상의 역할을 맡을 정도로 성장했고 아미야도 눈을 뜨고 만났을때부터 성숙한 아이였지만 이제는 정말로 로도스의 리더라고 불릴만큼 어른이 되어있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나이를 먹고 변화한다. 박사 자신은 어떠한가. 박사는 늘 자신이 채워져있는 부분보다 비어있는 부분이 더 크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빈부분보다 채워져있는 부분에 집중하고 살아가는 것이 더 정신건강과 자기성장에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사는 이미 그런 긍정적인 것을 돌아볼만큼의 여력이 없었다. 물론 로도스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경험을 해왔으며 그 모든것이 좋았고 나쁘고 그 둘만으로 평가할 수 없을만큼 박사 자신이 되었음을 스스로도 부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종종 로도스 이전에 그러니까 바벨, 그시절부터 박사를 아는 사람들의 시선에 비추어진 박사 자신을 마주할때면 박사는 어딘가에 갇힌 갑갑함과 함께 이제까지 자신을 부정당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못내 견디는것이 괴로웠다. 그러니 이렇게 혼자있는 시간이라도 좋으니 그런 갑갑함과 우울함을 해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박사는 이 갑갑함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잘 알지 못했다. 타인이라면, 예를들어 정신이 불안정한 오퍼에게 박사는 조금씩 거리를 좁혀 다가가 솔루션을 주곤 했지만 그 대상이 자기자신이라면 그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손톱을 물어뜯는 행동으론 이 거대한 구멍을 채우지 못하는 갑갑함을 해소할 수 없었다. 페이퍼 나이프, 이것을 쓸 순 없었다. 박사는 자신의 신분상 드러내지 않는곳이라도 상처를 낼 수 없었다. 손톱을 무는 건 이제 질렸다. 그러나 박사는 그만둘 수 없었다.

피가난다. 피가 난곳에선 따끔하고 아린통증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손톰의 하얀부분이 아니라 붉은부분을 물어뜯으면 그렇겠지. 박사는 멍하니 자신이 낸 상처를 바라보았다.

"팬텀"

박사는 혼자 있는 무대 위에서 각본에 쓰여져 있지 않은 존재를 찾아 불렀다. 그러자 그림자 밑이 흔들렸고 사람의 형태가 되어 무대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의 그는 각본 밖의 존재였다. 그러나 박사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창백한 달빛이 박사를 비추었다. 아아, 이러면 안되는 것이었다. 스스로 삼키지도 못하는 한낱 사사로운 감정을 오퍼레이터에게 의존하여 풀려하다니 자신은 로도스의 지휘관으로써 실격이었다.

"있잖아, 가면을 쓰면 어떤 기분이야?"

대사가 존재하지 않을 유령에게 묻는다. 사실은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타인이 되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다. 자신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에게 타인이 되는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 가면, 가면을 쓴 나는 적어도 그것이 되어있는 동안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각본에 쓰여지지 않는 대사를 유령이 말한다. 하지만 박사는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달빛은 박사의 발밑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만이었다. 나는 한번도 그것이었던적이 없었지. 연기란 그것이 되어야지 오롯히 완성되는 것이었다. 하지만...나는 그러지 못했다. 루시안, 블러드 다이아몬드. 그리고 팬텀. 나는 과거의 나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니 나 자신이 될 수 없었다."

유령은 손에 든 가면을 매만졌다. 시선은 달빛이 비추는 곳을 향하였다.

"너도 나와 같구나"

박사는 유령이 매만지는 가면을 보았다. 유령은 박사와 같을 수 없었다. 그러나 텅빈 감각을 모르지 않았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과 묻어둔 과거를 알 수 없어 갑갑해 하는 것 사이의 간격은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며 달빛은 두 사람분의 발밑을 비추었다. 새햐안 빛이 유령이 든 가면에 침범한다. 유령은 박사에게 가면을 건네었다. 박사는 유령이 건넨 가면을 받았고 그것을 자신의 얼굴에 대어보았다. 두렵지 않았을까? 아니 그것은 자신이 될 수 없을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박사는 두렵지 않았다.

유령의 크기에 맞춰진 가면은 박사에겐 조금 어색했다. 예를 들면 시야가 확보되어야 할 부분이 조금 어긋나 있다던가. 코가 놓인 위치가 맞지 않다던가. 다르다. 다르구나. 우리는 이렇게나 다른데 어찌할 수 없이 닮아있었다. 박사는 자신에게 대었던 가면을 유령의 얼굴위에 올려놓는다. 위험한 행위이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유령은 박사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가면의 촉감과 까슬까슬하게 까진 박사의 엄지 손톱밑 상처가 유령에게까지 느껴졌다. 유령은 자신의 엄지 손톱 밑이 따끔함을 느꼈다. 까진거 같은 물어뜯은 상처의 흔적이 축축하고 아릿하게 전해져왔다. 유령은 박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씩 닮아있는 부분은 느낄 수 있었다. 유령은 아린 흔적이 남은 손톱의 끝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 밑 여린살을 물었다. 아린 상처는 이윽고 피를 내며 뚝뚝 떨어졌다. 박사는 이광경을 전부 놓치지않고 지켜보았다.

달빛이 구름사이로 사라지고 무대에는 정적과 어둠이 내리앉았다. 연극이 끝을 맺었다. 유령은 다시 그림자로 돌아가야했고 박사는 로도스의 지휘관이 되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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