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전가
좀비버스 : 뉴블러드 ㅣ 덱스 X 성재
* 좀비버스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 유의해주세요.
“잘생겼어, 참.”
뭐, 사실 알기는 알고 있다. 내 얼굴이 못나지 않은 편이라는 것 정도는. 남들이 잘생겼다, 멋있다 칭찬해주면 기분이 좋기도 했다. 당연하지. 보기 좋게 생겼다는데 누가 싫어하겠나. 재수없을지는 몰라도 칭찬에 익숙해진 편이라, 성재는 딱히 그런 말을 듣는 데에 부끄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분명 그랬을 텐데, 첫 만남부터 감상평을 늘어놓은 동갑내기는 생각보다도 더 솔직했고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꾸준했다.
책임전가
by. HAleum
성재는 괜히 긴장한 몸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저도 모르게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나는 왜 이렇게 긴장을 하고 있는가? 하물며 지금은 좀비를 상대하고 있지도 않고 있는데. 성재는 천천히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다가갔다. 시선의 끝에 어떻게 보면 지금은 좀비보다 무서울지도 모르는 사람이 눈에 걸렸다. 아, 나도 몰라. 그냥 질러. 배 째.
“…야, 덱스야.”
성재의 부름에 진영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 구해다 온 물품들을 체크하고 있었던 건지, 앞에는 이런 저런 생존용품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막상 앞에 서니까 또 입이 잘 안 열렸다. 하지만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게 매너가 맞다. 성재는 애써 침착한 어투를 내려고 애쓰며 겨우 말을 꺼냈다.
“그, 나 남자 안 좋아한-다?”
아, 망할 삑사리! 성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봐도 삐끗한 목소리를 낸 마당에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말하기 작전은 이미 망한 것 같았다. 아씨. 그 와중에도 착실히 대답은 들려왔다.
“뭐?”
“아니, 그러니까. 나는 남자는 관심 없다고! 연애 상대로!”
결국 거의 소리치듯이 말해버렸다. 성재는 지금 이곳에 자신과 진영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는 것에 신께 감사 기도를 올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듣기라도 했으면 진짜 접시 물에 코박고 죽고 싶었을 거다. 성재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진영의 표정은 진심으로 어리둥절해 보였다. 그 표정에, 성재의 머릿속이 찬물은 끼얹은 듯 현실로 돌아왔다. 왜 저런 표정이야?
“성재야.”
“…어?”
“나도 남자 관심 없어.”
뜬금없는 고백이 웃기다는 듯이 진영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어려있었다. 아니 뭐, 나는 남자 좋아한다는 줄 알았네. 뭘 그렇게 뜬금없는 말을 비장하게 말해? 웃는 진영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성재는 저도 모르게 억울함이 치밀었다.
“아니, 근데 네가!”
“내가?”
진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 진영을 보며 성재는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아우우…. 됐다, 됐어…. 저 진짜로 뭔 소리냐는 듯한 표정이 너무 열받았다. 자신은 진짜로 너무 억울했으니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러니까,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쟤가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닌가,싶은 사춘기 청소년같은 고민을 한 건 순전히 다 저 김진영 때문이었다는 소리다. 며칠을 같이 지내다보니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것은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동갑내기가 있다는 건 생각보다 의지가 더 많이 되는 일이니까.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같이 다니는 일도 많아졌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지.
“성재야, 이리 좀 와 봐.”
좀비들과 맞닥뜨리고 간신히 숨 돌릴만한 곳을 찾아낸 날이었다. 차올랐던 숨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생수를 들이키던 성재는 자신을 부르는 진영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다가갔더랜다. 가까이 다가갔다가 냅다 양쪽 볼을 턱, 하고 붙잡혔다. 응? 양볼이 살짝 눌린 채로 성재의 몸이 얼어붙었다. 이게 뭐하는 시츄에이션이지. 제 양 얼굴을 붙잡고서 저를 근거리에서 빤히 들여다보는 진영을 보며 성재는 간신히 할 말을 했다.
“…뭐해, 너?”
"힐링?“
…?
분명 대답을 들었는데 더 이해가 안되는 건 무슨 경우지? 황당함에 멍하게 제 얼굴을 내주고 있다가 풀려난 성재는 당연하게도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얼굴을 보는 게 힐링이라는 거야? 이거 뭐야, 설마 플러팅이야?
그 이후로도 진영의 플러팅 아닌 플러팅은 계속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게 성재 혼자만 그걸 인지하는 것이 아닐 정도였다. 주변에서도 ‘성재 얼굴 좋아하는 덱스’를 모두가 인식했다는 뜻이었다.
“너 왜 성재를 그렇게 쳐다 봐?”
시선이 계속 성재에게 꽂혀있는 걸 발견한 딘딘의 물음에 대한 진영의 답은 이러했다.
“아, 얼굴이 취향이라.”
“엥?”
뭔 소리야? 딘딘의 표정이 괴이쩍어졌다. 이상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이 진영을 쳐다보던 그는 시영의 부름에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대화를 모조리 듣고 있던 성재는 당황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덩그러니 서 있었지만, 정작 그 말을 한 장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 외에도 자다 깨면 눈 앞에서 얼굴 구경을 하고 있다던가, 자연스럽게 자신과 다니는 걸 선호한다던가 하는 모습이 계속되는 마당에 성재는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떻게 이걸 거절해야 할까 하는 생각까지 다 해놓고 겨우 말을 걸었는데, 오해? 오해-애? 이게 내 탓이야? 내 탓이냐고. 전부 다 네 탓이면서.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얄미워서 성재는 괜히 패딩을 구겨서 만든 임시 베개를 퍽퍽 쳤다. 방송에서 그렇게 유죄인간이라고 떠들어대더니 이름값 한다, 진짜.
“-은비야!”
쳐다보지 말걸. 누가 봐도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손을 흔드는 진영의 모습을 보며 성재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렇게까지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는 건, 진영을 만나고 난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하기야, 좀비들이 나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웃을 일이 뭐가 있겠느냐마는. 어쨌든 진영의 모습은 정말 기뻐보였다. 그렇게 표현하는 게 가장 맞는 말 같았다.
이 시국에도 운영되고 있는 신기하고 기묘한 풀 파티에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등장한 은비는 정말 화사하고 예뻤다. 좀비 바이러스의 여파가 심하지 않은 곳에 머무르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주 밝아 보였다. 풀 파티를 즐기며 웃는 은비를 쳐다보았다가, 그런 은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진영을 바라보았다. 이름으로 친밀하게 부르는 걸 보니 원래 알고 지내는 사이인 건 확실해 보였는데, 다른 사람들을 마주쳤을 때와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그리고 성재는, 그걸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아주 이상하게 느껴졌다.
“방송에서 그랬던 거긴 한데, 둘이 썸씽 있었지 않나? 덱스랑 은비.”
“아, 나 그거 본 것 같은데? 와, 그런데 여기서 다 만나네.”
둘이 친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이들이 나누는 담소가 들려왔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정말로.
은비가 일행에 합류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홍철의 만행과 풀 파티를 망쳐버린 좀비떼의 출현으로 인해 두 사람이 결국 감염되어 버렸다. 2명이 더 합류했는데, 인원 수는 그대로인 셈이었다. 희귀 체질자인 홍철을 데리고 서울로 향하는 캠핑카 안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 좀비들을 상대하느라 체력을 심하게 소모한 이들이 잠들어서도 있겠지만, 정이 들어버린 두 사람을 잃은 것이 충격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은비는 애써 웃고 있었지만,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은비에게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진영을 보면서 성재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성재는 제가 지금 느끼는 기분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제가 지금 무슨 마음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은, 그러니까 지금 질투를 하고 있었다. 와, 질투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진영을 좋아하나? 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땐 그건 또 대답하기 어려웠다. 이게 질투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무엇에 대한 질투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게 옳은 표현인 것 같았다. 왜 내가 질투를 해야 하는데? 몸은 피곤해 죽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은 상태로 좁은 캠핑카 수면 공간에 몸을 늘어뜨렸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에서 이런 고민은 사치일텐데도, 흘러가는 생각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도착한 서울은 외곽부터가 처참했다. 검은 연기가 저 너머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야, 여기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살짝 질린듯한 세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저 안은 좀비 소굴이겠지. 서울이 저 지경이 되다니. 지금은 연락이 끊겨버린 가족들, 멤버들, 지인들의 얼굴이 성재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다들 괜찮을까. 탈출은 한 걸까? 살아만 있어라.
“가자.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가는 수밖에 없어.”
시영의 말에 머뭇거리던 모두의 발이 움직였다. 성재는 일행의 맨 뒤에 섰다. 혹시 뒤에서 뭔가 나타날 상황을 대비해서, 그리고 홍철이 혹시나 도주할 상황을 가정해서 의도적으로 뒤를 맡았다. 그리고 역시나 자연스럽게 제 옆을 지키고 선 진영을 힐끔 쳐다보았다. 생존을 위한 방식이나 가치관, 행동을 하기까지의 과정에는 분명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신과 진영이었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놀랄 정도로 생각이 통했다. 그래서 더 의지가 되는 것일지도. 그래서, 질투가 났나. 그런 존재를 빼앗긴 것 같아서? 또 생각이 이상한 곳에 튀려는 것을 애써 붙들었다. 지금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비상통로를 따라 도착한 곳은 임시 대피소였다. 그것도 아주 이상한 대피소였다. 서로 완전히 대립하는 두 집단이 머무르고 있는 이 대피소에는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감염 직전의 피해자들이 온몸이 결박된 채 숨을 죽이고 구석에 숨어있었고, 몇몇 이들은 그들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다가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분위기가 영 좋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까지 오느라 지친 몸은 제발 쉬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건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던 것인지 대준이 아이고, 소리를 내며 비어있는 공간에 주저 앉았다. 일단 좀 쉬자, 쉬어. 이러다가 좀비 때문이 아니라 과로로 돌아가시겠어. 다들 간신히 버티고 있던 건 마찬가지였는지, 일행은 앓는 소리를 해며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디선가 얻어온 담요를 하나씩 몸에 두르고서 그대로 몸을 뉘었다. 요 며칠 간 제대로 발 뻗고 누워본 적이 없던 몸이 드디어 살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등이 괴어서 그런가, 금방 골아떨어진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성재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최대한 편한 자세를 위해 몸을 뒤척여 돌렸다가, 눈 바로 앞에 위치한 얼굴을 보고서 저도 모르게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저를 바라보고 누운 진영이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깊게 잠들어 있었다. 살짝 얼어있던 성재는 숨을 천천히 몰아쉬고는 진영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진영이 자신을 보고 있었던 적은 너무 많은데 정작 자신은 이렇게 진영의 얼굴을 관찰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야, 쳐다보면 끈질기게 시선을 맞춰오는 걸 어떡하나. 성재는 진영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고생을 한 얼굴은 멀끔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외모였다. 매번 저에게 잘생겼다느니 어떻다느니 했지만 본인도 꽤 생겼지 않나? 진영의 얼굴을 굳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래,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다. 미동도 않고 잠들어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금 약이 올랐다. 조심히 손을 들어 검지 손가락으로 진영의 미간 사이를 슬쩍 눌렀다. 잘도 자네. 괴롭히듯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손을 떼고 시선을 조금 내렸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이 살짝 까슬하게 올라와있었다. 고된 상황들 때문에 거칠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입술이 보기 좋게 도톰했다. 어디서 입술 예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겠다. 성재는 한참을 그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다음에 저지른 일은, 그러니까 아주 충동적인 일이었다.
맞닿은 입술은 버석했다. 아주 잠깐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은 말라있어서, 그 흔한 쪽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입술을 떼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언제 일어났는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진영의 모습에 성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나 지금 도둑 뽀뽀하다가 들킨 건데, 왜 이렇게 저 놀란 얼굴이 흡족하기만 하지.
“…너 뭐해?”
자다 깨서 그런 것인지 평소보다 살짝 더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들려왔다. 성재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 둘 사이에서 매번 저 질문을 하는 건 자신이었는데, 그 질문이 진영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복수를 한 기분이랄까.
“뽀뽀?”
“…허.”
당당한 성재의 대답에 진영의 입에서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웃는 성재를 바라보던 진영이 손을 뻗었다. 가볍게 성재의 뒷목을 감싼 손이 그대로 당겨졌다. 어라. 어찌할 새도 없이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아까와 달리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약간 어설프게 제 아랫입술을 물어오는 진영의 행동에 성재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웃음기를 머금었다. 키스가 익숙한 모양새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성재는 고개를 살짝 틀어 벌어진 입술 틈새로 살짝 혀를 들이 밀었다. 어느새 밀착되어 있던 진영의 몸이 살짝 움찔했다가, 호응하듯이 혀를 섞었다가 되려 제가 밀어붙여왔다. 싸움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무드는 모르겠고, 승부욕 하나는 장난이 아니었다. 질척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옆에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다는 생각이 잠깐 스치기는 했으나, 그게 이걸 멈출 이유는 되지 못했다. 허억, 간신히 떨어진 입술에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다시 엉킨 시선에 순식간에 다시 입술이 맞부딪혔다. 거의 제 위로 올라탈 기세로 몰아붙이는 진영의 어깨를 꽉 붙들어 간신히 진정을 시키면서도,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서로의 입안을 쓸어대고 숨이 마구잡이로 얽혔다. 폐활량이 너무 좋은 건지 뭔지, 먼저 지친 성재가 숨을 헐떡일 때까지 놓아주지 않던 진영은 제 어깨를 아플 정도로 붙잡는 손에 간신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아랫입술을 거의 씹듯이 깨물면서 떨어진 것은 덤이었다.
천천히 숨을 고르던 둘은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진영은 손을 올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성재의 입술을 제 엄지로 쓸었다. 허, 얘 봐라. 뭘 자연스럽게 닦아주고 있어? 약간 혼란이 올 정도로 진영과의 키스는 좋았지만, 그렇다고 여자 대하듯 하는 행동까지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입을 열어 한 마디 하려는 순간,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둘은 황급히 몸을 멀리 떨어트렸다.
“좀비, 좀비!”
“어? 잠깐!”
사색이 된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진영도 성재도 황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불안하더니만 기어이. 따로 오가는 대화 없이 급하게 짐을 챙겼다.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던 두 남자가 질척하게도 입을 맞춘 이상한 일이 있었지만, 이젠 별로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온 세상이 이상했고 미쳐 있는 걸.
홍철이 죽었다. 분명 홍철로 인해 생긴 문제나 희생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도 사람이었다.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 잠깐의 추모 이후에 혈액을 채취하는 다른 일행들을 지켜보며 한 발 물러나 있던 성재는 제 몸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매번 고비를 넘겨왔지만, 이번엔 진짜로 위험했다. 가볍게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려다, 온기가 느껴져 멈칫했다. 옆을 돌아보니 진영이 보였다. 제 손을 꽉 잡아주는 진영의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났다. 은비가 인질로 잡혔을 때는 전에 없이 흥분한 게 느껴져서 걱정했는데, 지금은 평소보다도 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 괜찮거든.”
안 잡아줘도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손을 더 꽉 잡아왔다. 다들 혈액 채취에 정신을 팔린 상태라 그 누구도 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다 큰 동갑내기 남자 둘이 손을 꼭 잡고 있으면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할 말이 좀 많은데.”
문득 진영이 입을 열었다. 그 ‘할 말’이라는 게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둘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생사의 기로에 내던져진 상황에서 정신이 없긴 했는데, 그냥 넘어가는 게 어려운 일이긴 했다. 다만, 그 대화의 결론이 어떻게 날 것인가는 예상이 가지 않기는 했다. 어찌 되었든 대화는 필요하다고 느낀 성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가라앉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영이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성재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의료원에 도착하면, 그래서 안전하게 있을 곳이 생기면. 그 때 하자.”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성재는 그래, 하고 짧게 대답했다. 혈액 채취를 마친 일행들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게 항체구나. 저걸로 정말 이 지옥을 끝낼 수 있으려나. 성재는 분홍빛을 띄는 기묘한 색의 혈액을 바라보다가 저를 스쳐가 사람들과 짐을 나눠 챙기는 진영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저걸 가져다주고 나면,
남자는 관심없지만 너한테만은 좀 다른 것 같다고 말해봐도 되려나.
응? 덱스야.
아,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더라.
정신을 살짝 놓을 뻔 했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생살이 뜯겼으니까 당연할지도. 피가 울컥울컥 나오는 목덜미를 애써 꾹 눌렀다. 지혈을 해야지. 아, 지혈을 해도 소용이 없나? 어차피 감염되면 죽을 텐데. 머릿속이 그냥 멍했다. 성재야! 야, 정신 똑바로 차려! 강한 힘에 의해 몸이 확 끌어올려졌다. 익숙한 체향이 났다. 너구나. 비교적 안전한 트램펄린 위로 몸이 뉘여졌다.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물리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성재는 그냥 몸을 늘어뜨렸다.
항체를 되찾기 위한 예술회관에서의 싸움의 결과는 처참했다. 4명의 감염자, 그리고 항체를 주사받을 수 있는 사람은 겨우 둘이었다. 그리고 그 둘에 성재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살고 싶었을 테니까, 날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투표 결과대로 하자던 진영의 말이 상처처럼 박혀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조금의 원망이 밀려왔다. 할 말 많다며. 나중이란 약속이나 하지 말지. 그래도, 사실은 안다. 네가 괴로워했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묶으라는 내 외침을 무시하고 끝까지 내 몸을 끌어당기던 너를 안다. 그래서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떠나는 네 얼굴이 어땠는지 모른다는 점이.
그리고, 네가 내 예외가 된 것이 다 너 때문이라는 걸 말하지 않은 점이.
저를 도닥여주는 대준을 마주 안으며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을 진영을 떠올렸다. 곧 죽을 나보단 앞으로를 살아가야 하는 네가 내가 가진 감정에 대한 책임까지는 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게, 실제로 너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지라도. 그 날의 잠깐의 일탈은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모습에 성재는 저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이 지경에 와서야 알게 되는 게 웃기다. 내가 널 꽤나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정신이 조금씩 흐릿해져 갔다.
나는 이제 정말 죽는걸까?
이게 마지막 순간이라면, 그 순간마저 널 떠올리고 싶어하는 날 깨닫는 것은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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