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태글선수촌_글기훈련

1014호

알고 있어,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TXT by D
7
0
0

야속하게 맑은 날이었다. 1014호의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연분홍색이 보였다. 4월 초, 제게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계절의 흐름이 밖을 물들였다. 이곳에서 시간을 피부로 느끼는 방법은 몇 없었다 - 기껏해야 머리 위에서 불어오는 인공적인 바람이 따뜻한지 시원한지 정도였으니. 커다랗고 미지근한 통 속에서 선도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기분이라고 할까, 혹은 그만한 감상조차 없을지도. 그리 생각하다가도 금세 관두었다. 길게 사고를 이어갈 힘이 없었다. 병원이 무릇 그러하겠으나 공간에는 아주 약간의 생기도 없었다. 입은 적도 없는 교복을 한 켠에 걸어 둔 채 침대에서 나갈 일 한 번이 없는 청춘이란 일반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어서, 또래의 웃음소리가 하나 들릴 때마다 심장을 손톱으로 파내는 듯한 통증이 들었다.

오늘도 와 줄까, 듣는 이는 없었으나 혼잣말을 뱉었다. 여기 와 갇힐 때마다 찾아와 주는 사람, 심심하지 말라고 이것저것 놓고 가 주고, 그리고, 또……. 그럼에도 확신 한 번 가지지 못함은 이제 스스로의 업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단순한 동정으로 이렇게 행동할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믿지 못하니 선명한 호의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가지 못하는 학교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가까워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언젠가는 사랑하게 되겠지. 존재한다고 들은 적도 없는 상대에게 무력한 질투만 흘리고 있으면 문이 열린다. 귀를 쫑긋 세우고 뒤돌아 보았으나 상대는 그가 아닌 간호사다. 채혈하러 왔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팔을 내밀었다. 제게서 나오는 피가 벚꽃보다 짙은 것이 못내 미웠다.

오후 5시 반, 이렇게 늦을 리 없으니 정말로 오지 않으려나 보다. 전화라도 해 볼 기운은 없는 주제에 하나하나 한탄할 여력은 남았는지 낯에 그림자가 졌다. 직접 물어보았다가 네게 질렸다는 말이라도 들으면 어쩌지, 그러면 살아갈 이유가 하나도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가 오래도록 일상을 구가하면 그만큼 간극은 커져만 간다. 바깥 일 같은 건 몰라, 여기 있는 내게 매일매일 말해주는 것밖에는. 그러니 그가 오지 않는다면 자신과 세상의 관계도 완전히 끝이었다. 시커먼 감정이 눈 앞을 아른거리는데 눈을 질끈 감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삼켜져도 좋을 듯했다. 이럴 거면 나도 끝나버리는 게 더 좋아.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노을 대신 죽음이 들이찰 즈음에, 덜컹.

문 너머에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났다. 늦었지, 하고 선명히 바라보는 눈동자. 무어가 그리 급하다고 달음박질쳐 온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왔구나, 기다렸어, 오늘도 와줄 줄 알았어. 방금 전까지 당장 죽을 듯 굴었으면서 말은 잘 했다. 방금 전까지 무기력했던 몸뚱이가 거짓말처럼 가벼워서 팔을 흔들며 방실댔다. 오늘은 어땠어? 즐거웠어? 새로운 일도 잔뜩 있었어? 뒤에 숨겨진 의도는 어두침침한 것들이어서, 별로였어, 너랑 있는 게 제일 좋아, 지금이 제일 즐거워. 그런 대답을 내심 원하며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것은 목소리 대신 짙은 포옹, 아, 이게 더 좋을지도. 얼룩진 마음들이 금세 저 너머로 날아갔다. 역시 좋아해, 네 마음 같은 건 영영 알 수 없겠지만. 마치 그의 시선을 보지 못한 것처럼, 저 혼자 좋아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 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그 외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