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사구팽님네(292호)

[닛부] 여우와 포도의 꿈

닛부 포지션리버스(주종반전) 백일몽입니다.

닛코 이치몬지가 빈사 상태로 혼마루에 실려왔다.

 

부키츠마루는 수리실로의 걸음을 재촉했다. 혼마루 복도를 가로지르는 사니와의 모습에 남사들의 시선이 소년의 뒤를 좆았지만, 누구 하나 사니와를 붙들고 질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덜덜 떨면서 숨이 막힐 듯한 얼굴을 한 소년이 수리실에 도착하자, 수리실 안에 상처투성이의 닛코를 눕혀두던 산쵸모가 코토리, 하고 부키츠마루를 불렀다. 여느 때라면 그리 부르지말라고 한 소리 했을 소년은 산쵸모의 목소리는 귀에 닿지도 않는다는 듯, 수리실로 넘어지듯 굴러들어왔다.

 

닛코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던 산쵸모는 부키츠마루에게 말을 더 붙이는 것을 포기하고 수리실 밖으로 나간 후 문을 닫았다. 아마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닛코, 내 말이 들리나?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내가 금방, 수리를...“

 

부키츠마루의 입에서 횡설수설한 말이 나온다.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인지, 닛코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옅게 떠진 눈꺼풀 사이로 푸른 빛이 일렁거렸다.

 

그를 보지 못한 부키츠마루는 침착하자고 스스로에게 속삭이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나서, 부키츠마루의 손이 닛코의 본체에 닿은 그 순간에,

 

부키츠마루의 의식은 파아란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수리실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

 

 

 

이것이 사랑이라면 그것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증오라면 그 또한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사니와, 닛코는 스스로가 가진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제 검들 중 한 자루에게 비이상적인 집착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인.“

 

그리 부르는 목소리에 닛코가 고개를 들면, 진한 분홍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주인의 파란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짙은 색의 피부, 약간 짙은 눈썹, 무표정한 얼굴의 이 도검남사는 태도치고는 드물게도 10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사니와인 닛코의 영향으로 푸른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닛코는 다른 동소체를 본 적이 없었기에, 본래라면 소년이 가졌을 머리칼의 색을 알지 못하였다.

 

"부키츠마루.“

 

그 뒤에 붙는 이치몬지,라는 이름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이름을 생각하면, 보라색이나 주황색이었을까, 그런 색의 머리칼을 한 소년을 떠올리니 그렇게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작게 웃음소리를 흘리자,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불렀으면 말을 하라는 몸짓이다.

 

"이번 출진에 대해 보고 하도록.“

 

"보고서는 제출했다.“

 

"네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다.“

 

안경을 고쳐 쓰며 하는 닛코의 말에, 잠시간 침묵하던 부키츠마루가 출진에 대해 보고 하기 시작했다. 부키츠마루 자신을 이상한 방향으로 편애하는 주인을 모르는 것이 아닌데다가, 그는 애초에 요구 받은 것을 어지간 하면 다 들어주는 성정의 소유자였기에 특별히 망설임은 없었다. 소년의 목소리가 딱딱한 말투로 출진에 관해 이야기한다. 닛코는, 부키츠마루가 저를 보며 말하고 있는 이 순간이 마냥 좋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이상이다.“

 

"산쵸모가 온 이래로 처음으로 다같이 한 출진인데, 어땠나.“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그런가.“

 

 

또한, 저런 대답을 얻어내고 싶어서 부러 부키츠마루에게 난처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

 

 

 

 

닛코에게는 사니와가 되기 이전의 기억이 없다. 다만 가지고 있는 것은, '부키츠마루 이치몬지'에 대한 열망. 그리하여 부키츠마루 이치몬지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니와의 일에 임하였다. 그리하여 부키츠마루 이치몬지를 얻고, 현현시켰을 때 당연하게도 그에 대한 편애가 시작되었다.

 

부키츠마루가 원하는 거라면, 닛코는 뭐든지 해줄 수 있었다. 혼마루 전체를 달라고 해도 주저 없이 주었을 것이다. 부키츠마루가 기뻐할 것 같아 인연이 있는 도검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같은 도파의 남사를 데려오려고 노력했다. 검은 쓰이는 것이 기쁨이라 들었기에, 부키츠마루를 자주 출진시키고 일을 맡기기도 했다.

 

 

부키츠마루는 주인은 하하, 소리를 내며 무표정하게 웃을 뿐이었다. 닛코의 편애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수용하고 충성으로 보답하려고 했다. 온전히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닛코는 그냥 그 상태로 좋았다.

 

다만 언제부턴가, 그런 불안감이 들고 만 것이다.

 

혼마루와 주인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이치몬지라는 집단을 소중히 여기는 부키츠마루. 이치몬지 도파가 다 모이면, 부키츠마루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 그런 불안감이 닛코에게 이치몬지 도파의 수장, 산쵸모를 얻는 것을 오래도록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닛코는 부키츠마루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 싶었기에, 부키츠마루를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곁에 있겠다는 부키츠마루의 '교환조건'에 닛코는, 산쵸모를 얻어 현현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닛코의 혼마루에는 이치몬지 도파가 다 모이고 말았다.

 

 

 

 

 

*

 

 

 

 

저 멀리에 '이치몬지'의 이름을 가진 남사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것이 보인다. 부키츠마루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산쵸모나 노리무네가 이치몬지 수장의 왼날개를 놀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닛코는 조금 차게 식은 얼굴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이치몬지 수장의 왼날개. 닛코는 산쵸모가 '자기가 없는 동안 자기 새들을 잘 돌봐줘서 고맙다'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에 반사적으로, 그답지 않게 화를 내듯 '부키츠마루는 너의 새가 아니라 나의 검이다'라고 대답했던 것도.

 

부키츠마루를 편애할 뿐이지, 그는 모든 남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데. 왜일까. 어째서 이치몬지들 사이에 있는 부키츠마루를 보고 있으면 안정적으로 보여 기쁘면서도 이리 가슴이 허하고, 시리고....모두 쥐어 부러뜨리고, 부키츠마루의 이름에서 이치몬지를 떨어뜨려서.

 

 

나만이 유일하게.

 

 

그런 그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를 확인하면, 거기에 서 있는 것은 히메츠루다. 이치몬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치몬지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닛코와는 사이가 그다지 나쁘지 않은 남사다. 닛코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히메츠루가 입을 연다.

 

"도도군도, '주인'도. 그냥 여우와 포도의 꿈을 꾸고 있는 거니까.“

 

"너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깨어서 꾸는 꿈도 꿈이고, 잠들어서 꾸는 꿈도 꿈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묻는 것을 멈추면,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은 히메츠루가 또 한 마디,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인다.

 

"어둡지 않은 이 꿈을, 둘 다 평생 잊지 못하겠지.“

 

 

 

 

 

 

 

 

 

*

 

 

 

 

볕이 좋고, 바람은 시원했다. 평온한 날의 오후에, 닛코의 마음만이 평온하지 못했다.

 

"부키츠마루.“

 

"왜 그러나, 주인.“

 

절대 묻고 싶지 않기도 했고, 대답을 얻어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결국 닛코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 질문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나'와 '이치몬지' 중 고르라면 무엇을 고를 것이지?“

 

부키츠마루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침묵하거나 우회하여 답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으므로, 고개를 오래도록 입을 다물고 마는 부키츠마루의 모습에 닛코는 심장이 아득히 먼 절벽 밑으로 떨어져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나락이든, 극락이든 어디론가로는 발을 내딛어야 했다. 닛코는 두 손으로 부키츠마루의 어깨를 붙들었다. 부키츠마루가 닛코를 올려다보았다. 진한 분홍색의 눈동자가 안경알 너머의 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순간 닛코는 깨달았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여긴 내 자리가 아니고, 거긴 네 자리가 아니다.

 

닛코는 소년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숨이 막힐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부키츠마루 이치몬지를 내려다보았다.

 

닛코 이치몬지는 눈을 감아 방금 깨닫고만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부키츠마루의 손을 잡아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이토록 이상적인 세상에서, 누구보다 충실하게 지내고 있던 둘이다. 닛코는 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옳지 않다고 말한다.

 

"이리로 와라. 거기는 네, 주인의 자리가 아니다.“

 

"아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충격과 슬픔, 부정과 체념으로 흔들리는 진한 분홍색 눈동자가 시선을 돌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소년을 닛코 이치몬지는 끌어안았다. 구애의 말을 하듯, 소년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가 닛코 이치몬지다. 내가 너의 '닛코 이치몬지'이고, 네가 내 주인이다."

그 말에 부키츠마루가 몸의 떨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부키츠마루의 영향으로 푸른빛을 띈 눈동자가 똑바로 부키츠마루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론은 정해져있었다. 부키츠마루는 닛코 이치몬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주고 싶었으므로.

 

"그것이 네 결론이라면, 받아들이겠다.“

 

고민은 없었다. 닛코가 바란다면, 원한다면 뭐든지 줄 것이다.

 

"이상한 말을 하는군. 네가 깨웠고, 네가 눈을 뜨게 하였다. 나 스스로도 맹세한 바가 있으니, '닛코 이치몬지'를 이루는 모든 것은 주인의 것이다.“

 

닛코 이치몬지 답지는 않았지만, 아직은 꿈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었으므로, 미세하게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 닛코가 품의 소년의 뺨에 손을 대었다. 그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의문을 표하는 눈동자에,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입술과 입술이 살며시 맞닿았다. 서로의 입술이 따뜻한지, 차가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의 몸에서 울리는 생명의 고동만은 분명했다.

 

학의 말대로, 이 순간을 영영 잊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주 잠시간의 꿈의 세계가,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그 말에 소년의 몸이 떠는 것을 멈추었다.

 

아주 잠시간의 꿈의 세계가,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

 

 

 

 

수리실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언제 정신을 차린 것인지, 상처 투성이의 닛코의 푸른눈동자가 부키츠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닛코의 본체를 떨어뜨릴 뻔 했던 부키츠마루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사니와와 그의 남사는 어떠한 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부키츠마루가 수리봉을 들고, 조심스럽게 닛코의 본체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소년을 올려다보던 닛코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수리실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

 

 

 

 

다른 곳에 있어도, 같은 꿈을 꾸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 서로를 생각하고 그린다는 뜻일진데.

 

 

 

 

*

 

 

 

 

산쵸모의 주인은 대체로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현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라도 조금은 읽을 수가 있었다.

 

"요즘 생각이 많아 보일 종종 있던데, 무슨 일 있나?"

 

"비밀이다."

 

짧게 대답하고는 금방 입을 닫는 주인의 모습에 산쵸모는 반사적으로 픽 웃으며 생각했다.

 

때때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치기 어린 태도로 저를 대하는 주인이지만, 묻는 말에 답을 하지 않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하여, 산쵸모는 의아한 동시에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얼마 전 그의 왼 날개에게 주인에게 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솔직하게 고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고민하던 것을 털어놓으리라 생각한 것과 달리, 왼 날개, 닛코 이치몬지가 산쵸모에게 처음으로 다른 대답을 했다.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듯이, '비밀'이라는 듯이.

 

그런 때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가던 정보들이 일순, 하나로 모여서, 지혜의 고리가 풀리는 것 같은 순간이.

 

주인과 왼 날개의 대답이 같은 색을 띠고 있음을 알게 된 이치몬지의 수장은 흥미로운 듯이 호오, 하는 소리를 입 밖에 내었다. 부키츠마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산쵸모가 별로라는 듯이 아주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자리를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산쵸모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라지만, 강경한 매는 결코 죽이지 못할 것이다.

 

매가 여우와 포도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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