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사구팽님네(292호)

[닛부] 등하불명, 전화위복

등하불명

: 등잔 밑이 어둡다.

가까이 있는 물건이나 사람을 찾지 못할 때 쓰는 말.

 

 

 

 

 

늦은 밤이었다.

부키츠마루는 오랜만에 닛코와 지긋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닛코를 근시직에서 물린 지 꽤 시일이 지난 지금, 그가 불침번을 청해왔기 때문이다. 근래 장기원정이 잦은 닛코였기에, 그의 과로를 염려한 부키츠마루는 청을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한 모습에, 저절로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것이었다. 밤눈이 밝은 단도들조차 잠자리에 드는 늦은 시간대지만, 마주하고 있는 주종의 눈동자는 유난히 또렷했다.

 

"닛코, 불침번을 청한 이유가 있겠지."

 

부키츠마루의 물음에 닛코는 답지 않게 한참을 침묵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질적인 것들로 인해 어지럽고 소란스러웠을 문밖이 실이 뚝 끊긴 듯 고요했다. 푸른 눈동자만이 작게 켜진 촛불을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나의 부족함에서 온 것이다."

 

부키츠마루는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이 들려왔다.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다만, 이 상황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주인뿐이다."

겨우 내뱉은 것 같기도 했고, 한없이 담담한 것 같기도 했다.

 

닛코가 토로한 것은 그러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키츠마루가 제게 보이는 관심과 호의에 익숙해져 있었던 모양이라고. 스스로가 근시 자리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에 자긍심을 가지고 만족스러웠노라고. 그 자리가 어떻게 자신의 것이 아닐 수 있냐는 소유욕마저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라고.

 

그것을 최근에 부키츠마루가 행한 일들로 인해 겨우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저를 근시 자리에서 물리고, 산쵸모를 그 자리에 올린 데다, 혼마루에 두지 않겠다는 듯이 반복적으로 장기원정을 보내던 일들. 물론, 장기원정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몸이 고되면 잡다한 생각이 들지 않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러나 원정과 원정 사이, 혼마루에 머물거나 몸이 쉬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혼마루에 제가 있어도 전보다 관심을 주지 않는 부키츠마루의 모습에 허전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낯설고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 나름대로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삿된 생각을 가라앉히고, 불온한 것을 배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은 내가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인이 내게 줘야한다. 그것을 주인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주인이 알고, 주인이 줄 수 있는 것이니까.“

 

물건이 가지는 마음은 그 물건을 사용하던 이의 마음을 비추는 것이다. 허나, 지금의 닛코 이치몬지는 육이 있고 마음이 깨워진데다가, 이 감정들은 분명 부키츠마루가 가진 것이 아닐 터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비추는가?

 

그조차도 알지 못하는 닛코 스스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주인."

 

"예전의 나라면, 주인이 나 대신 다른 이를 근시로 세웠을 때 철이 들었다며 뿌듯해했을 거다. 드디어 좁았던 시야를 버리고 넓게 볼 수 있게 되었군, 하며 정말로 기뻤을 거다. 그 와중에도 나를 생각해서 이치몬지의 검들을 모으는 게 정말 감사했을 거고, 오카시라와 기싸움을 하는 걸 보며 언제쯤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으려나 관망하며 웃었을 거다."

 

그런데, 그게 지금은 되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그때와 같았다면, 그랬겠지. 드디어 남자다운 배포가 생겼다고, 기특하다고 주인을 보며 뿌듯해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내 생각하게 된다. 주인이 왜 그럴까, 그 생각만 한다. 주인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텐데, 어째서 나를 근시 자리에서 물렸을까, 이대로 오카시라가, 다른 이가 그 자리를 대신 하게 되나. 그렇게...스스로의 생각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이 고해를 끝으로, 그런 것들을 모두 내려두어야한다.“

 

부키츠마루의 반응을 보지 않고, 닛코는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주인의 집착을 받는 게, 근시가 내가 아니라는 게 싫고 섭섭할 거다. 주인에게 가장 중한 것은 내가 되고 싶을 테니까."

 

닛코는 일순 후련한 듯한 얼굴을 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는 그 정도 관계가 가장 적당했다. 그게 주인과 내가 지금까지 외면해왔던, 보통의 주종관계일 거다. 그러니 주인이 내게 말하면 된다. 내가 과한 것을 원한다고, 그것은 올바른 감정이 아니라고. 그렇게 답을 내려주면 된다."

 

"그걸로 끝인가."

 

말이 끝났음을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닛코는 부정의 대답을 했다.

"혹자가 말하길, 한 명의 사람은 하나의 세상이라고 한다.“

 

도검남사는 사람이 아니니, 그 자체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닛코 이치몬지를 깨워 눈을 뜨게 한 것도, 살아움직이며 새로운 이야기를 쌓아가게 한 것도 주인 되는 자에게서 말미암았으니, 닛코 이치몬지의 세상이란 부키츠마루일 것이다. 부키츠마루의 닛코 이치몬지는, 자신은, 주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발을 딛고 서있을 세상 없이는.

 

"주인이 내 세상이니, 끝이 될 수는 없다. 주인은 내 주인이고, 나는 주인의 검이니까."

 

부키츠마루는, 닛코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부키츠마루의 곁에만 있어준다면, 뭘하든지 상관없었다. 혼마루를 넘겨달래도 그러마했으리라. 그러니, 이번에도 그러는 것이 맞았다. 닛코가 오래도록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겨우 내린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아니면 결코 붙들 수 없는 것이라고 직감했다.

 

"만약 내가, 네가 내린 결론이 맞는 답이라고 한다면, 너는 그걸로 충분한가?"

 

예상치못한 반문에 닛코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부키츠마루의 얼굴을 응시했다. 여느 때와 달리 부키츠마루의 표정이 읽기 어려웠다. 감정이 흘러 넘치는 듯 하면서도 담담했다. 그럼에도 닛코는 부키츠마루를 마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다시 묻겠다. 너는 그걸로 충분한가?"

 

부키츠마루로서는 드물게 채근하는 목소리였다.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닛코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쏟아내고 싶은 것들을 겨우 정제하여 늘어뜨려 놨는데, 아직도 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긁어 내보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깊은 물에 잠긴 듯 먹먹했다. 그럼에도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감정은 감히 주인 앞에서 보일 것이 아니다.

 

"...모르겠다."

 

그러나, 작게 뚫린 구멍으로, 그 한 마디가 새어나갔다.

 

 

 

 

부키츠마루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어딘가 모르게 기운이 빠진 닛코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가 제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그 행위를 지속했다. 뺨에 닿은 손끝을 통해 열기가 옮겨오는 듯 했다.

 

"충분하지 않다고 하길 바란다."

 

"......"

 

"네가 원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요구하기를 바란다."

 

부키츠마루는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밑에 난 구멍으로 물이 빠져나가니, 그를 견디다 못한 네가 터져나가는 일은 없겠구나, 하고 안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끝없이 부은 물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못을 이루고, 못에 빠진 독에는 물이 차올랐다. 그 독에 물을 붓자 부키츠마루의 얼굴에 물방울이 튀었다. 독 안에, 부키츠마루의 얼굴이 비쳤다. 그것이 부키츠마루를 놀라게 했다. 제가 부었던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는데도, 튀어나와 얼굴을, 옷을 적시는 액체가 생소하고, 놀라웠다.

 

느릿하게 눈을 뜬 부키츠마루가 입을 열었다.

 

 

"명령인가?"

 

"필요하다면, 명령이다."

 

부키츠마루는 그것이 못내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뻤다.

 

"......나는, 내가 주인에게 가장 중하길 바란다. 언젠가 내가 부러지는 날이 오더라도, 다른 '닛코 이치몬지'에게 그 자리를 주고 싶지 않다. 나만이, 당신의 '닛코 이치몬지'이길 바란다."

 

닛코가 처음으로 제게 보인 이기심이 이토록 달콤했다.

 

부키츠마루는 떠올린다. 스스로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기억도 없었다. 하늘이 높고 땅이 검은데, 저 자신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둥둥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아무렇지 않기도 했고, 한없이 공허하여 쓸쓸하고 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곳에서 닛코 이치몬지의 존재만이 선명했다. 지금까지 '부키츠마루'가 걸어온 모든 길에는 닛코 이치몬지가 자리했다. 눈을 떠 움직인 것도, 사니와가 된 이유도, 더 나은 사니와가 되고 싶은 것도, 더 제대로된 존재가 되고 싶은 이유도......

 

닛코 이치몬지의 세상이 부키츠마루라면,

부키츠마루의 세상은 닛코 이치몬지였다.

 

 

누군가 말하길, 사랑은 상대의 세상을 침범하는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이 처음부터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면, 이를 사랑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물론 부키츠마루는 여전히 제가 가진 마음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마음이 사랑인지, 동경인지, 열등감인지, 생존본능인지 혹은 그 모든 것인지...제 마음이 무엇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이가 다른 이의 감정에 답을 내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비슷한 것을 목도하자, 이대로도 괜찮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부키츠마루는 드물게 만면으로 웃었다. 기뻐서 웃고, 만족스러워서 웃고, 가슴이 벅차서 웃었다.

 

부키츠마루 자신조차 스스로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데, 닛코가 부키츠마루를 사람이라 말하면 그는 사람이 된다. 닛코가 부키츠마루를 사람으로 만든다. 닛코의 부키츠마루는 사람이니, 닛코의 세상이다. 부키츠마루의 닛코 또한, 부키츠마루의 세상이다. 동소체의 존재 때문에 모든 닛코 이치몬지를 욕망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눈 앞의 한 자루만이, 유일하고 무이하였다.

 

"너는 그것을 바랄 필요가 없다."

 

매순간, 부키츠마루는 닛코 이치몬지로 인해 숨을 쉰다.

 

"너는 언제나 내가 가장 중하고, 소중한 존재다."

 

닛코 이치몬지가 망연하게 부키츠마루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러니 너는 그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어도 좋다. 자긍심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굴도록."

 

결국 닛코 이치몬지는 어떤 얼굴을 해야할지 못해서 부키츠마루를 따라 웃고 말았다. 부키츠마루가 두 팔을 뻗어 닛코를 꼭 끌어안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맞닿은 듯 뛰는 심장의 고동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주인은 정말 내게 무르다."

 

"네게만 그러하다."

 

답이 없는 것도 때로는 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전화위복

: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

불행한 일이라도 노력하면 행복한 일로 바뀔 수 있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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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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