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오비] 자연
아나오비 전력 60분 [자극]
전쟁이 일어나면 여러가지 자원이 필요해지기 마련이다. 군인이 사용할 무기와 방어구, 먹고 마실 음식과 물, 잘 때 필요한 침낭 등등이 그 예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직접 전쟁터에 나가 무기를 들고 싸울 인력이었다. 그만큼 쉽게 부족해지는 자원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은하 공화국은 클론이라는 인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에 무한으로 드로이드를 찍어내는 분리주의 연합과 맞서 싸울 수는 있었지만, 그들을 이끌어 나갈 제다이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원 내부에서는 파다완들을 빨리 진급 시켜야 한다는 목소리와 아직 마스터의 곁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젊은 파다완을 급하게 진급 시켜봤자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는 불상사만 생길 것이라는 목소리가 줄다리기를 하듯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반인이면서도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며 나타난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존재는 가히 별의 폭발과도 같은 파급력을 자랑했다.
사내는 제다이들처럼 포스를 다룰 수 있는 포스 감응자는 아니었다. 그의 피를 채취해봤지만 미디클로디언 수치는 살짝 높긴 했어도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일반인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보다도 블라스터를 능숙하게 다뤘고, 그의 비행 실력과 공중전 실력은 어떤 이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수준급이었다. 또한 사교성이 밝아 클론은 물론 전시 상황이라 예민한 제다이 나이트와 마스터까지 쉽게 친해졌다. 다섯 명의 제다이 마스터가 그를 예의주시한 3일의 관찰 기간동안 그가 친해진 클론과 제다이의 숫자는 셀 수 없었다.
“왜 죽을 수도 있는 선택을 하는 거지?”
윈두의 질문에 아나킨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사랑하는 은하계가 불순분자들에게 넘어가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겠어요?”
오오, 정말이지 애국심(愛國心) 아니 애은심(愛銀心) 가득한 말이었다.
뛰어난 리더십과 관대한 마음가짐, 거기에 전술에도 능했으니 인력이 부족한 제다이 사원은 눈 앞의 인재를 놓칠 수 없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아스라질 목숨을 아끼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 했다. 제다이가 아무리 죽음에 의연하다고 해도, 젊은 목숨이 아스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때문에 아나킨의 뒷조사를 철저하게 했다. 아무리 인력난에 허덕인다고 해도 외부인을 조사도 없이 끌어들이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컸기에.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아우터림에 있는 타투인 출신이었다. 노예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나킨 또한 태어나자마자 노예라는 신분을 받았고, 때문에 노예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가 10사이 되던 해, 클리그 라스라는 상인이 나타나 두 모자의 노예라는 족쇄를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으로 맞이했다.
그 뒤로 사내의 삶은 무척이나 평탄하게 흘러갔다. 노예라는 신분 때문에 정규 수업을 받지 못한 아나킨은 라스의 보호 아래에 학교에 다니게 됐으며, 15살에는 마을 정비소 사장과 친해지면서 그의 가게에서 일을 배우게 됐다. 17살에는 아예 정비소에 취직하여 그의 뛰어난 기계술을 뽐냈다. 어찌나 뛰어나던지, 어떻게 고장이 났든 아나킨에게만 가져가면 새것으로 탈바꿈한다는 입소문까지 났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가 18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터스켄 약탈자들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아나킨은 어머니가 납치당했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어머니를 구하러 가겠다는 말만 남긴 채 행방불명됐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두 사람 다 죽었을 것이라 여겼을 때쯤, 오른 팔을 잃은 아나킨이 귀환했다. 어머니의 싸늘한 시체를 품에 안고.
비록 한쪽 팔을 잃기는 했으나 고작 18살 밖에 안 된 소년이 터스켄 약탈자 무리 속에서 귀환했다는 이야기는 의구심이 들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제다이는 그 이야기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은 아픈 기억을 굳이 건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직접 타투인으로 가서 그의 의붓 아버지인 클리스 라스와 의붓 형인 오웬 라스로부터 그의 신원은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 받은 이상, 그의 과거는 제다이들에게 가치가 있지 않았다.
그렇게 아나킨은 클론 전쟁에 참여하게 됐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하는 몇몇 평의회 의원들은 나이트가 된 지 얼마 안 돼 아직 파다완이 없는 오비완 케노비를 사수이자 감시역으로 붙여주었다.
그렇게 아나킨과 오비완은 자하(紫霞)의 황혼 속에서 처음 만났다.
평의회의 부름을 받은 오비완은 평의회실 복도에 대기하면서 무심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퍼붓던 요란한 비는 어느 덧 물러가고 그 빈 자리를 얇은 손수건 같은 구름이 하늘을 수 놓고 있었다. 대기 중에 남은 수증기 때문에 평소의 붉은 색이 아닌 엷은 자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던 중, 평의회실 문이 열렸다. 그에 놀란 오비완은 벽에 기댄 채 삐딱했던 몸을 바로 했다.
“나이트 케노비.”
자신을 부르는 윈두의 육중한 목소리에 오비완은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그의 뒤에는 곱슬머리에 준수한 미모를 자랑하는 청년이 서있었다. 오비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저 청년이 회제의 중심이 된 아나킨 스카이워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잘생긴 얼굴이 오비완과 눈을 마주하자마자 서글서글한 미소를 띠었다.
“이쪽은 아까 통신으로 말했던 것처럼….”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아나킨 스카이워커에요.”
아나킨은 윈두의 말을 끊고는 오비완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말이 끊긴 윈두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오비완은 아나킨의 얼굴에 집중하느라 윈두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저는, 오비완 케노비라고 합니다.”
오비완이 아나킨의 손을 마주 잡자 아나킨의 뺨 위로 자목련이 피었다. 오비완은 그 자목련이 그의 말간 피부가 피워낸 홍조인지 아니면 창문 밖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자하가 수놓은 작품인지 분별되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색이 오비완의 시선을 잡아 끌 정도로 자극적이라는 사실이었다.
* * *
아나킨은 오비완이 사수라는 명목 하에 같은 쿼터에서 지내게 됐다. 블레이드가 잘린 뒤로 혼자서 지내게 된 오비완은 자신의 공간을 누군가와 나눠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꺼려졌다. 더구나 아나킨은 내부인이 아닌 철저한 외부인이지 않은가.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도 많고, 신경 쓰이는 것도 많았다.
하지만 같이 지내게 된 지 일주일만에 오비완은 갑자기 갖게 된 룸메이트에게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을 고쳤다. 아나킨은 정말이지 훌륭한 룸메이트였다.
먼저, 아나킨은 요리와 청소, 빨래와 같은 가사 능력이 좋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바로 요리였는데,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요리는 하나같이 맛이 훌륭했다. 항상 밋밋한 사원 식당의 요리만 먹어온 오비완에게는 맛있게 자극적이었고 그렇게 아나킨과 같이 지낸 지 이틀 만에 오비완은 그의 요리에 완전히 길들여졌다.
아나킨은 그가 나고 자란 타투인의 요리는 물론이고 바다가 넓어 해산물 요리가 발달한 얼데란과 과일이 특산품이라 이를 이용한 디저트가 발달한 나부, 심지어는 오비완의 고향이지만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스튜존의 요리까지 만들어주었다. 오비완은 아나킨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의 고향인 스튜존이 빵과 면 요리가 발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혀가 스튜존의 밀가루로 만든 국수에 전율한다는 사실도.
이러니 어찌 길들여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오비완은 사원의 식당이나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는 아나킨의 요리를 먹는 것이 더 좋았다.
둘째로 그는 배려심이 뛰어났다. 일반인으로 살아온 아나킨은 당연하게도 제다이의 생활에 대해 잘 몰랐다. 그저 그들이 광선검을 다루고 포스라는 신비로운 힘을 사용할 줄 안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편적인 정보뿐이었다. 때문에 오비완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물어보았고, 이미 아나킨의 요리로 경계가 반쯤 풀린 오비완은 그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다.
그래봤자 매일 명상을 하며 심신을 다스리고, 훈련을 통해 몸가짐을 바로 한다는 일상적인 정보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제다이의 일상 생활에 대해 알게 된 아나킨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배려심을 엿볼 수 있었다. 오비완이 명상을 하러 방으로 들어가면 그가 다시 나올 때까지 방해하지 않았으며, 오비완이 독서를 하면 아나킨 역시 그의 옆에 앉아 독서에 집중했다.
그런 배려에 감동받은 오비완이 그에게 술을 권한 뒤로 그들은 시간이 나면 저녁마다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나킨은 룸메이트뿐만 아니라 이야기 상대로도 적절한 상대였다. 특유의 사근사근함으로 오비완의 이야기에 경청했고, 그의 말에 적절한 반응을 보여주었으며, 자신의 이야기 또한 진솔하게 말해주었다. 그러니 그들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은 오비완이 예상하지 못한 필연이었다.
아나킨이라는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긴 윈두는 그의 사수를 맡게 된 오비완에게 절대 외부인에게 경계를 허물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오비완 또한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된 이상 경계를 풀어버릴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달콤하게 부딪혀 오는 아나킨의 행동에 누가 경계를 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나킨이라는 존재는 메마른 듯한 제다이 생활을 반복해온 오비완에게 있어 부슬부슬 내리는 단비였다. 정말이지 자극적인 존재였고, 그만큼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아나킨은 제 어머니에 관련된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았고,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부모라는 존재가 얼마나 특별한지 알고 있는 오비완 또한 굳이 그 이야기를 후벼 파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나킨이 직접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예상대로 아나킨의 음식 솜씨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노예라는 신분으로 인해 가난하고 부족한 삶을 살아왔지만 아나킨의 어머니인 슈미는 없는 살림에도 아들이 먹는 음식에는 신경 썼다. 중고 요리 책을 훔쳐보며 요리법을 달달 암기한 그는 그들의 주인인 와토가 주는 식재료를 최대한 살려서 요리했다. 맛있게 먹어주는 아들의 웃는 모습이 그가 살아가는 보람인 것이었다. 아나킨 또한 자신을 사랑해주는 슈미의 사랑을 느끼고 있었기에 두 모자의 사이는 더욱이 각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런 어머니를 잃었을 때의 아나킨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고작 해야 18살. 상실의 아픔을 겪기엔 너무나도 이른 나이었다. 팔 하나를 잃어가면서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그가 무척이나,
“대단하네요.”
“제다이의 애착 금지에 어긋나는 행동인데 대단하다고 말씀하셔도 되는 건가요?”
“당신은 제다이가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자식이 부모를 구하는 건 외부에서는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오비완은 의수로 대체된 아나킨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고생했을 아들을 떠올린다. 어머니의 시체와 마주한 아들의 슬픔과 외로움도. 비록 오비완은 느껴본 적도, 느낄 일도, 느껴서도 안 되는 감정이지만 그래도 아나킨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많이 괴로웠겠네요.”
그 말에 아나킨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오비완은 그의 등을 쓸어주며 팔을 주물렀다.
“왜 그래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요?”
“아뇨. 그냥,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어요. 전부 다 고생했다, 아니면 고맙다. 라는 인사뿐이었어요. 어머니를 잃은 제 마음은 오로지 어머니를 가족을 받아들인 아버지와 형만 공감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나봐요.”
아나킨은 제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 탓에 젖은 눈가가 오비완의 시야에 잡혔다. 눈가에 맺힌 눈물 방울을 쓸어주고 싶다는 마음에 손가락이 움찔 거렸다. 그 철없는 행동에 오비완은 제 손을 마구 때려주고 싶었다. 이 눈치 없는 손가락아. 아나킨을 달래줄 생각이나 해야지!
“저기, 케노비 장군님.”
“네.”
속으로 제 몸과 싸우던 오비완은 아나킨의 부름에 곧 정신을 추스르고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스카이워커, 이름을 닮은 눈이 오비완을 빤히 보고 있었다. 살짝 울어서 발간 눈가 덕분에 묘하게 야릇했다.
“전 당신이랑 좀 더 친해지고 싶은데, 장군님은 어떠세요?”
“네?”
아나킨은 제 팔을 잡고 있는 오비완의 팔을 잡았다. 오비완은 자신이 아나킨의 팔을 아직도 잡고 있다는 생각에 놀랐지만 그도 잠시, 가볍게 깍지를 껴오는 연하의 남성에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고 말도 편하게 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넘어갈 수 없었다.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그를 향한 경계가 아예 소멸할 것 같았다. 오비완은 실낱 같은 제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충분히 친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카이워커 장군님.”
“에이, 편하다는 사람이 딱딱하게 성으로만 부르나요? 아니면 연습부터 해봐요. 아나킨. 날 아나킨이라고 불러봐요.”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정리하고 자러….”
밀려오는 야릇함에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계속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간 정말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았고. 하지만 소파에서 일어난 오비완의 몸을 아나킨이 잡아당겼다. 아래로 잡아 끄는 강한 힘에 순간 중심을 잃은 오비완은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소파 위에 누웠다. 그리고 그런 오비완의 몸을 아나킨이 짓눌렀다.
“스카이워커, 이게 무슨 짓….”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아나킨이라고 불러주세요, 네?”
시야가 훅 뒤집히는 어지러운 느낌과 위에서 짓눌러오는 무게감에 오비완의 목소리에도 진중함이 실렸으나, 건드리면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아나킨의 눈망울에 그 무게함은 민들레 홀씨처럼 훅, 날아가버렸다.
“………아나킨.”
그의 이름을 부르는 오비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뿐만 아니라 심장마저 사납게 고동치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나킨이 자신의 거친 심장박동을 눈치챌까 두려웠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아나킨은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자목련을 뺨에 피워낼 뿐, 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가 오비완의 심장박동을 눈치챘는지 알 수 없었다.
“네, 오비완!”
제 이름을 부른 아나킨은 순순히 몸을 뒤로 물렀다. 떨어져 나가는 무게와 온기가 아쉬워서 붙잡고 싶은 손을 겨우 자제했다. 오비완은 그제서야 단비가 내려 촉촉하게 젖은 땅에 무언가 자라났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자목련의 분홍빛 꽃잎을 닮았으며, 자목련의 꽃말처럼 숭고한 감정이었다.
지금껏 성으로만 상대방을 불렀던 두 사람의 호칭은 보다 친근한 이름이 되었다. 윈두는 일주일만에 스스럼없이 가까워진 두 사람을 보자마자 오비완을 몰래 불러내어 주위를 줬다. 하지만 오비완은 지난 밤에 느꼈던 자극과 자신이 아나킨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충격에 빠져 윈두의 말을 한 뒤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편하고 친근하게 호칭으로는 만족을 못했는지 아나킨은 오비완에게 말까지 놓을 것을 바랐다. 물론 오비완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제 마음을 깨달은 이상 그와 좀 더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다만 한가지 언짢은 게 있다면 아나킨은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다는 점이었다. 그게 이상해서 물어보니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이러니까 마스터와 졸업한 파다완 같아서요. 잠깐 생각해봤는데요, 만약에 제가 당신의 파다완이었다면 우리는 분명 돈독한 사제지간이었을 거예요. 확신해요.”
아나킨의 말에 오비완이 흠칫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나는 업어 키운 제자를 원하는 파렴치한 스승이 되는 꼴인데?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은 괜히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나킨이 자신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괜히 모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의미 없는 가정은 속만 버릴 뿐이야.”
오비완은 의연함 뒤에 제 감정을 숨기며 일부러 다리를 빠르게 놀렸다. 아무리 의연함을 가장했다고 해도 날뛰는 얼굴 근육을 아나킨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정말, 제가 당신의 파다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제 감정 숨기기에 급급한 오비완은 말끝을 흐린 아나킨이 제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만약에 그때, 오비완이 뒤를 돌아 아나킨의 표정을 확인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물론 의미 없는 가정은 속만 버릴 뿐이었다.
* * *
전쟁이 막바지로 향할 무렵, 그리버스가 의장을 납치한다는 첩보가 제다이 사원으로 들어왔다. 납치 장소는 바로 코러산트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적진 한복판에서 납치를 강행한다는 것이 실로 대범하기 짝이 없었다. 첩보를 접한 제다이 평의회는 그간 전쟁에서 공을 세운 오비완과 아나킨을 의장의 호위로 붙여주었다.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듣게 된 아나킨의 주장은 참으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나킨,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네, 의장이 시스 군주라는 거죠.”
아나킨은 평이한 어조로 충격적인 말을 털어놓았다. 세상이 알면 뒤집어질 말을 내놓고 있음에도 그의 포드 운전은 그의 평이한 어조처럼 흔들림 없이 편안했다. 오비완의 머리와는 정 반대였다.
공화국의 우두머리가 사실은 시스 군주이자 이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비완은 아나킨의 이야기를 듣고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점점 무거워지는 머리를 포드 좌석에 달린 머리 받침대에 축 늘어 뜨렸다. 낮에 내린 비 때문인지 하늘은 아나킨을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자하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색이 내심 반가웠지만 그건 짧은 평화에 불과 했다.
의장이 시스 군주라고? 만약 그렇다면 그리버스가 납치한다는 첩보는 무엇이란 말인가? 두 사람이 탄 포드는 어느 덧 은하 의회 건물에 도착했지만 오비완은 깊게 고민하느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포드에서 먼저 내린 아나킨이 그에게 손을 내민 뒤에야 오비완은 포드에 타기 전보다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만약 네 말이 맞다면 의장을 납치한다는 건,”
“의장과 시스가 짜고 치는 거죠.”
“하….”
오비완은 제 머리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너울이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아무리 정리를 해도 여러가지 생각에 휩쓸렸다. 머리가 혼란스러우니 지끈거리는 두통이 찾아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비완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자 아나킨은 바로 두통약을 내밀었다. 마치 미리 준비한 것처럼. 하지만 빨리 이 두통을 몰아내고 싶었던 오비완은 거기까지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아나킨이 내민 두통약을 물도 없이 삼킬 뿐이었다.
효과가 좋은 건지 아님 빨리 낫고 싶다는 마음이 약의 효과를 빠르게 이끌어낸 건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두통이 잦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네 말을 들으면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지. 하지만….”
“네, 저도 알아요. 제 주장을 뒷받침해줄 증거는 없죠. 그래도 저는 의장이 시스라고 확신해요. 그러니까 그리버스가 적진 한복판에서 대범한 짓을 저지르죠.”
아나킨은 쓰게 웃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위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붉게 반짝인다. 힐끗 아나킨을 바라보자 건물 로비의 흐릿한 조명 아래에서 그의 눈은 생기를 잃은 듯 어둡게 빛났다. 눈동자에 서린 어둠은 마치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오비완을 향한 원망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나킨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위험요소가 너무 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공화국의 의장을 이 전쟁의 주범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때마침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성큼 엘리베이터에 탄 아나킨은 오비완이 탄 것을 확인하자 맨 꼭대기 층 버튼을 눌렀다. 의장의 사무실은 코러산트 내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기에 올라가는 것도 한 세월이었다.
즉, 이 밀폐된 공간에 내려 앉은 적막 속에서 두 사람이 제법 긴 시간동안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 했다.
내려 앉는 적막에 숨 막히기 직전,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나킨이었다.
“…미안해요.”
“뭐가?”
“당신이라면 제 말을 믿어줄 거라 멋대로 상상하고, 제 상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니까 멋대로 실망했어요. 평의회에 반해 공화국의 수장을 의심하기가 어려운 입장은 생각도 않고요. 그러니까, 미안해요.”
아나킨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가끔 사랑이라는 것은 사람의 이성을 흔들어버리는 자극이 되곤 한다. 아무리 오비완이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으로 상황을 판단한다고 해도, 이미 사랑에 매료되어 버린 그는 아나킨에게 간이고 쓸개고 심장이고 다 빼 줄 것처럼 굴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렇지만 이번 임무가 네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도 있지. 이제부터 우리는 의장과 함께 해야 하고, 그의 사무실과 아파트도 드나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제 근거도 없고 증거도 없고 그저 망상일지도 모르는 제 주장을 믿어 주신다고요?”
이렇게 말하니 일순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근거나 증거보다 좀 더 확실한 믿음이 있기에 오비완은 아나킨을 신뢰할 수 있었다.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리 없으니까. 네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의장뿐만 아니라 윈두가 시스라는 말도 믿어주마.”
가볍게 농을 섞은 말과 함께 웃어 보인 오비완은 아나킨의 손에 제 손을 깍지 꼈다. 손바닥이 맞닿자 엷은 피부로 그의 맥박이 느껴졌다. 그에 응답하듯 아나킨의 손 또한 오비완의 손을 꾹 잡아왔다. 맥박이 아까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장갑을 낀 오른손과 달리 장갑을 끼지 않은 왼손은 무척이나 따스했다. 그 온기가 못내 쑥스러워진 오비완이 고개를 숙인 그때 아나킨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제 생각을 말하는 것뿐이니까 그냥 들어만 주실래요? 대답은 굳이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그래.”
“사실 요즘 들어 이 전쟁이 점점 끝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정말 기쁜 일이죠. 이제 더는 생명이 꺼져가는 신음따위 듣지 않아도 될테니까요. 하지만 그 말은 곧 우리가 헤어지는 날도 머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말에 아나킨의 손을 맞잡고 있던 오비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나킨이 제 옆에 있는 생활이 너무나도 당연해서,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면 아나킨이 제 옆에 없다고? 우습게도 오비완은 아나킨을 만나기 전의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그가 자신과 함께 있어 주길 바랐지만, 불가능했다. 아나킨은 제다이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그가 일반인의 신분에도 제다이들만 머물수 있었던 것은 그의 특출난 실력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맞물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해도 전쟁이 끝난다면 평의회가 포스를 다룰 수 없는 아나킨을 사원에서 지내도록 내버려 둘리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아나킨은 자신의 고향인 타투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너무나도 비극적인 미래였다.
“만약에 제가 당신의 파다완이었다면 우리는 분명 돈독한 사제지간이었을 거예요. 확신해요”
아나킨이 그 말을 했을 때 의미 없는 가정은 속만 버릴 뿐이라며 타박했는데, 이제는 그 말이 그대로 되돌아와 자신에게 꽂혔다. 그도 그 의미 없는 가정을 간절히 바랐다. 만약에 아나킨이 자신의 제자였다면 분명, 전쟁이 끝나도 함께 할 수 있을텐데.
“전쟁이 끝나면 저는 타투인의 정비소 직원으로, 당신은 늘 그래왔듯 제다이 기사로 남겠죠. 아 전쟁에서 세운 공이 많으니 어쩌면 제다이 평의원이 될 수 있겠네요. 한낱 타투인의 정비소 직원인 저는 그 소식을 홀로넷으로만 접할 거고요.”
아나킨은 허탈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 축 처진 목소리가 매우 슬프게 오비완을 옭아맨다.
“저는 그게 너무 싫어요. 지금은 당신의 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이렇게 가까운데 전쟁이 끝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헤어져야 한다는 게, 당신의 소식을 가까이에서 들을 수 없다는 게 괴로울 거 같아요. 저요,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역시 당신이랑 헤어지기 싫어요.”
아나킨의 손이 오비완의 손을 강하게 옥죄어 왔다. 손 마디에서 은은한 고통이 올라왔지만 그렇다고 손을 빼고 싶지는 않았다.
“…이기적이라는 거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냥….”
아나킨의 목에서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언제나 호탕하고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이렇게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는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알아요. 이건 순전히 제 욕심에 불과하죠. 그걸 알고 있지만, 사람 욕심이라는 게 자제한다고 해서 되던가요. 당신을 놓아주나랑기가 이렇게나 어렵고 아픈데.”
아나킨은 손을 풀고 오비완의 어깨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의 이름을 닮은 푸른 눈에 오비완을 삼켜버릴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뺨에도 자목련이 피어났다. 그 자극적인 모습에 오비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전쟁이 끝나면, 같이 갈래요?”
거칠게 맥동하는 심장이 콱 조여 들고 온 몸의 핏줄이 솟는다. 마치 곳곳에서 자목련이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한 여름의 태양 아래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뜨겁고 강렬한 열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는 기분은 정말이지 짜릿할 정도였다. 오비완의 손 끝이 달달 떨었다. 아, 이 기분은 언젠가 한번 느껴보고 싶었던 자극이었다. 만달로어에서 만났던, 새틴에게서.
그때의 오비완은 어렸다. 그리고 무지했다. 사원에서 배운 것은 오로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것뿐이라 새틴을 향한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못했다. 오로지 절제. 그것이 제다이의 미덕이고, 오비완이 알고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도, 결정을 내리지도 못한 오비완은 자신의 결정권을 새틴에게 돌렸다. 그가 자신을 선택해준다면 기꺼이 제다이를 그만두고 그와 함께 떠나겠다는 결심까지 내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비완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새틴 역시 어렸고 그만큼 무지했다는 점이었다. 그 역시 오비완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어느 한쪽도 서로를 향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져야만 했다.
그런 오비완에게 있어 열렬하게 부딪혀 오는 아나킨의 마음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나킨을 향한 자신의 마음과 자신을 향한 아나킨의 마음이 같은 감정이라는 기쁨과 자신을 향한 열기가 너무나 뚜렷하다는 설렘 그리고 자신은 할 수 없었던 것을 망설임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아나킨을 향한 동경과 과거의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도록 해준 고마움이 그것이었다.
만약에 그가 먼저 자신의 마음을 꺼내서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겁쟁이 오비완은 또 다시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 다시 메마른 삶을 살아야 했을테니까.
자신의 마음을 당사자에게 꺼내보이기란 상당히 어렵고 또 두렵기도 한 행동이었다. 오비완이 그 어려움과 두려움 속에서 헤매어 봤기 때문에 아나킨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감정과 생각에 휩쓸렸을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아나킨이 먼저 그 역경을 극복해낸 이상 오비완 또한 아나킨을 위해 그 역경을 다시 마주하고 극복해야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잃는 건 당신이 더 많을 거예요. 제다이인 당신이 저랑 함께한다는 건 지금까지 당신이 이룩한 모든 걸 두고 떠나야 한다는 거니까요. 그래서 제가 이기적이라는 거고요.”
“나는 숲과 강이 있는 행성을 더 좋아하지만, 뭐 모래가 많아도 너만 내 옆에 있어준다면 상관없겠지.”
“네?”
“나는 숲이….”
“아니 그거 말고요. 마지막에 했던 말이요.”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다시 말하려니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쑥스럽다고 내뺄 때가 아니라 솔직함을 드러낼 때였다. 숨기고 있다가 영영 떠나보내는 경험은 한번으로 족하다. 무엇보다 아나킨이 먼저 자신의 솔직함을 보여줬으니 이제는 오비완의 차례였다.
새빨개진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인 오비완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만 내 옆에 있다면 상관 없겠다고.”
“그 말 진심이세요?”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 좀 들어볼까?”
“그야 저는…. 가진 게 없는,”
“무릇 생명이라면 언젠가 포스의 곁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지. 그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제다이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광선검조차도 말이다. 난 그런 것들을 쥐고 있겠다는 허상 같은 욕심에 널 놓치는 우는 범하고 싶지 않아.”
“오비완….”
“오히려 나이 많은 내가 네 옆에 서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역겨워 할까봐…. 앗!”
오비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시야가 흔들리며 단숨에 쑥 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나킨이 오비완의 몸을 안아 올렸다. 그의 단단한 팔이 오비완의 말랑한 엉덩이와 잘록한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아나킨은 오비완 보다 어려도 몇 뼘은 컸기에 그의 얼굴을 숙여서 봐야 하는 지금 이 상황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나킨의 뺨에는 어느 새 붉게 달아올랐다. 여전히 자목련을 떠올리는 색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왜 신경 써요? 멋대로 생각하라지. 우리 둘만 행복하면 그만이에요, 아 내 천사. 지금 당장 이 사실을 은하계에 자랑하고 싶어요. 이게 설마 꿈은 아니겠죠?”
뺨에 피어난 자목련이 점점 더 짙어 진다. 그가 지금 무척이나 기쁘고 열에 들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아예 잡고 흔드는 통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눈을 꾹 감은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나킨 기쁜 건 알겠지만 우리는 지금 임무 중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아, 그렇지! 너무 기뻐서 그 늙다리 박쥐의 안위를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오비완은 자신을 내려달라고 할지, 아니면 아무리 그래도 의장을 늙다리 박쥐라고 부르는 것을 그만두라고 해야 할 지 고민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를 선택했다. 예상하건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진 아나킨이 아무리 오비완의 말이라 하더라도 들어줄 리 없을 테니까.
* * *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하자 어느 정도 진정된 아나킨은 오비완을 내려주었다. 허공에 동동 떠있던 시간은 땅을 딛고 있던 시간보다 짧았지만, 그 사이에 익숙해진 건지 땅을 딛고 있는 것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엉덩이와 허리에서도 허전함이 느껴지는 바람에 오비완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먹었다.
다른 공화국 의원들과는 달리 의장은 건물 최상층 전체를 사용했기에 어떤 곳보다도 넓었지만 그 중 절반은 철통 같은 보안 시스템에 할애했다. 그러니 이런 곳에 잠입하여 납치를 강행하겠다는 그리버스의 계획은 좋게 말하면 당차다고 할 수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무모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보안 드로이드에게 의장의 호위로 왔다는 말을 전해주자 드로이드는 기다리고 있었다며 둘을 의장의 사무실 안으로 안내했다. 문이 스윽하고 열리자 오비완은 그 안으로 들어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의장이 시스일지도 모른다는 아나킨의 말이 그의 경계를 한계까지 이끈 탓이었다.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던 아나킨에게는 경계를 완전히 풀었으면서 정작 이번 임무의 호위 대상에게는 경계심을 품다니. 아마 이를 평의회가 알았다면 자신을 아나킨의 사수이자 감시역에서 배제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비완이 자신의 자아와 싸우고 있는 사이, 아나킨은 이미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발그레한 자목련을 피웠던 그의 얼굴은 비장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에도 그는 일상 생활을 할 때는 얼굴에 쉽게 감정을 드러내곤 했지만, 임무에 들어가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신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신중한 표정과는 너무 달라서 오비완은 섬뜩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왜 그래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사무실엔 들어가지도 않고 멀뚱멀뚱 서서 자신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오비완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나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까전에 지었던 섬뜩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평소와 같은 표정에 오비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드로이드를 따라 들어가자 긴 복도가 나왔다. 조용한 복도에는 드로이드의 철컥거리는 소리와 두 청년의 무거운 발소리만이 울렸다. 별로 길지도 않은 소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쓸데 없는 긴장으로 정신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증거였지만, 긴장을 푸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오비완의 어깨 위로 아나킨의 손이 턱 얹어졌다.
“제가 있는데 왜 그렇게 긴장해요?”
“내가 긴장한 건 어떻게 알았어?”
“얼굴에 무슨 생각하는지 써져 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그런 말은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오비완은 협상가였다. 그것도 평의회 모두가 인정하는 협상가. 타인과의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분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써져 있다고? 오비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아나킨은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완벽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오비완의 얼굴이 화다닥 달아올랐다. 그 말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잘만 하던 감정 제어가 아나킨의 앞에만 서면 먹통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람 놀리는 짓은 그만 하렴.”
“하지만 긴장은 풀렸잖아요.”
그 말은 맞았기에 오비완은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어느 덧 의장이 머무르고 있는 방에 도착했다. 드로이드가 문을 여는 스위치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 아나킨의 입이 열렸다.
“문이 열리면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절대 안으로 들어와선 안 돼요.”
아나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오비완은 아나킨의 말이 무슨 뜻인이 물어보려고 했으나 그가 성큼 안으로 들어가버린 탓에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슬라이드 도어가 열리자 붉은 색으로 칠한 벽과 마찬가지로 붉은 융단이 깔린 사무실의 풍경이 들어왔다. 커다란 통창으로 들어오는 자하의 자줏빛이 붉은색으로 칠해진 사무실을 더욱 짙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왔군, 기다리고 있었네.”
문 열리는 소리에 맞춰 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청년을 향해 인사를 건냈다.
오비완은 전쟁이 끝나면 제다이를 나갈 몸이긴 했지만 아직은 제다이였으니 제다이로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나킨이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도, 오비완이 그의 말을 들을 의무는 없으니까.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인지 그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움직여야 한다는 머리와는 다르게 다리는 움직일 수 없었다. 오비완은 고개를 내렸다. 바닥에 쭉 그어진 선이 보였다. 그 선 위로 보이지 않는 창살이 있는 것 같았다.
“저희도 나름 서두른 건데 의장님을 기다리게 만든 것 같아 죄송하네요.”
반대로 아나킨은 거침없이 의장에게 다가갔다. 아나킨은 의장을 시스라고 의심하고 있음에도 그를 거리낌 없이 대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그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네. 오비완도 거기서 그러지 말고 들어와서 앉게나.”
“아, 저 그게….”
“아뇨, 오비완은 들어오면 안 돼요. 이제부터 일어날 일은 저와 의장님 단 둘의 일인데 외부인이 끼어들면 곤란하죠.”
“그게 무슨 소리인가?”
팰퍼틴이 묻자 아나킨은 팔짱을 끼면서 말을 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당신이 아나킨의 신분으로 제다이에 잠입하라고 명하셨던 걸 기억하십니까, 스승님?”
아나킨의 말에 팰퍼틴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는 서둘러 오비완의 안색을 살폈는데 오비완 역시 아나킨의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스승? 스승이라고? 분명 아나킨은 팰퍼틴 의장이 시스라고 주장했다. 그런 그를 스승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곧….
아나킨은 두 사람이 당황을 했든 충격에 빠졌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날 밤은 제게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이었어요. 평의회를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타투인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중, 두쿠가 절 찾아왔어요. 그러더니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사실 터스켄 약탈자들에게 제 어머니의 납치와 살해를 사주한 사람이 바로, 절 도와주었던 당신이라고요.”
아나킨이 느릿하게 눈을 감자 그의 손이 반짝였다. 자세히 보니 그의 손에는 은빛 막대가 들려 있었다. 자신의 것과 모양새는 달랐지만 오비완은 그 막대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제다이와 시스들이 들고 다니는 광선검이었다. 아나킨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그의 푸른 홍채 대신 붉은 빛이 서린 황금색 홍채가 번뜩였다.
“제가 물어보고 싶은 건 단 하나예요. 정말 당신이 터스켄 약탈자들에게 제 어머니의 납치와 살인을 사주했나요?”
아나킨의 질문에 펠퍼틴은 광선검 가동음으로 대답했다. 그 소리에 맞춰 아나킨 또한 광건섬을 켜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오비완은 익숙한 가동음이 제 광선검에서 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허리춤을 더듬었다. 당연히 자신의 광선검은 제 허리에 잘 달려있었다.
오비완은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못해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의장이 시스라는 아나킨의 주장을 받아들인 만큼 의장이 붉은 광선검을 들고 아나킨과 싸우고 있는 모습은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나킨은, 아나킨은 달랐다. 그는 포스 감응자가 아닌 그저 타투인에서 성실하게 일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기꺼이 참전을 결심한 건실한 청년이었다. 그런 그의 손에 시스를 상징하는 붉은색 광선검이 들려 있다니, 어찌 충격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무 많은 감정이 밀려온다. 충격, 배신감, 의문 등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꽝꽝 울려대는 굉음과 번쩍번쩍 거리는 시야가 더해지니 혼란스러움이 배가 되어 짓눌렀다. 간신히 몰아냈던 두통이 다시금 몰려오는 기분에 고개를 숙이자, 그와 동시에 상황이 일단락됐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팰퍼틴이 괴성을 내지르며 쓰러진 것이었다. 광선검을 들고 있던 팰퍼틴의 팔이 잘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기껏 가르쳐놨더니 이런 건방진 짓을….”
“글쎄, 이게 나 혼자 일으킨 반란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아까 말씀드렸죠, 두쿠가 당신의 더러운 짓거리를 알려줬다고. 이건 두쿠의 계획이에요. 그 계획에 저와 그리버스가 합류한 거고요. 그리버스의 납치 첩보가 들어오면 평의회는 저를 당신의 호위로 붙여줄 테니 그때 복수하라고요. 두쿠는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당신을 없애고, 저는 당신에게 어머니의 복수를 해줄 수 있으니 이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을 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건방진 놈들!!”
“건방진 건 당신이지. 감히 내 어머니를 건드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당신을 은인이라 여겼는데!”
아나킨은 광선검을 휘둘러 팰퍼틴의 다른 팔을 잘라냈다. 살점 타는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그래도 아나킨은 분이 안 풀렸는지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포스가 사납게 요동쳤다.
“그래서 재미있으셨습니까? 제 어미를 죽인 원수를 스승으로 떠받드는 제 모습이 퍽 웃겼을텐데 용케도 웃음을 참으셨네요. 뭐, 됐습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지금이라도 어머니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거죠.”
아나킨은 광선검을 꾹 잡은 채 높이 들어올렸다. 안 그래도 불길한 붉은 광선검이 자줏빛 노을을 받아 더욱 살벌하게 빛났다.
“만약 포스의 품에서 제 어머니를 만나게 되시면 혼이 닳고 닳을 때까지 용서를 비세요.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주었다는 말 전해주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는 소리가 지나고 텅, 하며 묵직하고 동그란 무언가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뒤따랐다. 오비완은 굳이 고개를 확인하지 않아도 그게 팰퍼틴의 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나킨이 의장을 죽인 것이다. 호위를 하러 왔다가 되려 그 대상을 죽이다니. 그럼에도 오비완은 그 머리가 아나킨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붉은 광선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직접 봤음에도 여전히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사랑하는 머리는 그가 시스인 것보다 그의 안위를 우선시했다.
“이제 다 끝났어요, 오비완.”
부드러운 읊조림과 함께 제 어깨에 턱하고 올려지는 손은 굳이 볼 필요도 없이 아나킨의 의수였다. 오비완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아나킨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절망스럽게도. 오비완의 푸른 눈이 비극으로 물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눈을 확인한 아나킨은 희미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눈을 보아하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겠네요.”
어깨를 으쓱거린 그는 오비완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 난장판이 된 사무실 안으로 끌어들였다. 바닥에 흩어진 팰퍼틴의 시체 조각을 포스로 능숙하게 들어 구석으로 치웠다. 포스를 사용하는 폼이 여느 제다이 못지 않게 능숙했다. 시체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아나킨은 의장이 앉아 있던 의자에 제 몸을 털썩 내려놓았다. 그는 마치 자기 자리에 앉은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아나킨에게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다. 언제부터 시스였는지, 두쿠과 그리버스와는 어떤 관계인지. 무슨 이유로 제다이에 잠입했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말했던, 같이 가달라는 말은 정말 사실인지. 하지만 수많은 질문들 중에서 정작 나온 말은 오비완 본인이 듣기에도 황당한 말이었다.
“그 자리에 많이 앉아봤나 봐요?”
막상 말을 내뱉고 후회하는 건 무슨 짓인지. 하지만 오비완은 제 입을 마구 때리고 싶었다. 하고 많은 말 중에 가장 쓸데없는 말을 내뱉다니!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은 따고 있으면서. 그 질문은 아나킨 역시 어처구니없었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첫 질문이 좀 신기하네요? 뭐 물어보셨으니 대답을 해드리자면, 천자(天子)가 자극(紫極)*에 앉는 것이 도리니까요.”
오비완이 그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책상 서랍을 열어 뒤적인 아나킨은 작은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오비완의 눈에도 익숙한 기계였는데 간이 미디클로리언 측정기였다. 가끔 임무를 하던 중 포스 감응자로 의심되는 아이의 미디클로리언을 측정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제다이 보급품 중 하나였다. 그걸 제다이가 아닌 팰퍼틴이 가지고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사무실 서랍에 측정기가 있을 거라 확신한 아나킨 역시 이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나킨은 제 손 끝을 측정기에 달린 바늘로 찔러 피를 낸 뒤 측정기 위에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똑, 똑 두 방울 정도 떨어트리자 측정기가 깜빡이더니 수치를 나타냈다. 수치는 2만. 제다이 그랜드 마스터인 요다보다 훨씬 높은 수치였다. 물론 간이 측정기인 만큼 정식 검사보다 정확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다이 보급품에 들어갈 정도로 여러 번 검증한 기계였기에 아예 불신하는 것도 어려웠다.
“제다이 사원에 이런 예언이 있다고 하죠. ‘포스의 균형을 가져올 선택받은 자가 오리라.’ 그리고 팰퍼틴은 그 선택받은 자가 저라고 생각했고요.”
“선택받은 자는 단순히 많 미디클로디언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포스의 균형을 가져올 자를 말하죠. 아무리 당신이 선택받은 자라고 해도 당신이 시스인 이상 포스의 균형은 절대,”
“네 맞아요. 이뤄지지 않겠죠. 그런데 저는 포스의 균형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요.”
“…뭐라고?”
“이제야 말을 놓으시네요. 계속 어렵게 구시면 좀 섭섭할 뻔 했어요. 그리고 제 말이 그렇게 놀랄 만한 말인가요? 내 신분을 봐요, 오비완. 태어나자마자 노예로 굴려지며 멸시 당하다가 좀 살만 해질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런 제가 그럼에도 세상을 구하겠다며 알량한 정의로움을 내세우겠어요? 뭐 저랑 비슷한 처지 놓인 사람들 중에서도 정의를 택할 놈들이 있긴 하겠지만, 중요한 건 저는 절대 정의를 택할 위인이 아니라는 거죠.”
“내가 봐온 너는 그런 선택을 할 위인이었어.”
오비완은 주먹을 꾹 쥐며 말했다. 아나킨의 사수로 지내온 오비완은 온갖 전쟁터에서 그와 함께였다.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손을 내밀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제 몸을 날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속이 깊고 이타심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나킨은 오비완의 말에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아, 오비완.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기적인 인간이에요. 정말로 당신을 생각했다면 당신이 이룩한 모든 걸 버리고 나와 떠나달라는 부탁은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말을 마친 아나킨은 오비완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오비완의 복부에 닿은 그의 머리가 부드럽게 부벼졌다. 곱슬곱슬한 머리 역시 그의 움직임에 맞춰 나풀거렸다. 움직임이 깃털 같아서 밀어내긴 커녕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다 잡았다.
“두쿠 또한 저를 선택받은 자로 인정했고, 펠퍼틴을 죽이는 조건으로 자극(紫極)을 약속했어요. 뭐 제 뒤통수를 칠 수도 있겠지만, 제 실력이라면 그를 이기고도 남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그건 포스예지니?”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자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하나네요. 많이 혼란스러워서 당신 마음이 전과 다를 수도 있으니까, 다시 물어볼게요.”
제 몸에서 떨어진 아나킨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오비완의 손을 잡았다. 한껏 긴장한 탓에 오비완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나뭇가지처럼 뻣뻣했다. 그런 손등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아나킨이 물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저와 함께 갈래요?”
엘리베이터에서 들었던 말이 똑같은 목소리와 어조로 고막에 박힌다. 말하는 말도, 그 말을 하는 화자도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오비완에게는 처음 들어본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는 쥐어 짜듯이 말했던 주제에 지금은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었고, 자신을 부드럽게 내려보던 그의 푸른 눈 대신 오비완을 올려다보는 노란 눈이 그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유일하게 오비완을 달래주는 것이 있다면 아나킨의 뺨에 핀 자목련이었다. 그 색만큼은 변치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끄트머리만 조금 남았던 태양이 완전히 저물어가고, 오비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극紫極 : 천자(天子)가 앉는 자리.
진짜 대대지각.. 원래는 쓰다가 너무 안 써져서 드랍한 걸 하 다시 각잡고 쓰느라... 게다가 지난주 전력 안 올라왓길래 ㅎㅎㅎ
아무튼 자극(刺戟)과 자극(紫極)의 동음이의어를 노리고 썼습니다.
게다가 제목의 자연(紫煙)이나 자하(紫霞)나 자목련 같은 말을 자주 쓰려고 노력했는데 이게 다 자극(紫極)의 자(紫)와 같은 한자라 처음부터 자극(紫極)을 의식하고 집어 넣었어요.
하 지금 여행와서 오타 맞춤법 진짜 1도 신경 못 썼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이거부터 수정해야함...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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