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Guard you, Guide me 5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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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가 순무의 연락을 받은 것은 호텔로 돌아가기 전이었다. 차를 다 마신 빈 컵을 순무에게 건네주고, 어색하지 않도록 농담 몇마디를 하고는 그가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여전히 이른 퇴근길에 동행하며 신변잡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수사는 아직도 진전이 없었고 동료들은 기진맥진하며 가라르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얘기하면 순무는 유감을 표했다.

순무를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준 후, 저녁식사는 순무가 준 종이봉투의 내용물로 하리라 마음먹고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휴대기기의 신호음이 울렸다. 여보세요,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누는 황급히 순무네 아파트로 돌아갔다.

운 좋게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져있었고, 순무가 거주하는 호수를 확인한 뒤 초인종을 누르면 순무가 달려나왔다. 수사관님, 집이…… 라는 말에 고개를 빼꼼 들고 안을 슬쩍 보면 집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나누는 순무의 어깨를 살짝 밀고 현관으로 들어왔다. 가라르에서는 대부분 집 안에서 신발을 신지만 나누는 현장 보존을 위해 순무가 꺼낸 손님용 슬리퍼를 신었다.

비교적 좁은 거실은 물건이 어질러져서 난장판이 되어있다. 벽에 걸렸을 액자는 삐뚤어져 있었고 서랍장은 열린 채 잡동사니들을 내뱉고 있는 상태였다. 나누는 자기 관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순무에게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어서 신고를 하라고 말했다. 순무가 경찰관을 부르는 동안, 나누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침실도 이불은 침대에서 떨어져있었고 서랍이 죄다 열려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뒤따라온 순무에게 짐작가는 것이나 인물이라도 있는지를 물어보면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보석같은 희귀한 거라도 숨겨둔 건 아니에요? 자긴 평생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윽고 경찰관들이 도착하고 순무에게 예를 표했다. 나누는 그들에게 경례한 후, 경찰수첩을 보여주었고 불안정한 순무와 함께 어떻게 된 경위인지를 알려주었다. 조사반은 침입자가 배관을 타고 베란다를 통해 들어왔다고 말했다. 베란다로 가보면 흙이 묻은 발자국같은 것이 남아있다. 대낮에? 대단한 놈이네요. 그렇게 말하면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으니 금방 잡힐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순무에게 문단속을 하지 않았냐고 묻자 작은 목소리로 오늘은 깜빡한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누는 한참 생각한 후에 범인은 아마 순무네 집을 지켜보고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매일 지켜보다가 베란다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순무가 출근한 사이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대체 누가, 왜. 테러사건의 범인들일 확률이 높아보인다. 아니면 평소에도 순무를 싫어한 사람이거나, 단순 강도거나.

순무가 조사를 받는 동안, 나누는 이웃들이 나와서 기웃거리자 약간 신경질적으로 가까이 오시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휴대기기로 동료들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고 전달했다. 놀란 동료들은 심각한 상황이라며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곧 가라르에 이 소식이 알려질 테고, 사람들은 더욱 공포에 벌벌 떨게 될 것이다.

가엾은 순무는 조사와 감식이 끝날 때까지 집에 머무를 수 없었다. 다른 경찰관들과 상의한 끝에, 일단 보호자인 나누가 머무르는 객실로 이동하기로 했다. 겨우 한 발짝씩 떼내며 아파트를 떠나는 동안, 자꾸만 한숨을 쉬며 불안해하는 순무에게 증거가 많이 남았으니 괜찮다며 위로를 하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순무는 나누와 함께 호텔 객실로 들어오자 약간 기운을 차렸다.

곧장 침대로 간 순무는 가방을 내려놓고는 털썩 드러눕는다. 순무의 가방을 들어서 구석에 둔 나누는 그의 기분전환을 위해 작은 크기의 텔레비전을 틀었다. 순무네 집에 침입자가 있었다는 속보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고 전문가들은 칼로스-가라르 체육관 사건과 연관지으며 토론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끝내 채널을 돌리다가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순무의 기분이 풀리길 바라며 아침에 그가 주었던 종이봉투를 뒤졌다. 조금이라도 드세요, 하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면 침대에 계속 누워있던 그는 겨우 일어났다.

"건강이 우선이잖아요."

나누는 언젠가 순무가 했던 말을 따라했다. 용케도 알아들은 모양인지, 순무는 멍한 얼굴로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일부러 짓는 웃음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누도 침대 위로 올라가 순무의 옆에 앉았다. 둘은 나란히 앉아서 아무말없이 배를 채웠다.

그 때, 본부로부터 전화가 왔고 나누는 나가서 받을까, 하다가 어차피 칼로스어로 말하는 것이기에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본부에서도 소식을 접했고 현재는 경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중이라고 한다. 나누는 순무의 집을 뒤진 흔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범인들이 아마 순무의 포켓몬을 찾았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풀어놓았다. 포켓몬이 없다면 무방비 상태일 테고 그러면 위험에 처해지기 좋은 것이다. 나누의 의견을 받아들인 본부 측은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다고 답했다.

그들은 나누에게 경호할 요원을 하나 더 붙이겠다고 제안했으나, 나누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순무가 당분간 나누의 객실에서 지낼 것이라고 설명하면 본부 측은 지금은 인력부족으로 어쩔 도리가 없다며 허락해주었다. 추후에 두명정도를 더 붙이기로 하고 통화는 끝났다. 나누는 순무가 여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것을 보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뜬금없는 그의 말에 나누는 킁, 콧바람을 내쉬며 황당해했다. 칼로스어가 좀 어렵긴 한데요, 라고 중얼거린 나누는 뒤통수를 긁고 순무에게 가라르에 처음 왔을 때 어땠는지 물었다. 계속해서 대화를 하며 순무의 정신을 다른 곳에 팔리게 할 작정인 것이다.

"언어 공부가 제일 힘들었죠?"

순무는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껴안으며 그건 지금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수사관님은 칼로스어도 잘 하시고 가라르어도 잘 하시고… 신기해요."

"그냥 뭐…… 일이니까요. 철밥통 지키려는 적자생존인 셈이죠."

약간 자조적인 느낌으로 농담을 하면 순무는 살짝 미소지었다.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가는 모양이다. 나누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것을 깨닫고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쳐둔 평상복을 손에 들었다. 금방 다녀오겠다고 한 뒤 순무를 혼자 남겨두었다는 불안함에 재빨리 씻고나서 욕실에서 나오면, 순무는 여전히 붉은색의 방 안에 잘 녹아들어있었다. 그는 통유리에 손을 올리고 바깥을 보는 중이었다. 나누는 슬리퍼를 끌고 옆자리로 다가갔다.

"슬슬 밤이네요."

"네."

오늘 있었던 일때문인지 시가지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가끔씩 공중택시가 날아다녔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바빴다. 둘은 한참동안 서서 말없이 어둠이 깔려오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순무였다. 그도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순무가 나온 후, 좀 나아졌냐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한다. 나누는 잠은 안 오겠지만 그래도 주무셔야 한다고 말하며 침대를 정리했다. 그러는동안 순무는 직원들과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넣었다. 내일부터 당분간 모두 집에서 나오지 말고 안전하게 있도록 하세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는 안전해요.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조심하세요.

마침내 순무는 통화를 끝내고, 휴대기기를 협탁에 올려두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하루의 피로를 감싸줄 푹신한 침대에 눕자 나누는 실내등을 꺼주었다. 통유리에 커튼을 반정도만 쳐서 순무가 잠들기 좋은 환경으로 만든다.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하면 순무는 힘없이 네, 라고 대답했다.

나누는 커튼 사이로만 들어오는 빛에 의지하며 원형 탁자에 놔두는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형사기구용 프로그램에 접속해 암호를 입력한 뒤 보고서를 작성했다. 늘 들고 다니며 기록해두는 수첩을 펼치고 오늘 순무에게 일어난 일과 상황, 겉으로 본 그의 심리상태, 사후 처리, 어떻게 진정시켰는지, 그 반응 등을 기술했다.

오랜시간을 들여 보고서를 작성한 후 전송이라는 단어를 클릭하고 노트북을 종료했다. 이쯤되면 한숨 돌리고 싶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일층까지 내려가서 담배를 피울 요량으로 옷걸이에 걸어둔 정장의 바지주머니를 뒤졌다.

"수사관님, 안 주무세요?"

어둠 속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누는 깜짝 놀랐다가 침대로 다가가서 아직도 안 주무시고 계셨냐고 물었다.

"잠이 안 와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좋지 않은 일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누는 담배를 포기하고 순무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주기로 했다. 허리를 숙이고 이불을 그의 어깨까지 올려 덮어주었다.

"눈을 감고 계시면 금방 잠들 거에요. 여기 침대가 의외로 푹신해서 전 항상 잘 잤어요."

그렇게 말하면 순무는 킥킥 웃었다.

"제가 계속 여기 있을 테니 안심하고 주무세요."

그 순간, 나누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순무에게 나인테일을 불러달라고 했고 순무는 일어나 앉은 뒤 요구대로 나인테일을 꺼냈다. 나누는 나인테일에게 침대로 올라가달라고 부탁했다. 나인테일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어서 한 번에 침대로 올라갔다.

"나인테일이 옆에 있으면 따뜻하니까, 좀 더 나을 것 같아서요."

다시 누운 순무는 나인테일에게 이리 와, 하고는 백금빛의 털을 살살 쓰다듬었다. 나인테일은 기다랗고 풍성한 꼬리들로 순무의 몸을 덮어주었다.

"이러면 따뜻해서 잠이 잘 오겠죠."

"네."

잘 보이진 않지만 순무는 웃고 있을 것이다. 나누는 침대 옆에 선 채 나인테일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따뜻하고 보드랍다. 오늘밤은 나인테일에게 잠자리를 양보해야할 것이다.

나누는 순무가 잠들도록 발소리를 죽이고서 스산한 달빛이 들어오는 통유리 쪽으로 다가갔다. 잠들 수 없는, 잠들지 못하는 지독한 밤을 견뎌내기 위해 의자를 돌리고 거기에 앉아 밤의 빛에 가라앉은 도시의 풍경을 바라본다. 이런 사태에도 늦은 시간까지 돌아가는 공장, 달과 별이 떠있는 거무튀튀한 하늘, 도시의 불빛과 이따금씩 여기까지 울려퍼지는 사람들의 목소리.

한참을 그렇게 있던 나누는 그만 잠이 들었고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얼마나 졸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깨에 무언가가 닿이자 깜짝 놀란다. 나누를 깨운 것은 순무였다. 순무는 나누에게 침대에서 자라고 권했으나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순무는 나누의 팔을 조심스레 잡고 그를 일으켜세웠다. 나누는 반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끌려서 침대에 누웠다. 나인테일은 없었고, 그 자리는 아직 따뜻했다. 그 온기와 함께 몰려드는 잠결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수사관님이 곁에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속삭임을 자장가삼고서.

갑자기 퍼뜩 눈이 뜨인 나누는 놀라며 일어났다. 밤새 순무를 지키려고 했는데 잠이 든 모양이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직 자고 있는 순무의 뒤통수가 보였다. 임무 도중 발생한 자신의 무능함에 한숨을 내쉬고는 순무가 깨지 않도록 슬쩍 침대에서 나왔다. 벽시계를 보면 아침이 밝아오기 전이다. 아무리 잠 이기는 장사 없다지만 현역이면서 이런 꼴이라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인상을 구겼다.

우선은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세수를 하고, 전기포트로 물을 끓인 뒤 비치되어있는 종이컵에 커피가루를 넣고 물을 부었다. 조용한 방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순무가 일어난다. 하품을 늘어뜨리며 잘 잤냐고 묻길래 나누는 종이컵을 손에 들고 순무에게 다가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원래 일찍 일어나요."

"좀 더 쉬시지."

"괜찮아요. 커피 냄새 좋네요."

잘 마실게요, 하고 순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나누의 손에서 종이컵을 빼앗아갔다. 나누는 거기에 화를 내지 않고, 경호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러면 커피를 마시던 순무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해준다. 어쩐지 나누는 고해성사로 인해 용서받은 신도처럼 감격스러워진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으음… 일단 세수 좀 하고 올게요."

"네."

아뿔싸, 잘하려는 마음에 너무 성급했나보다. 나누는 민망함을 느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침대에서 스르르 빠져나온 순무는 한 번 웃고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순무가 씻으러 간 사이 나누는 다시 제 몫의 커피를 타마시며 해가 뜨는 엔진시티를 바라보았다. 검붉은빛의 도시는 아침해에 의해 붉은빛의 도시로 변했다.

순무가 욕실에서 나오자 나누는 자주 가게 된 카페에 가서 둘이 먹을 아침식사류와 그가 사용할 면도기 등을 사오기로 했다. 아직 수염이 듬성듬성 난 얼굴로 순무는 자신의 가방을 뒤져 지갑을 건네고 지금은 집에 갈 수 없으니 갈아입을 옷도 몇벌 사달라고 부탁했다. 나누는 그의 사이즈를 물어보고 수첩에 기록했다. 종이를 주욱 찢고 주머니에 넣은 뒤 금방 다녀오겠다 한 나누는 편한 차림 그대로 객실을 나섰다.

호텔은 스타디움 바로 옆이고, 하층부로 내려가려면 스타디움 앞에 설치된 승강기를 이용해야 했기에 나누는 그곳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이미 스타디움 주변은 취재하러 온 언론사 기자들이 일찍부터 진을 치고 있었고, 경찰관들은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고 서 있다. 나누는 그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승강기를 타고 내려갔다.

다행스럽게도 배틀 카페는 문이 열려있었다. 메뉴를 고르고 포장 주문을 넣은 뒤 아무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카페 내에 달린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어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보도를 하고 있다. 그 때, 나누의 휴대기기가 울렸다. 순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대기기를 꺼내보면 동료들이었다.

전화를 받으면 동료들은 침착하게 둘 다 괜찮은지를 물었다. 어젯밤에 전화를 했는데 전혀 받질 않아서 걱정했다고 한다. 나누는 연락도 없고, 텔레비전에서는 순무가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고만 나왔다는 것이다. 전화소리도 못 들었는데 그만큼 피곤했나보다. 나누는 목소리를 낮추고 순무는 자기랑 같은 방에 있으며 아직까진 별 일이 없다고 전했다. 동료들은 둘 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그리고는 일이 이렇게 커져서 당분간 호텔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말을 전했다.

서로의 무운을 빌며 통화를 끝내고, 때마침 포장이 완료되었다는 주인장의 말에 카운터에서 종이봉투를 받아들고 카페를 나왔다. 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24시간 열려있는 마트로 향했다. 면도기와 칫솔 등 세안도구를 구매하고, 옷가게 쪽을 두리번거리면 이른 아침이라 아직 열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면 오늘만큼은 휴무일 수도. 나누는 곧장 발길을 돌리고 호텔로 향했다. 스타디움 주변은 여전히 사람들이 어슬렁거렸다.

방으로 돌아가서 순무에게 아침시간이라 옷가게가 닫혀있어서 옷을 사오지 못했다고 하면 그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누는 탁자 위의 업무용 노트북을 바닥에 내려놓고 종이봉투에서 사온 것들을 꺼냈다. 순무와 마주보며 의자에 앉아서 아침식사를 했다.

"나중에 다시 나가서 확인해볼게요."

순무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그것이 옷에 관한 이야기인 것을 깨닫고 고맙다고 대답했다.

"당분간 안에 갇혀있으셔야 하니 심심하시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죠. 상황이 이러니."

갑자기 순무는 그 자식들은 대체 각 지방의 전통에 무슨 원한이 있냐며 화를 냈다가, 그 마음은 이해하는데 이런 범죄까지 저지를 필요가 있냐며 태도를 바꾸었다. 나누는 맞장구를 쳐주면서 지금 그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라고 판단해 열심히 공감해주었다. 그래도 순무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관장님만이 아니라 가라르, 칼로스 모두 다 같아요. 저멀리 다른 지방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죠. 저희가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

그를 안심시키려는 나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대기기가 울렸다. 나누의 동료였다. 그는 잠시 호텔에 들러서 카드키를 맡겨놓았으니 자기들이 머물던 방을 순무가 쓰도록 말해달라고 한다. 나누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저, 관장님. 원래 옆방을 제 동료들이 썼는데, 당분간 바빠서 못 온다네요. 그래서 카드키를 맡겨놨으니 옆방은 관장님께서 쓰시라고 합니다."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수사관님이 불편하실 테니 그렇게 할게요."

맞는 말이다. 나누도 웬만해선 순무가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서로 같은 곳에 있으면 여러가지로 불편할 수 있다. 나누는 바로 내려가서 카운터에서 옆방의 카드키를 받아왔다. 순무는 카드키를 받았지만 약간 주춤거렸다.

"저… 자기 전까지만 있어도 될까요?"

둘 다 일정이 없는 터라 딱히 상관은 없었다.

"괜찮아요. 아직은 혼자 있기엔 좀 그렇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혼자 있으시면 심심하잖아요."

둘은 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서 통유리 너머 도시의 전경을 보았다. 순무는 목 뒤를 주무르면서 이렇게 쉬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말을 꺼냈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인데 태평해지네요."

아마 수사관님이 계셔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라고 덧붙인 그는 살짝 주름지는 눈웃음까지 지으며 웃었다. 햇빛을 받은 순무의 부스스한 머리칼은 매끄러운 실크마냥 거멓게 반짝였고 무채색 눈동자도 투명한 보석처럼 빛을 머금었다. 나누는 부담스러운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순무를 따라 미소만 지었다. 이렇게까지 의지해주고 있으니 반드시 그를 지켜내겠다는 사명감이 피어오른다.

나누는 화제를 돌리고 이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아파트는 너무 낡았어요. 방범 장치를 좀 더 효과적인 걸로 달아야할 거에요. 그렇게 말해보면 순무는 왼손의 엄지와 검지로 아직 수염을 깎지 않은 턱을 쓰다듬었다.

"제가 처음 왔을 때부터 살았으니 오래되긴 했죠. 그 때도 신축은 아니었거든요."

앳된 얼굴이지만 서서히 주름이 자리를 잡아가는 얼굴은 그가 짓는 표정을 따라 나이있음직하게 보였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있는 건 역시 그의 성품이 본래는 느긋하고 여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이사를 가실 거란 말씀이신가요?"

그런 뉘앙스인 것 같아서 그렇게 물으면 순무는 턱에서 손을 떼고 피식 웃었다.

"당장은 어려우니 이 사태가 나아지면 그래야겠어요. 이왕이면 교외라도 단독주택이면 좋겠다."

"왜요?"

순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웃들이 없잖아요, 하고 답했다.

"이웃이 있으면 불편한 점도 있지만… 관장님같은 분이면 여러사람이랑 어울려서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번 사건같은 일이 일어나도 목격자가 있을 거고…."

"아, 저는 그런 거 질색이에요."

나누는 무의식에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 것 같아져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순무에게 고독한 면이 있는 것에 놀란다. 짧지만 나누가 봐온 순무는 항상 웃으며 경기장을 뛰어다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했던 것이다.

아니면 오히려 그런 성격이기에 남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걸까? 필요한 지시만 내리고 필요한 말만 하고 더는 친해지길 거부하는? 그런 사람치곤 나누에게는 살갑게 대해준다. 목숨을 하루라도 더 연장시켜줌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지도 모를 일이다.

"호연에서 막 왔을 때도 그랬지만 아직도 저를 비하하고 놀림거리로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요. 특히 가라르는 유서깊은 왕족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유난히 더 그래요."

시간이 지나면서 덜해지고 있지만요, 라는 말을 내뱉는 순무의 표정을 보면 보석같은 눈빛이 약간 어둡게 보였다. 가라르에서 사랑받고 가라르에서 미움받는 험난한 길을 걷다보니 방어적으로 변하고 외로움을 타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이럴 때마저 상대방의 성향을 분석하려드는 자기자신이 역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저 따스한 말 한 마디와 어깨를 두드려줄 용기뿐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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