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Guard you, Guide me 6 (끝)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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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는 나누의 표정을 보고는 괜한 소릴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누는 고개를 젓고나서 순무의 눈을 바라보며 괜찮다고 말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여닫던 순무는 표정을 바꾸고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와선 보기 흉하니 면도나 하겠다며 의자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참 복잡한 사람이군.'

매사에 이성적이고 냉정하기까지 한 나누가 보기엔 그랬다. 나누는 순무가 가진 어두운 부분을 마주치게 되자 난감했다. 앞으로도 신경쓰일 테고, 자신을 지켜주는 나누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게 될까봐 걱정이 된다. 나누는 순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일어나서 상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펜과 수첩을 꺼내 순무가 나오기 전에 재빠르게 휘갈겨 썼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좋으나 그들과 거리를 두려함. 가라르의 일부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있음.'

그리고는 다시 안주머니에 잘 넣었다. 문득 방을 둘러본 나누는 방이 좀 지저분하다는 것을 느꼈다. 척척 쓰레기들을 정리해서 룸서비스를 호출했다. 곧이어 호텔 직원이 노크를 했고 나누는 쓰레기를 담아둔 봉투를 건네주었다. 이불 교체도 필요하지 않냐길래 그것도 부탁한다고 전했다. 객실 문을 닫으면 순무도 면도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현관에서 오는 나누를 보고 그새 어디라도 다녀왔냐고 묻길래 방을 치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순무는 방을 한 번 돌아봤다.

"자잘한 쓰레기들을 정리해서 티는 별로 안 날 거에요."

고맙다고 대답한 순무는 자신의 가방을 뒤지며 무엇무엇이 들어있는지 체크했다. 나누가 주었던 호신용품들을 비롯해 열쇠, 지갑, 휴대용 티슈, 메모지와 펜 등 평소에 들고다니던 것들이다.

그 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나누가 문을 열면 다른 호텔 직원이 새 이불을 실은 카트를 끌고 와있었다. 나누는 직원이 건넨 이불을 받아들었고 순무는 잽싸게 침대에 있던 이불을 품에 안고 나왔다. 그걸 본 나누는 괜히 나오시면 안 된다고 하고는, 새 이불을 바닥에 던져놓고 그의 품에서 이불을 빼앗아갔다.

기존의 이불을 카트에 실은 직원이 사라지자 나누는 바닥에 던졌던 이불에 수상한 점이 없는지 잘 살폈다. 그리고는 순무에게 함부로 그렇게 노출되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순무의 표정을 보면 이런 사소한 것까지 뭐라하냐는 것처럼 약간 뾰로통했다. 도와주려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하면 그도 마지못해 안다는 투로 대답했다.

"기억하세요. 언제 어디서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걸."

어제 그의 집에서 벌어진 일만 해도 그렇다. 이 사람은 이미 한 번 당했으면서…. 소리없는 한숨을 내쉰 나누는 널찍한 침대에 이불을 깔고나서 바닥에 두었던 노트북을 다시 탁자 위에 올렸다. 본부의 지시에 따라 짧은 간격으로 순무의 위치나 상태 등을 보고해야했다. 긴급알림 란에 별다른 소식이 딱히 없는 걸 보면, 역시 순무가 제일 위험한 타겟이 맞았던 모양이다.

갇혀있게 된 순무는 심심한 건지 새 이불 위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고 나누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소리를 조금 낮췄다. 뉴스에서는 다른 관장들의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때로는 가라르에서 일어난 사건 및 사고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왔다. 불안함이 도시를 뒤덮자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이다.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늘었다고도 한다.

현재 상황을 보고하고, 다른 요원들에게서 온 요청에 협력을 하며 자판을 두들기던 나누는 스트레칭을 겸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반쯤 누운 자세로 있는 순무에게 다가가 점심으로 먹을 것을 사오겠다고 했다. 순무는 고개를 위로 들고는 부탁했던 옷도 사와달라고 했다.

밖으로 나오면 가장 붐빌 시간이지만 거리가 한산하다. 이 도시가 이리 넓었던가? 그 외엔 별 감상이 느껴지지 않는 나누는 순무와 점심을 먹었던 식당에 가서 아무거나 고른 뒤에 기다렸고, 음식물을 받아든 뒤 오전에 갔던 옷가게 쪽을 훔쳐보았다. 열려있는 것 같아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동안 손님이 없었는지, 문이 열리자 화들짝 놀란 가게주인과 포켓몬이 나누를 맞이한다. 나누는 대충 순무가 입을 것 같은 상의와 하의를 몇벌 고르고 순무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 계산했다.

나누가 돌아오면 순무는 곧바로 새 옷으로 갈아입었고, 나누는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 후 순무가 입었던 것과 자신이 입었던 것을 한 곳에 모았다. 나중에 세탁을 부탁할 생각이다. 순무에게 이 옷들은 그렇게 될 거라고 설명하자 추가요금이 붙는 서비스가 아니냐고 묻는다. 다 지원받으니 걱정말라고 대답했다.

"알아서 모실 테니 얌전히 있으시면 돼요."

"말썽피울 나이는 한참 지났다구요…."

그렇게 대답한 것과 달리, 순무는 갇혀있는 것이 슬슬 싫증나는지 일어나서 바깥 경치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숨어다녀야 하는지 서럽고 억울할 것이다. 나누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옆자리에 가서 나란히 섰다. 여전히 도시엔 사람이 없었다.

"답답하시겠네요."

"좀 그래요."

가만히 앉아있는 체질이 아니니까요, 하고 눈을 깐 채 거리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시름이 어려있다.

"관장님께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 답답한 건 저도 똑같아요. 현장수사에서도 제외되고 범인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고 누군가는 관장님네 집에 침입까지 했으니까요. 게다가 전 밤에 관장님을 지키지 못하고 잠들기까지 했어요. 악재가 겹치니 솔직히, 답답하다기보다는……."

어느새 순무는 나직이 말을 내뱉는 나누에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누는 붉은 눈동자에 힘을 주고 순무를, 시름이 날아가버린 얼굴을, 빛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이는 무채색의 눈동자를 보았다.

"화가 나요."

"……."

나누는 서늘하게 가라앉는 분노에 인상을 찌푸리며 순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엘리트 소릴 들으며 인정사정없이 남을 짓밟고 올라왔는데,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옆에 있으면서도 관장님이 위험할 뻔 했어요. 내가 너무 한심해서 웃길 정도에요."

"저…."

나누는 제정신을 차리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도 모르게 격앙될 뻔한 것이 순무의 목소리에 뚝 그쳤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침착함을 유지한다.

"수사관님은 어떨지 몰라도 제가 보기엔 잘 하고 계세요. 짧긴 했지만, 며칠동안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잖아요. 저는 혼자 다니지 않아서… 수사관님이 옆에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말에 따지고 들 부분은 많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나누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순무는 팔을 살짝 들어보였다.

"제가… 잠깐만 안아드려도 될까요?"

순무의 제안에 나누는 당황했다.

"그건… 사치같아요."

거절하자 순무는 들었던 팔을 내리고 입을 닫았다.

"죄송해요. 다른 뜻은 없어요."

"저, 저도요."

괜찮다고 하는 순무의 표정은 어딘가 억지스러움이 묻어났다. 다른사람들과 엮이길 꺼려하는 순무가 기껏 나누의 기운을 북돋아주려한 건데 나누는 그걸 막아버렸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둘 사이에 누가 와도 깨뜨리지 못할 벽이 세워진 것만 같다. 나누는 씁쓸한 기분으로 다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순무는 나누를 이해한다며 다시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자기혐오에 물든 나누는 정말로 위로받을 때가 오면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다. 나누의 진심어린 사과에 조금 나아진 건지, 순무는 다른 느낌의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때마침 순무의 휴대기기로 전화가 왔다. 순무는 전화를 받았고 나누는 통화내용을 들었다. 아는 사람인 것 같았고, 순무는 가라르어로 자기는 무사하니 걱정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지금 어디에 있냐구요?"

나누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잡았고, 순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면 자신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네요. 일단 무사한 건 맞아요. 네, 네, 조심하세요."

통화를 끝낸 순무는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위치가 노출될 뻔 했어요."

"다른 마을 관장님이었는데, 그래도 말하면 안 되나요?"

"네."

딱 잘라 말하면 순무는 어깨에서 힘을 빼고, 생각해보니 자기가 경솔했던 것 같다고 말해왔다.

"그 분이 협박을 당하고 계실 수도 있고 범인들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 분이 아닌데…."

"극단적인 것 같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도 믿어선 안 돼요."

"그럼 누굴 믿어야 하죠?"

순무는 눈썹을 찡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누를 보았다.

"저말곤 믿지 마세요."

제 동료들 역시 믿으셔도 되지만요. 나누는 뒷말을 내뱉지 못했다. 순무가 자기에게만 의지하길 바라는 것 같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나누가 가만히 있는 사이 순무는 작은 목소리로 알겠어요, 라고 한 뒤에는 식지 않았는지 걱정하며 나누가 현관에 두었던 점심메뉴를 가지러 갔다.

원형 탁자를 중앙으로 옮긴 후 순무와 뉴스를 보며 빵을 뜯어먹던 나누는 이 임무를 맡게 된 뒤부터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나 말하지 않을 개인적인 이야기, 감정, 생각을 말해버리고 있다. 순무라서 그런 걸까?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바라지 않지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 심지어 나누마저 그의 매력에 빠진 것 같다. 그런 모순이 재밌어진 나누는 입을 오물오물거리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자 순무가 나누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누는 곧바로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혀를 내두를 만큼 끔찍한 범죄사건에 대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스 보고 웃은 거 아니에요."

"정말이죠…."

"…네."

순무는 약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을 마시며 나누를 힐끔거렸다.

그럭저럭 점심을 해결한 후에 나누는 순무의 요청대로 다시 호신술을 복습했다. 아래층에 피해가 갈 테니 큰 동작은 할 수 없어서 손이나 팔을 잡혔을 때, 뒤에서 안겼을 때, 쓰러진 상태에서 발목을 잡혔을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법을 익혔다. 순무는 처음 가르칠 때보다 민첩하게 반응했고 연계동작도 빨라졌다.

이내 둘은 탁자에서 팔씨름을 몇번 하기도 했다. 완력은 엇비슷했으나 대부분은 순무의 승리로 끝났다. 어느정도 놀아줬다 싶은 나누는 물을 마시고 만족스레 웃으며 이제 자기가 없어도 되겠다는 농담을 했다.

"오히려 제가 수사관님을 지켜드려야겠는데요."

"영광입니다."

나누의 대답에 크게 웃은 순무가 침대에 벌러덩 누워 한숨 돌릴동안 나누는 잊지 않고 현상황에 대해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는 노트북을 내버려둔 채 뉴스를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순무가 스르륵 기어와서 엎드리길래 나누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수사관님, 전에도 이런 일을 해보셨어요? 유명인사 경호같은 거요."

"아뇨, 처음이에요. 그래서 미숙한 점이 많네요."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하면 순무는 왜 사과하냐는 투로 말했다. 나누는 여러가지로요, 라고만 대답했다.

"일에 관해서 솔직하신 점은 좋은데 그게 계속 자책으로 이어지잖아요. 사람이 하는 게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어요?"

"실수는 용납할 수 없는 게 사회에요."

"실수를 하면서 배우는 게 사회죠."

나누는 말문이 막혔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대답하지 않자 순무는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나누와 달리 그는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하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둘의 관점이 다른 것은 당연해보였다. 나누도 수많은 실수를 하긴 했으나 그의 선배들은 엄격했고 시민보호나 안전문제, 승진, 성과 평가 등의 사정이 얽혀있어서 일에 관해선 완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직종에선 어깨에서 힘을 빼고 목을 죄는 첫단추를 느슨하게 풀고 일하기란 쉽지 않다. 조금만 실수하면 현장은 그야말로 판도가 뒤집힌다. 그걸 알기에 순무는 나누가 완벽히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어도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누에게 있어선 심적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여전히 엎드려있는 순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관장님을 지키는 입장이지만 오히려 제가 정신적으로 구원받는 느낌이 드네요."

순무는 전혀 예상못한 말을 듣고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 반응에 갑자기 부끄러워진 나누는 고개를 돌리고 손을 저으며 지금 한 말은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괜히 말했나 싶다.

그러고 있는데, 뒤에서 순무가 움직이는지 천과 천이 맞닿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면 어깨는 이미 손바닥에 감싸져있었고 코앞에서는 새 옷 특유의 시큼한 냄새가 났다. 등은 어느새 팔이 들러붙어서 살을 파고들며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온다.

그도 위로가 필요할 텐데 먼저 나서서 위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뿌리치고 싶었지만 몸이 얼어붙은 것마냥 그럴 수 없었다. 만약 그런다면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그에게 상처를 주게 되리라.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슨 마음일까? 많은 생각이 밀려오는 나누가 할 말을 찾는 사이에 순무는 떨어져나갔다. 괜찮아지셨어요? 하고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는 텔레비전 소음을 제치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누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관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봐서 좋네요."

그 말에 나누는 눈썹을 올리며 네? 하고 물었다. 순무는 여전히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눈을 내리깔고 말한다.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안 되니까 괴로운데 그걸 털어놓을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저같은 사람에게 구원받는다고 느끼시는 거겠죠."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정말 그래요."

지금만큼은 솔직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말해보면 순무는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눈을 올리고 나누를 보았다. 무채색 눈동자가 나누의 눈을 보고 있었기에 자칫하다간 그 눈마저 붉게 물들일 것만 같다.

나누는 순무도 자신을 통해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천천히 몸을 기울였고, 나누의 얼굴이 좀 더 가까워지자 순무는 흠칫 놀랐다. 팔을 펴서 조심스레 순무의 등을 감싸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꽤 놀랐는지 아직 그의 어깨는 힘이 들어가있다. 안심시켜주기 위해 손으로 등을 탁탁 두드렸다.

지금만큼은 솔직해져야 한다.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보다 상처가 더 많을 그에게, 그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는 그에게,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상처를 매만져주는 그에게, 그렇게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 그에게.

"관장님도 가끔은… 구원받을 때가 있어야 하잖아요."

고맙다는 말을 돌려서 하면, 순무는 자신을 안고 있는 나누에게로 다시 팔을 돌리고 그를 꽈악 붙잡는다.

"전… 처음엔 수사관님의 말을 듣고는 그게 싫어서, 그래서 절 경호하신다는 걸 거부했었어요."

자유를 구속되면 누구나 거부하지. 나누는 그렇게 생각했다. 순무는 나누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서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사람들은 제가 독하다고 말해왔어요. 물타입에 이기려고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냐면서. 그런데… 그런데 수사관님은 포켓몬들이 저를 믿을 수 있으니 그렇다고 하셨죠."

나누는 어렴풋이 순무와 처음 만났을 즈음을 떠올렸다. 순무는 애써 좋게 돌려말하면서 나누의 임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였었다. 불과 얼마 전이지만, 그와 보내는 하루하루가 길었기에 오래된 일처럼 느껴진다.

"누구도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었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수사관님덕분에 깨달은 게 많아요. ……평생 시달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순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누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낯선 곳에 와서 고생했을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그들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돌아온 것은 투지를 꺾는 대중의 반응들이었을 것이다. 점점 사람들을 기피하게 된 그를 구원해줄 것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전 이미 구원받았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누는 생각을 멈추고, 분석하길 그만두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길 중단했다. 그래도 순무가 무엇에 구원받았는지는 바로 떠올랐다. 굳이 그걸 확인받기 위해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을 것이다.

둘은 다른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점점 엉키며 하나가 되는 연리지나무처럼 서로를 팔로 감싼 채 얽혀있었다. 이대로 잠들어버리려나, 그래도 좋다, 라고 생각하는 찰나, 순무가 꿈틀거리자 나누는 팔을 내렸다. 까만 머리칼이 뺨을 스치고 약간 벌겋게 물든 이마와 감은 눈이 보인다. 눈을 뜸과 동시에 순무도 나누에게서 팔을 거뒀다. 그리고는 고맙다고 하길래 나누는 영광입니다, 하고 아까 했던 말을 하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순무가 다시 웃어주자 나누는 고개를 돌려 방바닥을 보았다. 앞으로 둘의 관계가 어색하게 흐를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정이 없었기에 텔레비전을 보며 가만히 앉아만 있었기 때문이다. 할 일이 없는 것이지,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둘은 화면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웃었다. 어린시절의 우스꽝스러운 사건이나 추억들, 그리고 이겨내야 했던 시련들. 그 모든 것들을 거쳐오며 성장하고 여기에 있었다.

마치 정말로 여행을 와서 묵는 손님들처럼 굴며 웃고 떠들자 나누는 조금 더 편안해짐을 느꼈다. 푹신한 침대, 점점 어두워져가는 바깥, 조용하고 따스한 느낌의 실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듯한 순무, 한꺼풀 벗겨진 자기혐오. 나누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활짝 연 순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나만 알고 있다는 우월감을 맛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만 지키면 나쁠 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애초에 선이란 게 있었던가? 나누는 그어놓았던 선을 슬며시 발로 지워버린다. 그건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금씩 해가 저물어가자 나누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저녁 생각이 있냐고 물었고, 신진대사가 활발한 건지 그렇다고 대답한 순무는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고 했다. 나누는 금방 돌아오겠다고 한 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보니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순무의 주변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 압박감도 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관장님, 관장님만 계시다면 모든 흡연자가 금연을 할 수 있을 거에요.

선선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걸어간 퓨전요리집에서 면식을 구매했다. 한 번 나른함을 맛보자 만사가 귀찮았기에 먹고 치우기 편한 것을 생각하다가, 면요리라면 젓가락만 있어도 되겠다 싶어서 정한 것이었다. 다만 불규칙한 영양을 생각해서 이 때만큼은 추가요금을 더해 다양한 채소를 골라 넣었다.

돌아가서 순무와 면을 후루룩거리며 식문화에 대해 토론을 펼쳤다. 성도는 밀의 재배가 활발하여 자연적으로 밀가루 음식이 발달했고 호연은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타지방과의 교류에서 탄생된 독특한 요리가 많았다. 그거 드셔보셨어요? 네, 맛있었어요. 그건 거기말고 어디가 더 맛있어요. 둘은 여유가 생긴다면 식도락 여행단을 꾸려보자며 농담을 했다.

나누는 동향 사람과 토속적인 음식을 먹으며 고향의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마 성도를 떠난 이후 처음일 것이다. 낯선 지방에서 이러고 있으니 순무와의 친밀도가 더욱 오른다. 나누는 체육관 관장 친구가 처음이었고 순무도 경찰관 친구는 처음이었다. 나잇대도 비슷하고 칼로스와 가라르는 가까웠다. 이젠 운명이라고 생각해도 될 지경이었고 언제든지 위급해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위기감이 점점 지워지고 있었다.

탁자를 정리한 나누가 보고서 작성을 끝내면 순무는 슬슬 밤이니 옆방으로 가야겠다며 일어섰다. 그는 나누가 사온 옷가지들을 잘 겹쳐서 팔에 걸치고, 가방을 한 손에 들고는 잊은 것이 없는지를 둘러보았다. 취침시간만이라도 순무가 가는 것이 내심 아쉽지만 이미 어두워진 밖을 보고는 순무도 혼자서 쉴 시간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 사건이 잘 마무리 되면 그는 낡고 낮은 아파트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고, 범인들이 잡히기 전까지 나누의 하루는 같을 것이다. 혼자서 아침을 맞이하고 혼자서 계속 순무를 기다리다가 혼자서 방에 돌아오는 그런 날들. 어느새 나누의 삶 속에 스며든 순무는 무채색이었기에 한 번 물들어버린 붉은색이 잘 빠지지 않게 되었다.

순무는 현관에 서서 내일 일정에 대해 물었고, 나누는 여전히 경호임무라고 답했다. 그러자 순무는 손을 흔들며 잘 자라는 인사를 했고 나누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따라나갔다. 그걸 본 순무는 바로 옆방이니 따라나올 필요가 없다며 웃었고 나누는 알겠다며 인사를 한 뒤 곧바로 문을 닫았다.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작동되며 문이 잠겼다.

몸을 빙 돌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누는 동작을 멈췄다. 지면에 약간 붕 떠있던 오른발이 다시 내려앉는다. 적막해진 방에 잠시동안 서있던 나누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이미 자동으로 잠긴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동그란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잠깐 그대로 있다가 문이 다시 자동으로 잠기기 전에 문고리를 돌린다.

천천히 문을 열면,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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