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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Sheep Come Home (2024.7.26)
“왔나.”
숙소엔 때마침 재유뿐이었다. 재유는 눈을 잠깐 치켜뜬 것 말고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승대가 올 것을 예감했던 것처럼. 그 무덤덤함이 반가웠다. 가족 같은 느낌이 무척 오랜만이었다.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재유에게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게 승대를 못내 기쁘게 했다.
재유는 코트 위건 아래건 눈치가 좋았다. 승대가 왜 내려왔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서울살이가 고단하여 변변한 방책도 없이 무작정 털레털레 찾아왔다는 걸. 방학 막바지의 한여름이었다. 고교 삼 년의 한가운데 반환점 부근. 즉흥적으로 버스를 잡아 타고 내려오는 길은 어찌나 물 흐르듯 이루어졌던지, 자석에 끌리듯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듯이 자연스럽게 승대는 원래 놓여 있던 곳에 다시 서 있었다. 부푼 기대 하나만으로 돌진하듯이 상경하던 때만큼이나 쉬운 길이었다.
“잘 지냈나 검사하러 와 봤다.”
“내야 뭐... 비슷하지.”
승대의 허풍 섞인 질문에도 성실히 대답하는 재유의 말은 한숨처럼 들리면서도 승대를 안심시켰다. 두고 온 집이 늘 비슷하기를 내심 바라 왔던 것이다. 특히나 승대가 떠나면서 남겨둔 공백은 그대로 빈 구멍으로 남아서 아무도 채울 수 없기를. 그리하여 승대는 그 자리로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 환영 받기를. 분명히 그럴 거라는 상상은 승대가 장도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제 몫의 불면을 감당하느라 뒤척거릴 때마다 상당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장도고 같은 곳에선 최종수 같은 사람만 밤을 견뎌야 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지상고 숙소에서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편의점은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던 곳이었다. 주로 승대 때문이었다. 재유는 급식을 한 번 더 받아 먹는 것으로 충분했으나 승대의 가파른 성장은 자기 전마다 열량을 더 밀어넣어야만 지탱할 수 있었다. 자기 몫의 사발면과 재유가 먹을 삼각김밥을 집으면서 승대는 자못 뿌듯해졌다. 재유가 편의점에 오면 으레 무엇을 고르는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 승대의 소속이 빛바래지 않았다는 증거 같았다. 반면 장도고 부원들의 사소한 입맛 따위는 전학을 간 지 반 년이 넘도록 거의 익히지 못했다. 이규가 무협지를 즐겨 읽는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것은 대단히 친밀해지지 않고서도 누구나 금세 알아챌 수 있는 축에 속했다.
어차피 승대는 그들과 시시한 친분을 쌓으려고 간 것이 아니었다. 오직 농구를 위해서 간 것이다. 그러니 먼저 숙이고 들어가 알랑거릴 생각은 없다. 비록 아직도 장도의 모든 사람들이, 감독과 코치마저도, 얇고 투명하지만 절대로 찢고 건너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한 막 너머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여기 지상고에선 그런 적이 없었다. 영원히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재유 곁에서는 느껴 본 적 없었다. 이곳에선 승대가 그들의 희망이고 자랑이었는데, 기둥 같은 장손을 파면하는 집안이 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재유를 자세히 관찰할수록, 현관문을 열던 승대와 마주쳤던 몇 초가 몇 분, 몇십 분 단위로 길어질수록 재유에게 기쁜 기색이 없다는 것은 뚜렷해졌다. 둘은 어스름이 내린 노면에 각자 흰 플라스틱 의자를 빼고 앉았다. 재유는 데우지 않은 삼각김밥이 아무 맛 없는 돌덩이인 것처럼 꾸역꾸역 베어물었다. 재유마저도 투명한 막 너머로 건너간 것 같아 승대의 심정은 불안으로 요동쳤다. 굳게 내린 닻이라고 믿었던 것조차 시간이 흐르면 움직여 갔다.
“승대 니가 마음 쓸 일은 아니지만... 걱정이 많이 된다.”
“와. 내 가고 나서?”
“어. 기철이 땜에. 금마 다친 게 점점 덧나는 모양이라. 아무래도 농구 계속 못할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재유는 침울하게 혼자만 아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승대가 사 준 김밥은 절반이 고스란히 남아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갑자기 승대는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재유를 방해하는 불청객이 된 것 같아져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큰일이구마. 기철이도 빠지면 인원 미달되는 거 아이가?”
“그거는 면했다 그래도. 니 가고 얼마 안 돼서 한 명 전학 왔거든. 불행 중 다행이지. 마침 슛 되는 아가 모자랐는데.”
승대가 확신했던 소망, 아무도 승대를 대체할 수 없었으리라는 기대는 한순간에 모래성으로 변하고 바람에 흩어져 내렸다. 그 자리에 걸어온 새 부원은 승대가 전혀 모르는 이름을 가졌다. 들을수록 승대와는 정반대인 놈이었다. 슛에는 자신이 없지만 거구인데다 덩치를 위협적으로 쓸 줄 아는 승대랑은 달리, 석점포가 주특기인데 재간은 갖추지 못했고 키도 재유 바로 다음가는 비리비리한 애.
농구가 전쟁이란 걸 모르는 선수는 없다. 전술은 인원에 발맞추어 달라진다. 진재유의 지상고는 그곳이 임승대의 지상고이기도 한지 아니면 성준수의 지상고인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장소로 탈바꿈한다. 이곳은 이미 승대가 알던 바다와 산이 아니었다. 새로운 지형에는 어쩌면 승대가 설 자리가 없을지도 몰랐다. 재유에게 승대가 패스를 줄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 깨달음에 뼛속까지 혼자 남은 기분이 들려는 순간에 재유는 승대를 돌아봐 주었다.
“와 이리 됐는지 모르겠다. 니 있을 때는 재밌었는데.”
“내 다시 오면 좋겠나, 재유?”
호기롭게 대꾸한다고 신경을 썼는데 식탁 아래로 다리를 떨고 있어서 그런지 말끝이 덩달아 흔들렸다.
“승대.”
“응.”
“많이 힘드나?”
“...티 나나?”
“아닌데 여까지 오겠나.”
승대는 힘들지 않으려고 서울로 올라간 게 아니었다. 농구를 재미로 하러 간 것도 아니었다. 최종수를 이기기 위해서 간 것도 아니었는데, 가서 보니 최종수를 이기지 못하면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아무도 드러내 놓고 승대를 향해 혀를 차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서면 어깨 너머로 이규의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센터진을 보강할 필요가 있었기야 하지. 그런데 임승대 말고 다른 센터였으면 종수한테 더 좋았을 텐데. 그러면 노수민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감독도 무언의 동조를 할 것만 같아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십오 센치 가까이 작은 놈 하나 꺾지 못해서 빌빌대고 있다니... 승대가 자초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이 상황을 피할 길이라는 건 꼭 처음부터 없었을 것만 같았다.
승대는 못 이기고 투정했다.
“재미 없다.”
“서울서 농구하는 거?”
“어.”
“못 견딜 정도가?”
“그런 건 아니지만.”
알량한 자존심이었을까. 승대는 목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배반하고 말았다. 재유 앞에서 한심한 꼴은 도저히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재유는 눈에 띄게 안심하며 긴장을 풀었다. 그게 승대를 사무치도록 외롭게 만들었다.
“그치? 그래도 할 만하지? 그럴 줄 진작부터 알았다. 니는 여기 있을 아가 아니거든.”
승대는 그 말의 진위를 가려낼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고 느꼈다. 내가 여기 있을 애가 맞으면 어떡해, 진재유? 서울의 심장에서 화려한 영광을 따내고 드높이 빛 속으로만 솟아오르도록 그려진 이 지도의 길이 내 것이 아니면 어떡해. 지도에 남겨지지 않는 지상낙원에 머물렀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별이 없고 따라서 그리움도 없고. 자격이 없다거나 내 존재가 부당하다고 느끼게 만들지도 않고. 오로지 내가 나이기만 하면 변함 없이 보듬어 주던 곳에. 너의 보호 속에. 네 곁에... 그런 응석을 부릴 수는 없었다. 재유의 서글픈 눈 속에 다음에 이어질 말이 담겨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내는 여기 있을 아고... 여 아니면 갈 데가 없거든.’
말로 꺼내는 대신 재유는 쓸쓸히 미소했다.
“가래이. 온 거 안 이를 테니까.”
침묵 속에서 둘은 불어터진 컵라면과 찬밥의 뒷정리를 했다. 캄캄한 밤이 스산했다.
재유는 뜻밖에 버스터미널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것이 고맙거나 달갑지만은 않았다. 환송을 받아 나서는 길일수록 돌이키기도 힘들어진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길이 끝나 가고 있다는 것을. 가는 길은 가지 않은 길에 연하여 끝이 없는 법이다. 정각에 출발하려고 기다리는 버스 앞에서 산비둘기 떼가 한가로이 바닥을 쪼아대고 있었다. 구구구 울음소리마저 구슬프고 처량하게 들려왔다.
제값을 치른 티켓이 있는데도 히치하이커 같은 기분을 면할 수 없었다. 승대가 머뭇머뭇 계단에 농구화를 얹기만 하고 쉽사리 오르지 못하자, 작은 손바닥이 자기 몫의 용기까지 나누어 주겠다는 듯 등에 와 닿았다. 정말로 등을 밀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도록 만든 것은 그 손의 온기가 아니었다. 다정한 속삭임이었다.
“돌아보지 마라.”
무리를 떠난 양도 집을 등진 탕아도 돌아갈 곳이 없기에, 승대는 차창 커튼을 걷을 수 없었다. 곧 바퀴가 도는 소리 말고는 사방이 고요해졌다. 버스는 바야흐로 열대야가 예고된 나날들 속으로 달렸다.
Color Us Blue (2024.3.23)
승대는 키와 등빨 모두 유전이다. 아버지도 평균 키보다 크지만 어머니 쪽이 대대로 장군감이다. 공군 대령까지 하셨던 외조부는 당대엔 보기 드물 정도의 장정으로 동네에서는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일가친척이 설날이라고 다 모인 집은 터져나갈 것처럼 북적북적했다. 외조부가 올해는 누구의 몇 주기 제사라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성화를 부려 승대도 날맞추어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귀신이 뭘 도와준다고. 귀한 자손이 최종수한테 이 년 넘게 치이고 살게 놔두는 조상 따위 뭐가 좋아서⋯⋯. 최 씨네 귀신이랑 바꾸고 싶다.
조금 서울깍쟁이가 된 승대는 향토적인 신앙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열외가 되지는 않았다. 승대가 속으로 구시렁거려 봐야 아무 소용은 없었다. 정정하게 호령하는 할아버지는 세뱃돈을 넉넉히 쥐여 주었지만 그 대가로 집안의 어린 양들은 돌아가며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훈화를 들어야 했다. 낮잠을 주무셔야 고스톱이라도 치는데 도무지 기력이 쇠하지 않는 분이었다. 바로 손위의 사촌 형까지 내려왔으니 곧 승대 차례가 올 것이다. 예감하고서 승대는 슬금슬금 아버지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가뜩이나 덩치 산만한 사람들이 부대끼고 있으니 답답하기도 했다. 탕국에 넣을 양파를 더 사 오던 이모와 현관에서 마주쳤을 때는 의심의 눈길을 한아름 받았다. 승대 어데 도망가나? 동네 한 바퀴 돌고 금방 돌아오겠심더. 떡국이 어찌나 맛있어서 꿀떡꿀떡 넘어가던지 너무 먹어서. 너스레를 떠니 이모는 낯을 활짝 폈다.
제사상에서 주워온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승대는 정처 없이 쏘다녔다. 추위에 뼛속이 시린 2월이라도 연휴엔 관광객이 많아 걷기가 마냥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어깨 좌우로 인파가 스쳐 갔다. 여행객들의 얼굴은 밝았고 자유로워 보였다. 부산에 살 때는 미처 몰랐었다, 바다가 지척이었을 때는. 그 풍경을 왜들 보고 싶어하는지. 사람들이 왜 바다를 그리워하는지. 떠나고서야 알게 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막창집과 아구찜 집을 지나면 거리에는 카페와 호텔이 들어찼다가 큰 로터리로 이어졌다. 승대의 낡은 농구화는 알아서 계속 서쪽으로 걸음을 뗐다. 작은 소나무 공원을 건너면 긴 모래사장이었다. 겨울바다의 검푸른 추위를 오래 감당할 관광객은 그다지 없어 비로소 승대는 고향 내음 속에 호젓하게 혼자가 될 수 있었다. 호기롭게 나온 연인들이 어깨를 움츠리고 따뜻한 호텔로 도망가는 걸 보면 코웃음이 나왔다. 나약한 서울 것들이 분명했다. 해운대 칼바람을 당해낼 건 이 바닷가엔 임승대밖에 없지⋯⋯. 자신하기가 무섭게 조금도 움츠리지 않은 커플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승대에게 꼭 반례를 들어 줘야겠다는 듯이. 그런데 저거⋯⋯. 탁 트인 해변의 햇빛이 눈부셔서 승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쪽에서도 바로 승대를 알아보아서 탄성은 거의 동시에 울렸다.
“어어!”
희한한 일이었다. 진재유가 여기까지 다 오다니. 진재유는 해운대가 아니라 남구에 살았다. 사료공장이 비둘기들을 끌어모으고 언덕이 많아 장딴지가 튼튼해지는 동네였다. 지상고 시절에 두어 번 놀러 가 봤다. 그 뒤로 재유네가 이사를 이쪽으로 왔는지 어떤지는 몰랐다. 승대가 재유에 대해 알던 것들은 죄다 시일이 한참 지나 있었다. 승대는 의아함을 숨기지 않았다.
“여긴 어인 일이고, 진잼민이?”
“내가 할 말이다. 승대 니를 부산에서 다 보네.”
부산에서 보는 게 당연했었는데. 재유가 서울 아 다 됐네, 하고 말한 것도 아닌데 꼭 그 말을 들은 것처럼 거슬렸다. 승대는 재유 옆의 여자를 향해 성의 없이 눈짓했다.
“명절이라 내려왔지. 효도해야지. 옆에는 처음 뵙는데?”
키가 아주 작고 눈매가 순박한 여자였다. 재유랑 어찌나 닮았는지 어떻게 저렇게 자기 같은 여자를 사귀었지, 생각하기가 무섭게 소개를 받았다.
“우리 사촌누나. 니처럼 서울 사는데 명절이라 왔지.”
굳이 들어간 ‘니처럼’도 듣기 좋지는 않았는데 사촌누나라는 걸 알고 나니 왠지 마음이 편해져 쌤쌤 치기로 하며 승대는 웃어 보였다. 재유네 누나는 둘한테 커피를 큰 걸로 한 잔씩 사주더니 본론을 꺼냈다. 재유 친구 만나서 잘됐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잘 놀아라. 이제 가도 되제? 내는. 엄마한테 잘 좀 말해 주래이. 자세히 보니 앳된 티가 전혀 없어 재유와는 터울이 꽤 졌는데도 친구처럼 친해 보였다. 재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해했다.
“늦지 말고 들어온나. 내는 책임 못 진다.”
사촌누나는 끝까지 듣지도 않고 쌩하니 가 버렸다. 재유에게 들어 보니, 재유랑 바람 쐬러 나온다는 건 집을 탈출할 핑계에 불과했고 외출의 본 목적은 때맞춰 부산에 찾아온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함이라고 했다. 남친이 인천만 가 보고 해운대는 안 가 봤다캐서 꼭 델꼬 간다 하데. 안 물어봤는데. 어제부터 남친 자랑을 을매나 들었는지 귀가 따갑다. 카톡을 억지로 막 보여주는데 말씨가 억수로 오글거려서⋯⋯.
재유의 불평을 듣고 맞장구치고 있으니 집에 온 실감이 제대로 나는 까닭을 모를 일이었다. 꼭 이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머리 위로 갈매기들이 빙빙 원을 그리면서 세차게 부는 바람에도 기우뚱대지 않고 날아갔다.
“이게 진짜 부산이구마.”
“뭐가?”
“바닷바람.”
“새삼스럽구로. 바닷가에 바람이 불지 그럼.”
재유에게 당연한 것이 승대한테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승대는 내내 바람을 그리워했다. 그곳에선 열섬에 갇힌 매연만 들이키며 정체되어서 지냈다. 최종수라는 벽에 가로막히고 에워싸여서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고 숨만 막히는 나날이었다. 기이하게도 최종수와는 작별이 가까워진 요즘에 와서야 사이가 좀 나아졌다. 곧 안 보게 될 테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퉁치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지상고에 패배한 뒤로 승대는 최종수가 예전만큼 밉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자그마한 녀석이 날쌔게 승리를 가져간 뒤로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재유는 남색이 바랜 코트를 입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재유의 머리카락을 훑고 내려가 옷자락을 들었다 놓고서 지나갔다. 가슴 속이 같은 리듬으로 울렁거렸다. 그것도 연유를 알 수 없었는데 그럴수록 승대는 능글맞게 웃었다.
“재유 멋쟁이 옷 입었네.”
“그지? 괘안치? 내 꺼는 아이고 아빠 꺼다.”
“썬구리 하나 끼워 주면 마피아 영화 나오긋네.”
블랙 커피를 들고 걷는 재유한테는 그런 의젓함이 있었다. 드라마 배우라면, 꽃미남에 키가 훤칠한 재벌집 후계자 남주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 비서이자 죽마고우쯤 되는 서민적인 역할인데 사실 충성스러운 팬은 이쪽에 더 많을 느낌. 재유는 승대의 마지막 기억보다 작았다. 일 학년 때 거의 그대로였다. 쌍용기 대회 코트 위에서 재유가 유독 커 보였던 건 순전히 승대만의 착각이었다.
“에이. 오바하지 마라.”
해가 수평선 근처에서 주황색으로 뉘엿거렸다. 재유가 핸드폰이 든 주머니를 매만졌다. 집에서 슬슬 찾는 연락이 온 눈치였다. 아마 승대한테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재유는 반으로 접히는 핸드폰의 바깥 화면을 흘깃 보더니 도로 집어넣었다.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곧 재유는 승대를 응시했다.
“승대, 저녁 먹을래?”
먹자골목을 따라 즐비한 식당들은 활기를 띠고 바글거렸다. 꽁초가 나뒹구는 거리를 따라 노란 불빛을 머금은 빨간 플라스틱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돼지국밥과 밀면집은 들르는 데마다 줄이 길었다. 부산 별미라고 서울까지 소문이 쫙 난 탓이었다. 이라모 부산 사람들은 뭐 먹고 살라고, 투덜거리다가 찾아 들어간 곳은 조개구이 집이었다.
“부산에서 조개구이는 또 첨 사 먹네.”
연탄불 위 철망에 각양각색 모듬조개가 놓이기 무섭게 승대는 이모 소주 한 병을 외쳤다. 한쪽 눈썹을 치켜뜨는 재유에게 능청스럽게 따라서 한쪽 눈썹을 올렸다. 키가 2미터가 넘고 나면 술을 시킨다고 신분증 검사를 받지는 않았다. 잼민이는 알 길 없는 세계였다. 어차피 올해부터는 숨어서 마셔야 하는 나이도 아니다.
“술 마셔 본 적 있나?”
“어, 한 번.”
“가족들하고?”
“감독님이 숙소에서 맥주 드시다가 나눠 주셔서. 내랑 준수랑 한 잔씩.”
소주를 어설프고 정직하게 열어서 기울이는 폼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재유의 첫 음주에는 승대가 없고 성준수가 있었다. 얼마나 많은 처음이 승대의 눈 밖에서 일어났을까 하는 상념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승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잔을 맞부딪쳤다. 쨍 맑은 소리가 났다. 목을 타고 흐르는 알딸딸한 기운은 오랜만이었지만 익숙했다.
“마셔 보니까 어땠는데?”
승대는 가끔 방학에 내려오면 아버지네 식당에서 마감을 돕다 소주를 한두 잔 받아 마시기도 하고, 손님들이 끝까지 비우지 않은 복분자주를 치우다가 슬쩍 한 병을 끝내기도 했다. 재유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맛도 없더만. 술 같은 거 왜 먹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다 그러지.”
“어쭈. 니는 뭐, 술맛을 아나? 준수도 맛 없다 하드만.”
재유와 회포를 풀며 후련해지려다가도 성준수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자꾸 미미하게 기분을 잡쳤다.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애를 안 좋게 말하는 건 자승자박일 테고. 승대는 거의 모르는 애가 재유한텐 가깝고 소중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때는 승대가 재유에게 그랬는데, 마치 승대를 서울 보내 버리고 준수를 갖고 온 것처럼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그거야말로 이상한 생각이었다. 신나서 제 발로 떠난 건 승대였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승대는 젓가락으로 애꿎은 가리비와 피조개를 푹푹 찔러 보다가, 다 익었다고 또 한 번 건배를 했다. 물컹한 조개 즙이 입에 쫙쫙 쏟아졌다. 혀가 데도록 뜨겁고 약간 비린 것이 소주가 잘 넘어갔다.
재유와는 오랜만인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잊었다. 승대는 장도고 동기들 얘기를 하고 재유는 지상고 후배들 얘기를 했다. 지금은 그나마 사람 꼴 된 후배들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최종수는 이름값 하느라 얼마나 성격이 더럽고 까탈스러운지. 그리고 승대는 은근히 덧붙였다. 성준수는 안 그러냐? 걔도 성격 좋을 것 같은 상은 아니던데. 뭐, 준수도 쌍용기 전까지는 히스테리 쪼매 부리긴 했다. 솔직히 가끔은 내도 난감해질 만치. 재유 니가? 웃기는 놈이네 성준수도. 지만 입시 했나? 재유 너도 대학 가야 되긴 마찬가지였구만. 에이 그래도 그거는 준수가 그럴 만해서 그런 거다. 괜히 성질내고 그러는 애는 아이고.
승대는 재유가 누굴 나쁘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재유가 밉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게 승대였던 적이 있을까, 없을까.
“따지고 보면 승대 니 탓이제. 니가 서울만 안 갔어도 준수 금마 삔또 나갈 일도 없었제. 내도 마찬가지고. 니만 있었으면 그렇게 쌔빠지게 고생 안 해도 됐을낀데.”
재유는 승대를 원망했을까? 그런 적이 있어도 제법 괜찮을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재유는 순진한 표정을 하고 목을 뒤로 확 젖혔다. 투명한 술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짠, 또 잔을 맞부딪혀 왔다.
“야⋯⋯. 잘 마시네. 술고래네 잼민이. 술이 다 어디로 들어가노.”
“계속 먹으니까 먹을 만한데. 승대 니나 그만 무라. 얼굴은 시뻘게 가지고. 그러다가 훅 간다.”
말은 그렇게 해 놓고 둘이서 또 한 병을 비웠다. 조개가 지글지글 익고 머리카락에는 연탄과 바다 냄새가 배어 갔다. 시간이 늦어갈수록 술집은 왁자해지고 둘의 웃음소리도 따라서 점점 커졌다. 초록 병뚜껑을 가지고 하는 실없는 게임에만도 한 시간은 족히 열을 올릴 수 있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계속 즐거웠다. 그 다음엔 한 얘기를 또 했다. 지상고가 얼마나 형편없이 져 왔는지. 재유는 이제 그런 얘기를 웃으면서 했다. 정작 작년 쌍용기 대회에 대해서는 둘 다 별로 화제 삼지 않았다. 그보다는 쌍용기 직후에 승대가 국대로 출전한 아시안 게임 얘기를 했다. 재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들었다. 그러고서 얘깃거리는 시간축을 마구 널뛰며 중학생 때 재유가 받은 개인상으로 갔다가, 다음 달에 시작되는 대학생활로 갔다가, 요즘 재밌게 본 NBA 경기와 최종수의 미국 진출을 거쳐 다시 둘이 공유하는 기억으로 되돌아왔다. 지상고 일 학년 둘이 장도고를 거의 이길 뻔했을 때. 재유와 투맨게임으로 승대가 38점을 올린 대사건은 그 해 고교농구판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였다. 그것도 쌍용기 대회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진주알처럼 하얘지는 것 같았던 재유는 생긋 웃으며 드디어 홍조가 돌았다. 식당 안 탁자마다 김을 피워올려 주변이 뿌옇게 보였다.
“그때는 진짜 기분 째졌지. 햐, 아직도 엊그제 같다.”
나란히 그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머쥔 승대가 바로 적진으로 넘어가겠다고 했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궁금했다. 재유는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승대는 일부러 미소를 띠고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재유는 다가오지 않았다. 묻고 싶어 조급해졌다. 목이 바짝 말랐다. 결국 먼저 운을 띄웠다가도,
“진재유.”
“오냐.”
“⋯⋯.”
옆구리 찔러서 절 받아도 마냥 속 좋을 만큼 취하지는 못했다. 승대는 주머니를 주섬주섬 더듬었다. 세뱃돈은 아직 잘 있었다.
“뭔 말 하려고 이래 뜸 들이나?”
“아니, 됐다. 가자 이제.”
“뭐고? 서울 가더니 숫기가 다 죽었네. 고추 떼라, 승대.”
“뭐라카노?”
먼저 일어선 승대는 재유가 따라나오기 전에 계산을 마쳤다. 잘 먹었심더 고개를 숙이는 재유의 뒤통수를 장난스럽게 손바닥으로 푹 눌렀다. 내친 김에 괜히 헤드락도 걸었다. 이미 배가 목 끝까지 불렀지만 승대의 세뱃돈만 탕진하고 이대로 보내 주기는 손해 같았다.
“조개구이라니. 진짜 관광객 같았다.”
“글게. 이러다가 동백섬도 가긋네.”
“남포동 씨앗호떡도 묵고. 풀코스네 아주.”
씨앗호떡⋯⋯. 듣고 보니 단 게 몹시 당겼다. 차갑고 단 것. 뱃속에서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술기운에 끼얹어 속을 식힐 것. 식당을 나서니 캄캄하게 해가 떨어져 있었지만 편의점의 인공적인 네온사인 빛이 길 끝에 보였다. 승대는 재유의 의사도 묻지 않고 끌고 들어갔다. 재유는 바나나 단지우유 하나로 만족했는데, 승대는 그걸로는 턱도 없을 것 같았다. 승대가 칠성사이다 캔과 빵빠레 아이스크림을 집는 걸 보자마자 재유는 부르르 떨었다.
“춥지도 않나? 승대 치해서 머리가 돌아뿟네.”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했다. 술의 열기와 몽롱함이 남아서 뒤죽박죽 꿈결 같았다. 재유한테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져 승대는 바나나우유를 쪽쪽 마시며 앞서 걷는 재유를 홱 잡아당겼다. 놓쳐선 안 될 농구공 없이 타겟이 진재유뿐인 승대가 힘으로 찍어누르면 그렇게 재간이 화려한 재유도 당해내지 못했다. 재유가 저항해도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다음엔 무슨 장난을 칠까 하다가 승대는 재유의 코트를 팔 한 짝씩 뺏어입는 데 성공했다. “내한테도 잘 어울리나?” 물으니 재유가 눈을 흘기며 떽떽거렸다.
“등치도 산만한 게 뭘 춥다고!”
“방금은 안 춥냐고 걱정해 줬잖아?”
“벼룩의 간을 빼 무라 아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 승대는 큰 소리로 웃었다.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으니 재유가 불만스레 종알거리며 따라서 발을 재촉했다. 따라잡히지 않게 조금 더 빨리 걸으면 재유의 보폭도 넓어졌다. 주거니 받거니 속도를 높이다 보면 어느덧 뛰고 있었다. 둘은 밤이 완연하게 내려앉은 바닷가를 달려갔다.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고 신발창 밑이 젖었다. 광활한 물과 해안을 구분할 유일한 방법은 어느 쪽이 달빛에 반짝이는지 보는 거였다. 귓가에는 거센 파도가 몰아쳤는데 심장이 뿜어낸 피가 머리로 몰려오는 게 바닷물의 율동 위로 합쳐진 소리였다. 지상고 일학년 때 훈련의 대부분은 러닝이었다. 농구 실력이 모자라니 체력이라도 튼튼해야 한다고 달리기만 죽어라 했지.
그때도 뛰고 있으면 혼자만의 생각에 곧잘 빠졌다. 승대의 생각은 경삿길을 거스르지 못하는 물처럼 또다시 이 년 전으로 흘러갔다.
재유가 주던 뽈맛. 그게 그렇게 삼삼했지⋯⋯. 진재유가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착각하는 게 좋았는데.
재유를 두고 가면서 은연 중에 그런 자만심에 젖었다. 얜 나 없으면 못 살아남겠지. 우위에 서 있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지상고는 보란 듯이 장도고를 꺾었다. 승대가 있었을 때는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던 것이 승대가 떠나고 나니 완벽하게 성공했다. 재유는 서교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승대야 누워서 주익대 합격증을 받아냈지만 아무도, 승대 자신조차도 놀라지 않았다. 대학 자체도 간당간당하다 내지는 어림도 없다는 소리만 듣던 진재유가 당당하게 이루어 낸 성과야말로 관심과 열띤 축하를 받았다. 승대가 보기에도 그쪽이 더 값졌다. 승대 없이 맺은 결실이. 이 모든 상황이, 이 심정이 꼭⋯⋯.
승대는 자신의 생각이 어디에 이르렀는지 믿을 수 없었다.
꼭 실연당한 거 같네.
인정하고 나자 가슴 속이 홀가분해지는 동시에 밤바다처럼 어두워졌다. 내가 진잼민한테 실연을 당했네. 우습고 허탈했다. 재유는 맘속으로 내를 찬 적도 없을 텐데. 나한테 뽈 못 주게 되었다고 아쉬운 적도 없었을 테지. 성준수 금마랑 희희낙락하느라 내 같은 건 옆에 있었던 줄도 싹 잊어버리고⋯⋯. 처녀구신같이 생긴 놈이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홧김에 승대는 뛰던 그대로 물을 밟았다. 첨벙 튀어오른 바닷물이 외투천을 적셨다. 승대가 속도를 확 줄이는 바람에 미처 멈추지 못한 재유가 등에 쿵 부딪혔다. 그 풀에 떠밀리는 척 승대는 앞으로 넘어졌다. 얼얼한 찬물에 긴긴 갈증이 해소되는 듯이 황홀해졌다. 재유와 얽힌 몸이 물에 손과 발목까지 잠겨 있었다. 재유가 무섭게 추궁해 왔다.
“임승대 니 미친나? 얼어 죽고 잡구마.”
“왜? 재미만 있는데.”
승대는 물 쪽으로 조금 더 기어들어갔다. 재유도 홧홧한 술기운이 식는 건 기꺼웠는지 따라 들어왔다. 낮에 두 발로 점잖게 산책하다가 봤던 상어와 해파리 주의 표지판은 둘 다 새까맣게 잊었다. 손바닥이 굳건히 모래를 딛고 있었으므로 물살에 쓸려갈 거라는 겁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래는 단단한 지반이 아니라 흐르는 물질이라는 건 술에 취해 있으면 기억하기 어려운 축에 속하는 사실이었다. 파도가 밀려와 온몸에 철썩였다. 고요하면서도 시끄러웠다. 뱃속은 진정될 기미가 없이 계속 활활 탔다.
시꺼멓게 일렁이는 물 위에는 재유가 얼굴만 동동 떠 있었다.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실루엣이 뜨지 않은 달을 대신하듯이 둥그렜다. 불빛 현란한 해운대의 화려한 야경이 둘 쪽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재유의 얼굴 주변으로 윤슬이 오색찬란하게 빛났다. 둘러싼 어스름 속에서 재유의 표정만은 무정한지 유정한지 보이지 않았다.
이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젖은 옷이 척척 달라붙으며 휘감기는 게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승대는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물 속에서 홀딱 벌거숭이가 되어가고 있으려니 재유의 그림자 모양이 변하는 게 뭐라고 고함을 치는 것 같았는데, 파도에 묻혀 아무것도 안 들렸다. 취기는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승대는 정작 냉기에 청각이 마비되어 가는 것은 몰랐다. 오기와 억울함이 울컥 치받쳤다. 진재유가 말을 한다고? 그럼 나도 말할 수 있지. 나도 물어볼 수 있어. 불규칙한 맥박이 구석구석 닿지 못하는 몸 안이 온통 뜨거웠다. 승대는 물 속에서 열병 같은 질문을 연거푸 토해냈다. 입을 열 때마다 찬물이 한 움큼씩 쏟아져 들어오는 통에 대답을 알아들을 정신은 없었다. 그저 아까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낮에는 왜 재유가 조연인 줄 알았지? 남주 맞는 것 같은데?
“승대 니 와 숨을 이상하케 쉬노! 어어!”
승대는 언제 그렇게 깊이 들어갔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언제 넘어져서 떠밀려 갔는지 균형을 잃던 순간에도 몰랐다. 발이 닿지 않는 물 속에서 재유는 괴력으로 승대를 끌고 허우적거렸다. 커다란 몸 이곳저곳을 필사적으로 움켜잡으며 맨살이 뒤엉켰다. 무서운 악력이었다. 처음엔 머리끄덩이를 움켜쥐더니, 머리가 너무 짧았는지 다른 데를 마구 쥐었다 놓쳤다 반복했다. 짠물과 모래가 뒤엉켜 코와 입 안으로 퍼부어졌다. 캑캑 뱉어내는 것보다 밀려드는 속도가 빨랐다. 괴롭고 따갑고 허파의 세포 하나하나가 사포에 긁히는 것 같았다. 추위와 더위를 헷갈리던 감각들이 마음을 정했다.
승대는 일순간 한기에 뼛속이 섬뜩해졌다. 이렇게 질식하는구나, 깨달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온 친척이 승대의 머리맡에 모여 있었다. 알몸 대신 환자복이 입혀진 몸뚱이로 병상에 얌전히 뉘어져서. 그 틈에 재유도 있었다.
요령을 부려 피했던 외조부의 잔소리는 장장 사십 분의 호통으로 되돌아왔다. 에라이 정신 나간 놈. 진씨네 넷째 손자 아니었으면 할애비가 손자 상 치를 뻔했다. 새해 벽두부터 아주 집안 망신을 다 시키는구나. 에이 고얀 놈아.
함께 기행을 벌인 재유도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날 줄 알았더니, 외조부의 불호령은 승대만 정밀타격했다. 어떻게 와전됐는지 재유는 되레 승대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다. 온 집안 어른들이 우리 재유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앞다투어 물어보았다. 쟁반짜장이 날라져 왔을 때는 잠깐 둘만 남았다. 그래도 운동선수답게 병원 식판은 싹싹 비워냈지만 아직도 속에 물이 들어찬 듯이 뱃속이 불편해서 승대는 나무젓가락을 드는 시늉만 했다. 씩씩하게 군만두를 집어먹는 재유가 경탄스러웠다.
“재유 니는 어떻게 멀쩡하냐.”
“나도 링겔 한 방 맞았다.”
“쪼끄매서 한 방 갖고 충분했구만.”
재유는 열없이 주먹을 쥐고 승대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수면에 맺히는 상처럼 기억이 어슴푸레하게 아른거렸다.
“재유. 내가 어제 니한테 뭐라고 물어봤더라?”
재유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니 너무 멍청해서 다시는 말 안 해 준다. 이래 멍청한 놈인 줄 몰랐네.”
그렇게 해서 승대의 물음은 사장에 적고 파도에 쓸어 보낸 서한이 되어 버렸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것도 같았다. 재유의 대답을 못 들은 채로 두는 게. 진재유는 항상 승대가 모르는 걸 갖고 있었다. 응큼한 자식.
“옷은 또 왜 벗었노? 내는 진짜로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어떻게 된 건데?”
“⋯⋯그거는 영원히 알려고 하지 마라⋯⋯.”
재유는 고개를 돌렸다. 승대가 요리조리 집요하게 쳐다보는데도 통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왜 동공이 마구 흔들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재유의 목소리가 갑자기 한껏 은근하고 자상해졌다.
“그, 승대 니.”
“어.”
“아픈 데는 없나?”
“온몸이 삭신인데.”
“그러면은, 특별히 더 아픈 데는 없는 거지?”
승대는 코웃음을 쳤다. 재유는 조금 마음을 놓는 듯했다. 몸을 침대 발치에 기댄 재유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니 끌고 헤엄치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그게 개죽음이지 뭐냐.”
그리하여 승대는 재유가 진짜로 간밤에 자신을 구한 영웅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도 참 재유다웠다. 다 지게 생긴 경기에 임해서도 일행을 위험에서 구해내는 게 재유의 역할이었다. 왼쪽 팔이 몹시 욱신거렸다. 승대에게는 통이 좁은 환자복 소매를 힘겹게 걷으니 링거 바늘 위로 팔뚝이 푸르게 멍들어 있었다.
“내가 쫌 과격하게 끌고 올라와서 그렇다. 그래도 팔 한 짝 다친 게 양반인 줄 알어라.”
좀 자세히 말해 주면 좋으련만. 어떻게 과격하게 끌고 왔는지? 설마 인공호흡을 했다든지 그런 건 아닌가? 누구랑 부벼 본 적도 없는 입술인데⋯⋯. 하지만 그런 농담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재유의 표정은 어딘가 침울했다.
“내는 니 때문에 생고생은 다 하고 아버지 코트도 잃어버리고⋯⋯.”
이번에는 아주 깊고 서글픈 한숨이었다. 재유의 옷이 눈에 익었다.
“그거 내 옷 아니가?”
“이모께서 빌려주셨디.”
재유도 물 속에서 얼떨결에 승대를 따라 니트를 벗는 바람에 코트와 함께 바닷속으로 잃어버렸고, 나머지 옷은 빨고 승대 가족들에게 급히 얻어 입었다고 했다. 재유에게 두 사이즈는 너무 큰 흰색 나이키 티셔츠가 허수아비에게 입힌 것처럼 나풀거렸다. 재유를 보고 있으니 속에 무언가 차오르는 듯해 원래도 없었던 시장기가 점점 사라졌다.
반면에 계속 허기가 지는지 짜장면에 코를 박고 들이마시는 재유는 입가만 빼면 막 세수한 듯이 말갰다. 뺨이 버석하게 터 있었다. 바닷물에서 건져서 마른 그대로의 피부에서 소금기가 만져질 것 같았다. 또다시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승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 커서 어리둥절했는지 재유가 고개를 들었다.
“니도 배고파졌나?”
“아니.”
승대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재유.”
“와.”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참 나⋯⋯. 지금 새해 복 소리가 나오나? 니는 올해 복 없다. 평생 복 어제 다 땡겨 쓴 줄 알아라.”
“엉.”
“내 복까지 니가 다 썼다. 내는 아부지 옷도 잃어먹고. 아끼시는 건데. 억수로 되는 일이 읎네⋯⋯.”
“찾아다 줄게.”
“어?”
“다 먹었나? 가자, 재유.”
그거를 무슨 수로 찾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와 이라노! 재유가 한없이 타당한 반박을 내놓든 말든 승대는 억지를 부리며 손을 잡았다. 그러면 새거를 사 드리든지. 내가 더 좋은 걸로 한 벌 해 드리지. 하여튼 내가 딱 책임 진다. 사나이답게.
“나 때문에 이래 됐으니 내가 책임져야 하지 않긋나?”
승대는 책임을 지고 싶었다. 진재유의 신뢰와 의지에 어깨가 무겁고 싶었다. 재유의 에이스가 되어 기대에 부응하고 탄복과 찬사를 받고 싶었다, 꼭 이 년 전처럼. 그러니까 해변을 걷는 재유를 또 보고 싶어서 나서는 걸음은 아니다. 황홀하게 나부끼는 옷자락 없는 재유도 어제처럼 우수가 어려 보이는지 궁금해서는 아니다. 대낮 햇빛 아래선 파도가 포말을 콕콕 찍어 놓은 듯한 주근깨가 백모래처럼 빛나는지 알고 싶어서도 아니다.
손을 끌고 몰래 병실을 나서면 재유는 기막혀 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딸려왔다. 승대는 히죽히죽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솔직히 너도 재밌었구만. 뭘 아닌 척은. 이렇게 되자 손가락 사이로 떠내려간 걸로 단념하려던 답까지 되찾아 오겠다는 욕망이 불끈 치솟았다. 같은 질문을 두 번 물으면 천하의 진재유라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능수능란한 것 같으면서도 결국 솔직한 것만이 무기인 녀석이니까. 그 대답을 들려주는 재유의 목소리가 기대되어 심장이 부풀어오르고 또 부풀어올랐다.
그걸 말이라고 물어본 기가? 내도 승대 니 억수로 보고 싶었디.
+ 따로 백업하긴 너무 짧아서 여기 합쳐두는 재승재 조각글
잠언 24:13 (2024.4.11)
진재유를 놓고 다양한 상상을 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농구의 신에 맹세코 그중에 이것은 없었으므로, 승대는 이것 봐라 너 이렇게 야릇한 욕망을 품지 않았느냐고 눈앞에 증거를 들이미는 듯한 이 꿈이 억울하기 이를 데 없다. 승대의 상상이 너무도 흔해빠진 열아홉 남자애의 것이라 충격적으로 발칙한 치기조차 못 된다는 듯이 무심하게 재유는 라텍스 장갑을 끼는 중이다. 그 손놀림과 평온한 표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으니 알리바이조차 없어서 더 환장할 노릇이다. 재유는 자기 유니폼처럼 푸르른 원피스를 입었는데 소매 끝자락과 목에는 정교한 레이스가 둘러졌고, 가슴엔 오간자 리본이 달려 승대의 얼굴을 사정없이 간질거리며 열이 쏠리게 만들었다.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마이클 조던이든 아무나 붙잡고 또 맹세하건대 승대는 메이드카페 근처에도 가 보지 않았다.
재유는 젖병 무는 법을 모르는 신생아를 어르듯 승대의 입술을 부드럽게 쥐고 벌렸다. 농구공보다 직경이 큰 은숟가락으로 승대의 입에 잘 흐르지도 않을 만큼 농밀한 꿀을 부어넣는데, 너무 달아 목이 타들어갈 것 같아서 눈물이 고였다. 목구멍이 숨 들이쉴 공간도 남겨놓지 않고 꽉 메어서 승대는 목소리도 못 내고 재유의 머리띠에 달린 앙증맞은 방울을 잡아당겼다. 그러면 재유는 승대의 머리통을 다정히 감싸안고 요람 흔들듯 흔들어 달랠 뿐. 양손으로도 다 못 세는 수의 도련님들을 지켜봐 온 유모처럼 적당히 세파에 닳아 지쳐 있고, 그중에 어떤 도련님이 난 유모랑 결혼하겠다고 선서한들 재유의 왕자님은 못 된다는 듯이 단호하게, 재유는 일정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옳지, 착하다 승대. 옳지 잘하네. 옳지 옳지. 승대가 아무리 젖먹던 힘까지 다해 삼켜도 결국은 입에서 꿀이 넘쳐 흘러내린다. 재유는 멈춰 주지 않는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재유는 멈춰 주지...
“미친놈.”
똑똑히 단언하는 목소리에 눈을 떠 마주한 것은 뜻밖에도 재유의 서늘한 미소가 아니라 싸늘한 경멸이었다. 러닝을 나갈 복장을 갖춘 룸메이트가 멀찌감치 문가에 서 있었다. 승대와 털끝 하나만큼도 가까워지는 걸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떨어져 있던 최종수는 마치 구두창에 붙은 껌 보듯이 승대를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왜 뚱딴지 같은 시비를 거냐고 승대가 묻기도 전에 휙 돌아서 사라졌다. 곧 복도 끝에서 두런두런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이규와 최종수의 사이 좋은 목소리. 보나마나 최종수는 그 까탈스러운 성미와 불만 가득한 눈초리로 꼬투리를 잡아다가 승대를 욕하고 있는 것이다. 창밖에 야속할 만큼 햇빛 좋은 아침부터 미친놈 소리 들을 일이 뭐가 있냐고. 방금 전까지 얌전하게 꿈만 꾸고 있었구만...
꿈. 그제야 승대는 방 안에 감도는 냄새로 단꿈의 여운 가득한 흔적을 알아챈다. 찬물 맞은 듯 잠기운과 재유의 잔상이 단박에 달아났다. 아 XX. 들켜도 하필. 아오... 미친놈.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신음한다. 누가 뒷목이라도 쳐 줘서 영영 기절하고 싶다고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졸음은 굴 속으로 돌아가는 토끼처럼 도망가고 재유의 잔상만이 야금야금 스멀스멀 되돌아오는 것도,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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