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광선

혹은 초록에 대하여

유진 by bamn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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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그때였구나 싶다.

유진은 낮의 볕 아래에서 붉게 타는 갈색 머리칼 아래, 주근깨 위로 발그레한 뺨과 깊은 초록을 보며 떠올린다. 얼굴에 비해 커보이는 안경. 그 너머에 가린채로도, 네 눈은 흐린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떠올리는 것은 녹색 눈동자에 당황이 스치던 때. 지금으로부터 그리 먼 옛날도 아닌 과거의 일이다. 낮의 분수대 근처에 앉아서 상급생의 교복이 지나치면 흘끔거리던 네 모습을 아직 기억하는 것은 그런 이유. 그때는 갓 입학한 신입생이라 상급생에게 눈길이 가는 건가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래, 찾는 사람이 있으니 가까운 인기척도 모르고 골몰했구나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 스쳐간 시간은 다시 조립될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그러니까…, 제 무관심에 의해 의미가 바르게 놓일 기회를 놓쳤으니.

시간을 조금 되돌리면, 여기.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다. 더 정확하게는 소중한 자기 것을 빼앗긴.

그러나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 하나에 찾는 일을 중단하고, 부탁에 가까운 제안을 들으면 공들인 관찰을 선뜻 나누는 손을 가진.

네가 제 이름을 모르는 저조차 특징을 찾을 정도로 눈여기고 이름을 외운 까닭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바람이었지.

그 무렵의, 굳이 꺼내지 않는 말의 기척을 알고도, 드러내지 않는 의도를 배려하듯 침묵하는 너를 알고 나는, 그 모습을 '너를 기억하게 하는 특징'으로 삼았지만. 앞선 맥락을 고려하면 그건 예감보다 더욱 강인한 배려에 가까웠다. 네가 너의 어려움을 놓아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선함을 발휘하기를 택했다면.

너는 그런 것은 강함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거나, 혹은 사실 네게는 그런 게 없다고 말할 것도 같지만. 안타깝게도, 해석은 타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법이라, 이 순간의 너는 ‘유진이 읽은 클로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때. 작은 소문은 바람을 더 타고 흘러가지 않도록, 그러나 제가 '혼자 모르는' 이가 되지 않도록 속삭이는 목소리. 어쩌면 그 무렵의 너라면, 속으로 소문의 주인공을 향해 사과라도 건네지 않았을까. 늦은 추측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적인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는 거지.

정보를 나누자고 너를 부르기는 했지만 실은 꽤나 많은, 왜곡되지 않으며 섬세한 관찰에 입각한 판단이 더해진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쪽이었다는 것이나.

세심함과 상냥함과 판단력은 하나로 엮여, 서로가 있을 때 더욱 성장하며 강한 힘을 발휘하는 모양이라는 것도.

네 '친구'의 말에서 제가 들은 말에 감상을 전하고, 그리고 마주하는 선명한 녹색 광선을 보며 이해한다. 네 눈에는 허상에서 진실을, 그릇됨에서 올바름을 끌어올리는 힘이 있다. 혹은 그것들을 이미 가진 네 눈을 보면, 자연히 알아차리게 되는지도.

선과 올바름과 냉철. 그 모든 것 중 하나가 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불길한 의문을 갖는 저를 너는 이해하지는 못할까.

그러면 이런 물음은 어때? 그 모두를 이미 가진 누군가가 균형을 유지하는 채로 행동한다면,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만일 누군가 제3의 인물이 너를 우유부단하다고 한다면, 그 말에는 간단히 부동의를 표할 거야. 너는 말하자면, 녹색 조명이 비칠 때 대상과 현상이 변화를 겪을 것을 염려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니 그동안은 어쩌면 올바름과 냉철을 양 손에 쥐고도, 배려에 기반한 주저함으로 걸음을 늦춘 것은 아니었는지.

그 머뭇거림까지 포함하여 네가 되지는 않는지.

…물론 지금은 자신도, 그러니까 유진 스스로도 알지 못하지만 세상은, 기울어진 올바름도, 잘못 쓰인 배려도, 차디찬 냉철도 있는 법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그래서. 자신은 ‘틀리지 않은’ 순간에 나아가는 네가 궁금해지고 만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은 어느 물음도 건넬 때가 아니라는 예감으로. 어쩐지 스스로 이미 가진 용기를 기억해내고도, 제게 고마워하는 너를 가만히 보고. 여전히, 상대가 물건을 돌려줄 마음을 먹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카메라를 돌려받지 못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니까. 네가 행동하기로 마음먹은 순간을, 네가 어떻게 건너가느냐보다 더 중요할 것은 없지 않을까.

라고, 아마 책에 나오는 현자들이라면 생각할 거야. 나는 그저 너와 나누는 대화가 즐거웠을 뿐이지만.

그렇지만 카메라는, 진짜 안 돌려주면 사건이 되니까, 그럼 선생님께라도 가봐야하나 생각하고. 상급생이 문제를 일으킬 경우를 대비라도 하려는 듯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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