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히카] 취중진담
트친님 리퀘스트
FF14 에스티니앙 HL 연인드림 연성입니다.
드림에 예민하신 분들은 뒤로가기 꾸욱!
트친(ㅂㅊ)님 리퀘스트로 작업했습니다.
공백 미포함 2500자 정도 되는 짧은 글입니다.
술에 취해서 드림주에게 고백하는 에스티니앙
취중진담
copyright by. Mer
“I, 좋아한다.”
결혼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네 곁에서 파트너 관계 그 이상의 관계가 되면 안 되겠냐? 해질녘 노을이 지는 바닷가에서 받은 고백. I는 침묵했다. 왜? 당신이 왜……?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기 때문이리라. 솔직히 그간 등의 상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도, 죄책감을 갖지도 말라고 말해왔던 그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간 에스티니앙이 해온 말들에 상처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 될 터였다. 이슈가르드에서 만났을 때 저에게 그토록 모진 말들은 다 해놓고 이제 와서는 좋아한다 말하는 그를 I는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왜? 라는 감정이 더 앞서기만 할 뿐, 분명 고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설레는 기분은 단 한 점도 느낄 수 없었다.
“……미안해요. 오늘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그래서 찼다. 그가 싫은 것은 아니었고, 호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저가 아무리 둔하다고 할지라도 그와 썸을 타고 있었다는 것 정도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응어리가 아직 풀리지 않아서, 그의 고백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녀는 그의 고백을 뻥 차버린 것이었다. 에스티니앙은 I의 답변을 듣고 크게 상심하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쿨하게 포기하는 듯 구는 태도가 그녀에게 더더욱 불신만을 안겨주는 듯 했다. 저를 좋아한다면서 퍽이나 쿨하게 물러난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이상한 파트너. 그날의 고백은 딱 그 정도의 감상으로만 남았다. 그랬을 터였다.
*
“……아주 고주망태네요.”
라자한에서 우연하게 마주친 에스티니앙은 드물게도 술에 절어있었다. 못 본 척하고 지나가려 했으나, 어떻게든 좀 해보라고 말하는 메릴에 의해, 그녀는 현재 에스티니앙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어쩌다가 합석을 하게 된 신세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합석한 줄도 모르고 엎어져있던 에스티니앙이 제 앞의 인기척을 눈치 채고 고개를 들었다. 그 남자가 그토록 놀란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I는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I?”
“그래요. 술에 취해 있어도 당신 파트너는 알아보는 모양이네요.”
어쩌다가 술에 절어있을 정도로 그렇게 마신 거에요? I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딴소리였다. 내가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해도 너는 안 믿겠지? 에? 안 믿잖아, 파트너. 술에 그토록 절어있는데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발음이 꼬이지 않는 걸 대단하다고 칭찬해줘야 할지, 아니면 그 날의 그 고백이 정말로 진심으로 한 고백이었는지 되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면, 답을 듣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는지 에스티니앙이 이어서 주절거린다.
“나는……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더는,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아니더라. 네가 없어지는 건 무섭더라. 울티마 툴레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가던 널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가 무슨 심정이었는지 아냐고, 정말로 눈을 뜨지 못하고 그대로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느냐고. 그리 주절거리는 에스티니앙의 목소리는, 그동안 취할 정도로 마셔댄 술 때문인지 복받치는 감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반쯤 떨리고 있었다. 분명 아까 처음 마주하고 저를 부를 때만 해도 그렇게 떨리던 목소리는 아니었으니 아마 후자이리라. I는 조용히 침묵한 채 절절하게 이어지는 그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사실 처음 고백하고 차였을 때 네가 자신의 고백을 믿지 않는 것 같아서, 나중에 제대로 고백하던지 아님 그저 곁에서 바라보는 걸로 만족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부러 쿨한 척을 했었다는 말을 할 때에는 I의 입가가 웃음기로 경련하고 있었지만, 잔뜩 취해서 자기 진심을 마구잡이로 털어놓기 시작한 이는 알지 못했다. 한참을 그 취해서 늘어놓는 말을 듣던 I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에스티니앙.”
* * *
“……미친 놈.”
다음날 술에서 깬 에스티니앙은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자조했다. 그렇게 취할 정도로 마셔댄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잔뜩 취해서 I에게 온갖 말을 다 해댔다는 것이었지만. 그래 정말 온갖 말을 다 해댔다. 오죽하면 술에 절어서 이미 차였던 고백을 또 했으니 그것이 문제였다. 기왕 고백을 다시 할 거였다면 제대로 된 곳에서 좀 더 제대로 고백할 생각이었는데……. 그는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리며 한숨을 쉴 뿐이었다. 필름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끊어지지 않은 쪽이 차라리 더 다행일 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의 취해서 튀어나온 진심 뒤에 I가 했던 말은 모조리 깡그리 까먹었을 테니까.
“……해봐요.”
“……뭐?”
“해보자고요, 연애.”
“I?”
“네.”
“진짜로?”
“연애하자고 구구절절 고백한 거 아니었어요?”
“아니, 맞는데…….”
“그러니까 해보자고요. 일어나서 까먹지 말아요. 까먹었다면 없던 일이 될 테니까.”
그래. 까먹었다면 없던 일로 치부하겠다던 I의 말대로 까먹었다면, 그녀가 제 고백을 받아줬다는 사실이 완전히 없던 일이 될 뻔 했지 않은가. 어제는 어떻게 쉬러 들어갔는지 그 뒤의 기억은 애매모호했으나 중요한 것은 다 기억하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단지 술에 절어서 그리 고백해버린 사실은 앞으로도 그의 흑역사가 되어버릴 테지만……. 그렇게 한숨과 함께 주막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궁상을 떨고 있노라면 탁, 소리와 함께 물잔이 내려지며 누군가가 앞에 마주 앉는 소리가 들린다.
“어제 일은 기억해요, 에스티니앙?”
I였다. 어쩐지 제법 즐거운 기색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한순간 울컥해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할 뻔 했던 에스티니앙은, 답지않게 고개를 푹 숙이며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없던 일로 치부하지 않아도 되어서.”
“……넌 술 먹고 한 고백이 그렇게도 좋냐…….”
“에스티니앙의 진심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으니 좋죠.”
술이라도 들어가야 당신은 파트너에게 본심을 제대로 털어놓나 보네요? 푸슬푸슬 웃는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 묻어났다. 그녀 나름의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리라. 에스티니앙은 피식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다음번에 제대로 고백하겠다고 그리 다짐하며 그는 손을 들어 해장을 위한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이제 좀 에스티니앙답네요.”
사실 그 때 차이고 나서 너무 쿨하게 물러나길래 진심이 아닌 줄 알았는데 쿨한 척 한 거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어찌나 답지 않아서 웃기던지……. 얼른 먹고 일어나요, 파트너. 같이 갈 곳이 있으니까. 어디를? 임무지에 가려는 것일 뿐이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말죠? 난 또, 데이트라도 하러 가자는 줄 알았네. 에스티니앙! 귀 열려있다. 에스티니앙은 즐겁게 웃으며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흑역사가 남았지만, 숙취는 남지 않은 날. 어쩐지 하늘이 맑게만 느껴지는 날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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