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운명 (2019.01.31)

운명의 신과 신의 후계 / 단편

운명(運命 / 명사)

1. 앞으로의 존망이나 생사에 관한 처지

2.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도 생각되는 필연적이고도 초인간적인 힘.
명운(命運), 숙명(宿命)

 운명의 신. 인간들의 운명을 관장하는, 그들의 인연이라는 실타래를 묶어 필연을 만드는 직책. 그들은 인간의 탄생과 함께 그 실타래를 짜며 그 실타래를 엮어 운명을 짜올린다. 내가 수학(受學)할 무렵 읽었던 가장 인상 깊은 글귀였다. 가장 처음 시야에 들어왔고, 가장 나중에 뇌리에 남아 결국 신의 밑에서 후계자로 발탁당하기까지의 시간을 인내했던 이유의 대부분을 저 글귀가 차지한다.

 이유는 별달리 없었다. 그저 저 밑의 인간들이 우리의 기준으로는 고작 실 하나에 묶여 그들의 일생을 좌지우지할 선택권을 빼았긴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다. 인간의 운명이 우리로 인해 정해질 수 있다는, 확실한 우위를 가지도록 하는 직책이 운명의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신임을 그 자리로 확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택한 자리였을 뿐이다. 이 또한, 신으로 살아온 자 된 도리라고 생각하며, 가련한 인간들에게 베푸는 자비라고 생각해 최대한 알맞은 짝을 찾아주겠다 생각했다.

 그 생각 하나로 인간들의 생태에 관한 학문을, 인간의 실타래를 짜는 방법을, 인연의 종류를 가려내는 방법을 배웠다. 태어나는 인간의 수 만큼의 실타래를 짜 올리고, 신이 짜내린 운명의 형태와 그 문양에 대해 기록하고 재단하는 나날들이 쳇바퀴와 같이 흘러갔다. 같이 수학했던 동기들은 반복된 업무에 질려, 혹은 자신의 이상과 다른 현실에 질려 하나 둘 이 길을 걷기를 포기했고, 마침내 같은 시간 동안 수학한 동기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나는 후계로 발탁되었다.

 그 날은 선연했다. 저 멀리에서 의복을 대충 걸쳐입은 직속 보좌가 손을 휘적이며 걸어와, 후계로 발탁된 것을 축하한다고 웃으며,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리며 전했더랬다. 따라오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서는 그를 따라서, 드디어 목표에 근접했다는 흥분을 살며시 말아쥔 손 아래로 숨겨두고는 짐짓 무뚝뚝하게 보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진정한 신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걸음마다 기대감이 보이지 않게 뭉쳤다 흩어졌다. 보좌가 헐렁하게 입고 다니니, 신께서도 헐렁한 차림새로 계실 수도 있겠지. 암, 위에서 내려다보시는 분이니 굳이 허례허식에 신경쓰시지 않을 수도 있어. 아니면 위압감을 드러내는 복장과 표정을 하시고서는 만인을 내려다보는 듯 한 자세로 계실 수도 있을거야. 그것도 아니면 무료하게 수많은 베틀을 돌리고 계실까? 무슨 생각을 하실까, 그들이 하찮다는 생각? 귀찮다는 생각? 운명의 베를 짜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었고, 어린 날의 치기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다만, 수많은 학도가 배움을 위해 찾아올 때도 모습을 비추시지 않고, 수많은 학도가 떠나갈 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니, 그 만큼 고고한 존재이시겠지. 그런 막연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두둥실 떠나가는 구름처럼 크게 부풀어올랐지만, 지금 와서는 보좌관께 그랬었잖니? 하는 놀림을 듣는다면 지상으로 줄 없이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기억이다. 기억을 떠올려 타래를 세게 쥘 때 마다 꾸지람을 듣기는 하지만, 신께서는 그런 모습조차도 귀엽게 여기시는 듯 하다. 정체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는 방법이라나 뭐라나, 아직은 알기 힘든 말을 해 주셨지만.

 가벼운 발걸음 뒤 기대감을 실은 발걸음이 타박타박 따라가는 소리를 잠자코 들으시며, 흥겨이 어깨를 들썩이시며 걸어가던 그 날의 보좌관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처음 수만개의 베틀에 둘러쌓여, 단아하고 움직이기 용이한 차림으로 서 계시던 신을 뵙고서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던 앳됨은 어찌 비쳤을까. 신께서는 내가 상상한 모습에 전혀 부합하지 않은 모습을 하시고서는, 그 몸짓에 총기를 담으시고 눈에 현명함을 담으셔, 말 하나하나를 신중히 골라 하시는 신께서는. 전능과는 멀어 보이셨다. 전능과는 멀리 떨어지신 모습으로 굴러서 문 밖으로 탈출을 꾀하는 실타래를 달래시고, 어지러이 놓여있는 타래들을 지켜보시고, 베틀을 움직이시고, 베틀 위에서 실들이 그려내는 문양을 주의 깊게 살피셨다. 그 모습은 전능하다기보다는 마치, 관망하는 듯한. 선택을 독려하는 듯한 수동적인 모습이어서 물었었다.

 "신께서는 전능하시지 않습니까? 어째서 타래를 손에쥐고 운명을 자아내는 대신 타래가 스스로 베를 짜는 것을 두고 보시는 겁니까?"

 앳된 치기어림을 치기로 여기지 않고 친절히 가능성을 짚어주신 신께서는 웃으며 이리 답했었다.

 "그 누가 타자(他者)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달가이 여기겠느냐? 그 누가 타자가 바라는 대로 곧이 움직여주겠느냐. 우리에게는 타래로 간소화되었지만, 이 역시 자의식이 있는 것을. 굳이 틀에 넣지 않아도 괜찮지. 그렇지 않느냐, 아가?"

 살풋 시선을 마주하시고는 답과 함께 엉킨 실 위로 넘어져 바동거리는 실타래에 작은 힘을 가한 신께서는 역으로 질문을 던지셨다.

 "앳된 내 후계야, 운명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인간에게 평생을 함께할 반려(伴侶)를 찾아주는 것이지요. 그들은 반려를 찾기 위해 살아가고, 찾은 후에 가정을 꾸리니 말입니다."

 "그럼, 후계야. 인간의 반려는 몇이라 생각하느냐?"

 "당연히 하나, 아닙니까? 타래를 얽어 인연(因緣)을 일생토록 이어가는 것이 반려이고, 이를 돈독히 하고 싶어 치루는 결혼이라는 의식 역시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똑똑하구나, 열심히 수학한 듯 해. 그러나 후계야, 이 세상에는 글로 남지 않을 것들이 수없이 많단다. 예를 들어보자꾸나. 운명의 베는 몇 개의 타래로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느냐?"

 "당연히 두..."

 당시에는 저 질문들이 하찮다 여겼기 때문에, 운명의 베는 반려 하나와만 짜이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슬쩍 짜증을 느끼며 대답을 하려 했다. 대답이 전부 이루어지기 전에 예를 갖춰 바닥으로 조아린 머리를 들어 주변을 자세히 바라본 것은, 지금도 잘 했다고 생각하는 몇 안되는 앳되었던 시절의 일들 중 하나이다. 

 방안을 가득 메워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베틀에는 복수의 실타래들이 엉겨붙어 있었다. 우습게도 그제야 떠올렸던 것 같다. 운명은 두 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두 가지 재료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겠느냐, 후계야? 운명이란 서적에 기록된 대로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란다. 그저 그리 말하는 것이, 그리 전해주는 것이 가장 빠르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기록된 것이지."

 "......"

 "이제 조금 감이 오느냐? 왜 굳이 운명을 관장(管掌)하는 신이 필요한 것인지. 왜 우리가 스스로 타래를 움직이고, 운명을 짜올리지 않는지."

 사뿐히, 바닥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타래들을 밟지 않으려 조심하면서도 우아하게,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시는 신께서는 얼굴에 자애만을 띄고 계셨다. 문 앞에 반쯤 허리를 들고 고개를 반쯤 들어올린,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앳된 후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신께서는 귀엽다는 말을 하실 뿐이었다. 두 손으로 볼을 슬쩍 뭉개었다 떼어내신 채로, 황망했던 앳된 후계와 시야의 높이를 맞추시고는, 그저, 물어보셨다.

 "내가 타래를 움직이지 않음에도 여기에 있는 이유를 혹여 짐작할 수 있겠느냐?"

 "...전, 혀... 모르겠습니다, 신이시여."

 "그러냐, 실망하지 않았으니 걱정 말고!"

 자칫하면 경망스럽게 들릴 수 있는 웃음소리를 내뱉으신 신은 두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시고서 작은 단서 하나를 던져주셨다.

 "운명은 마냥 매끄럽지 않지. 그렇지 않느냐?"

 멍한 머릿속에서 본능적으로 끄집어 낸 것은 중간중간, 문양이 흐트러져 엉켜있는 부분이 있는 운명이었다. 가끔은 문양이 흐트러지기도, 가끔은 흐트러지고 엉켜있기도, 가끔은 아예 큰 구멍이 나 있는 운명은 요주의 기록대상이었다. 대부분은 제대로 마무리가 지어졌지만, 대부분은 끝부분까지도 마무리가 좋지 못했던 운명. 그렇다면,

 "매끄러이 만들기 위해, 계시는 겁니까?"

 "비슷했다! 똘똘하구나, 후계야. 정확히는 매끄러이 만들지 말지를 정하기 위해 있는 것이란다. 기실, 매끄럽지 않은 운명 역시 그 결과를 가지기까지의 과정이 수두룩하니 말이다."

 "하지만, 신이시여. 운명이 여럿이라면 매끄럽지 않아야 하는데도 매끄러이 나타나는 운명은 어찌합니까?"

 "하나를 가르쳤더니, 벌써 다른 것까지 생각하는 것이냐? 그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단다. 흐트러트리는 것은 내가 관장하는 부분이 아니기도 하고... 그나마 위안삼을 것은 사후의 심판체계로 넘어간다는 것이지. 목도하지 못했느냐, 후계야?"

 "그, 가끔 방문하시는 차사님들 말씀이십니까? 유난히 대비되는 운명들을 빌려가시는."

 "정답이란다. 후계 삼을 만 하다고 보좌관이 말할 만 하는구나! 기초는 대강 아는 것 같으니, 잘 부탁한단다."

 크게 미소지으시며 두 손으로 앳된 얼굴을 끌어당겨 이마를 맞대고는 한 차례 부빈 신께서는 자세를 바로하셔 나를 이끄셨다. 타래가 자유로이 놓여있는 방 안으로, 베틀이 각자의 속도로 철컥거리는 소리 속으로, 갖가지 종류의 운명이 짜올려지는 곳으로. 그 때 직감했다. 지금까지 수학한 것과는 다른 것들을 두 팔로 껴안지 못할 만큼 배우겠구나. 두 팔로 껴안은 것이 하나라도 굴러떨어지기 전에 그 배움을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 운명이라면, 이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전능하면서도 전능과는 떨어진 일이 되겠구나. 이 역시 한 편으로는-

 "운명이라 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요."

 마지막 물음에 신께서는 웃으셨던가, 대답을 해 주셨던가? 거기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뒤로 수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태 눈여겨보지 않았던 실타래의 재질과, 종류와, 그 색깔들과, 여러 운명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같은 실타래와, 오직 하나의 운명에만 끝까지 붙어있던 실타래와, 못마땅한 매끄러움과 사랑스러운 굴곡까지도 전부, 운명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운명의 신. 인간들의 운명을 관장하는, 그들의 인연이라는 실타래를 묶어 필연을 만드는 직책. 첫 필연이 만들어낸 결과에 일희일비하며, 고작 작은 부추김만으로 상황을 타개하는 그들에게 부추김이 작지 않았음을 알고 안도하며, 가끔은 괘씸한 운명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여러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동안 운명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배워가는 직책. 나는 현재, 이 막중함을 넘겨받을 후계이다. 이 다짐이 나를 이 자리에 엮어, 묶어, 짜올렸다.

+) 덤, 이후의 둘

 "후계야, 후계야?"

 "네, 신이시여."

 "오늘은 그 쪽에서 별 일 없었나 보구나. 어제 매끄러이 짜여가는 운명을 보고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더니!"

 "별 일 없었다기 보다... 어제까지 지켜봤던 마땅찮은 매끄러운 운명이 드디어 엉켜버릴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는 중입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후계라고 부르실겁니까, 신이시여?"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느냐, 처음에는 뭐든지 홀로 할 수 있다고 그리 당당히 말하더니?"

 "앳된 치기는 앳된 치기인 것으로 넘겨주시는 건 언제부터 해 주실 생각이십니까."

 "굽힐 줄도 알게 되었구나. 이 스승은 감격했단다..."

 "거짓울음은 그만둬주시겠... 잠시만요, 신이시여. 설마 진심으로 우시는...?!"

 "아이고, 보좌야... 우리 후계가 이렇게나 컸단다..."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발 밑으로 명주실타래가 굴러가니 조심하시길, 신이이여."

 "... 밟은 것 같다만."

 "......"

 "농이다, 그리 심각한 얼굴 하지 말거라."

 "농도 정도껏 하시지요, 신이시여. 방금 타래를 수습하기 위한 방법이 뇌리에 전부 스쳐지나갔습니다만."

 "열심히 수학했다는 증거지 않겠느냐!"

 말없이 문가를 굴러다니는 명주실타래를 구슬려 방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문을 열어 크게 보좌관님을 소리쳐 불렀다. 신께서 타래를 밟아 훼손시켰다고. 물론 농이었지만, 얼굴에서 색이 빠져나가는 신께는 아주 적절한 보복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는 발걸음을 재게 놀려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후계야! 너무하지 않느냐!"

 "운명은 약간 굴곡진 편이 좋다고 여드레 전 제게 말씀해 주신 것은 신이십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저없는 목소리로 답해드린 후에 저 멀리서 달려오는 보좌관께 손짓해 신께서 저기 계심을 알려드리고는 신속히 그 자리를 떴다. 마침 아까의 명주실타래가 신께서 계신 곳 근처에서 기웃거리고 있었으니, 충분하다고 끄덕이며. 대체 언제쯤 이름을 불러주실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의 일은 치기로 넘겨주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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