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칙'의 시대

균열 공략 100주년 기념행사 - 1

[아르마 코르니스] 알마라트

11월 30일, 100년 전까지는 평범하다면 평범했던 그 날짜는 이제 그 어느 날보다 특별한 날이 되었다. 첫 균열이 생긴 날, ‘법칙’이 생긴 날, 첫 각성자가 생긴 날. 세상이 격변한 날이었다.

사람들에게 공포로 각인될 것이라 여겼던 그 날은 일주일 후, 첫 균열이 공략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 날로 기억되었다. 인류에게 새로운 발판이 생긴 날, 안전하지는 않아도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열어준 날, 신인류가 탄생한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 날을 기념하며, 중립국에서는 매년 11월 30일부터 일주일 간 균열 공략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온갖 관광객들이 중립국으로 모여드는 날이자, 합법적으로 모든 사람이 중립국에서 숙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였다. 당연히 좁은 중립국 내 숙박 시설은 물론이요, 주변 국가의 숙박 시설까지 몇 달, 몇 년 전부터 빼곡히 들어차 있는 날이다.

“그러니까, 이게 젊은이들만 신경쓸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날, 중앙 본부의 회의실은 꼭두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노인이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책상 뒤편에 앉아있는 통역가들의 손과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 말을 건네 받는 각국 지부의 대표들은 긴 회의용 책상에 앉아 똥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나같이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온 얼굴들이었다. 새벽 2시부터  5시간째 이어지고 있는, 밤샘 회의는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기에 좋았다.

“하지만 협회장님, 아무리 그래도 오늘이 행사 당일인데 이제와서 바꾸기는… .”

“아, 그거 하나 바꾸는 게 뭐 어렵다고. 내가 뭐, 대단한 거 부탁했나? 다 자네들 능력으로 처리할 수 있는 범위 아닌가!”

협회장의 말이 이어질 수록, 대표들의 눈밑이 더 어두워져 갔다. 평소 유연하고 현명한 대처들로 유명한 협회장의 모습은 기념 행사때만 되면 자취를 감췄다. 행사에 유난히 집착하는 협회장은 이번에도 행사 시작 당일 새벽에 개최식 순서를 바꾸겠다는 둥, 아레나 개막식 초대 가수를 바꾸겠다는 둥, 혁신적인 개소리만 5시간 째였다. 각국 대표들은 슬슬 협회장이고 뭐고 멱살을 잡고 싶었다.

“협회장님, 이제 준비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협회장의 뒤에 조용히 시계를 들여다 보던 비서가 입을 열었다. 개최식은 10시에 시작이었다. 기본적인 준비는 다 마쳤지만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았다. 협회장은 크흠, 못마땅한 헛기침을 한번 내뱉고 다시 책상을 둘러보았다.

“어찌됐든, 나는 그리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겠네. 2시간 뒤에 다시 보지.”

등이 꼿꼿한 노인이 긴 백발을 흩날리며 회의장을 나갔다. 회의장의 문이 닫히자마자 대표들 사이에서는 무거운 한숨만이 터져나왔다.

그 사이에서 한숨을 내쉬던 아르마 코르니스는 미간을 짚었다. 중립국 생활 일주일 째, 행사가 끝나기까지는 일주일. 그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아르마는 여기에 오느니 차라리 1급 균열을 혼자 닫는 게 낫겠다고, 4년동안 한 생각을 또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균열 공략 기념 행사’는 국제적 협회에서 개최하는 행사인 만큼 각국에서 보낸 협회원들이 모여서 진행했다. 지부의 상황에 따라 하루씩 다른 사람들을 보낼 때도 있었고, 한번 선발된 사람이 행사 준비 기간 내내 머무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충당된 인원은 주로 중립국 내에 배치되어 치안 유지와 경호를 맡았다. 종종 행사 기간 내에 균열이 터지면, 전투력이 약한 중앙 지부 헌터들을 대신해 균열 공략도 맡았다.

협회원들뿐만 아니라 지부장들도 호출되었는데, 자율적으로 선발할 수 있는 협회원들과 달리 지부장들은 필수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예외없이 행사 시작 일주일 전부터 행사를 진행하는 일주일 내내, 총 2주일을 중립국에 머무르며 각종 서류 작업부터 경호, 치안유지, 감시 임무까지 돌아가며 맡았다. 하지만 이 제도에는 중대한 허점이 있었으니, 사유서를 제출하면 대리자를 출석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르마가 근 1주째 중앙 본부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 이유였다. 미국 지부장이 아르마를 미국 지부장 대리로 출석시켰기 때문에.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일은 보통이 아니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부터 자잘하게 신경써야 할 것까지, 하루에 할 일도 산더미였다. 하지만 미국 지부장은 행사를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올해도 능력이 뛰어난 부하를 대신 보내 버렸다. 이걸로 4년 째였다.

덕분에 아르마는 이 행사가 어떤 순서로 굴러가는지, 어디에 어떤 가게가 있는지는 빠삭해도 그것들이 어떻게 생겼었는지는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자고로 행사 준비 위원이란 서류의 산에 파묻히거나, 통신실에서 온갖 아수라장을 보고 받거나, 헌터들 싸움 말리러 달려가거나, 셋 중의 하나밖에 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 개판인 상황들 속에서 관광은 당연히 사치였다.


“첫 균열 발생 및 공략으로부터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우리 인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고, 

이제는 균열이 일어났던 볼모지에도 화려한 문명을 꽃 피웠습니다.

그 문명의 증거가 되는 이 땅에서, 바로 오늘을 기념하는 축제의 시작을, 알립니다!”


쓸데 없이 장황한 말의 마지막 음절과 동시에 펑, 펑, 하늘에 커다란 불꽃이 터졌다. 중앙 지부 소속 헌터들이 스킬로 만들어낸 불꽃이었다. 아르마는 창문 너머로 그 불꽃을 바라보며, 지난 3시간의 지옥을 떠올렸다. 기어이 고집을 굽히지 않은 협회장 탓에 미친 듯이 구른 협회원들. 온갖 곳을 뛰어다니고 온갖 욕을 얻어먹은 그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을 잠시 가졌다. 물론 다시 서류가 밀려들었기 때문에 묵념은 2초를 넘지 못했다.

“코르니스님?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서류의 산 너머로 들린 목소리에 아르마가 손을 멈췄다. 행사 관리 위원으로 출석할 때마다 보던 얼굴이었다. 마찬가지로 본인 국가의 지부장 손에 지옥으로 떠밀린 비운의 협회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어디서 싸움이라도 났습니까?”

    서류에 고정한 눈을 떼지 않고 한숨부터 쉬었다. 남은 서류를 마저 읽어내리고 눈을 들었을 때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나 왔어, 알!”

    코앞에 반가운 얼굴이 들이밀어져 있었다. 라트. 아르마가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눈앞의 얼굴이 더욱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게 며칠 만이야~, 내 아르마, 보고 싶어서 쓰러질 뻔 했다구.”

    애교있게 목소리 끝을 늘이며 라트로가 엉겨붙었다. 아르마가 으윽, 목 졸린 소리를 내며 라트로의 품에 고개를 박았다. 쓰고 있던 안경에 콧등이 눌린 아르마가 미간을 구기며 라트로를 밀어냈다. 물론 싱글싱글 웃는 라트로는 쉽게 떨어져 주지는 않았다.

“두 분, 잠깐이라도 나갔다 오세요. 내일 코르니스씨 순찰 시간이랑 바꿔드릴게요.”

문간에 서있던 비운의 협회원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라트로의 품에서 겨우 고개를 빼낸 아르마가 협회원이 건네는 순찰 완장을 건네 받았다. 순찰을 하러 나가다가 라트로를 만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급한 서류들은 대충 처리해 놨으니까 노점 관련으로 올라온 서류들만 다시 정리해 주세요.”

“네, 걱정 마세요.”

협회원이 친절하고 아련한 미소를 지어주며 책상 한켠에 쌓여있던 서류를 골라 들었다. 이곳에 반강제로 불려오는 비운의 협회원들은 전부 각 지부의 지부장들이 인정하는 일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기꺼이 시간을 바꿔준 이 협회원은 아르마보다 3년은 더 행사 진행을 맡아왔다고 했다. 아르마는 안심하고 라트로를 끌고 나왔다.

행사 준비 위원들의 순찰 시간, 유일하게 휴식 시간에 가까운 일정이었다.




“오늘 우리 팀에서는 누구 파견왔어?”

“레온이랑 막내. 덕분에 텔레포트 얻어 타고 왔지.”

잘했네, 아르마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왠지 작년보다 몇 시간 빨리 왔다 했더니만. 막 개최식이 끝난 거리는 사람으로 바글거렸다. 라트로가 작년부터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식당 앞에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라트로가 한 손에 든 음료수를 쪽 빨며 다른 손으로 아르마의 허리를 잡아 끌었다.

“여기 엄청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 알, 시간 돼?”

“예약해 놔서 괜찮아. 원래는 몇 시간 후로 해놨는데, 아마 비워놨을 거야.”

아르마가 제 허리에 둘린 손을 떼어 깍지를 꼈다. 손을 잡아 끌고 긴 줄을 지나친 두 사람이 간신히 입구에 몸을 끼워넣었다.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꾸며진 작은 식당이었다. 그 작고 아늑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사람이 꽉꽉 들어차 있었지만.

아르마와 라트로가 들어온 것을 본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르마 코르니스씨, 라트로 에스투스씨 맞으시죠? 올해는 차가 덜 막히셨나 봐요.”

“운좋게 텔레포트를 타고 와서요.”

라트로의 대답에 직원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 타고 왔으면 이 시간은 어림도 없죠, 사람들로 가득 찬 가게 안팎을 한 차례 둘러본 직원이 곧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예약하신 자리는 미리 비워뒀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3층 테라스에 위치한 테이블은 1, 2층과는 달리 고즈넉했다. 3층은 예약자들을 위해 미리 비워둔 모양이었다. 역시 유명 헌터들에게 사랑받는 식당의 서비스는 다르다고, 라트로는 내심 감탄했다.

“나랑 온다고 예약까지 미리 해둔거야아? 역시 알은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네가 와보고 싶다고 계속 말했잖아.”

아르마는 미미한 짜증이 담긴 대꾸로 라트로의 장난스러운 말을 흘렸다. 물론 정면에 앉은 라트로에게 살짝 달아오른 귓가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하여튼 아르마는 거짓말을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 감정을 숨기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라트로는 턱을 괴고 싱글싱글 웃었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알은 안좋아? 나 일주일 만에 봤는데?”

묘하게 묻어나는 장난스러움에 아르마가 물컵을 들고 고래를 슬쩍 틀었다. 놀리려고 일부러 더 물어본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아르마는 입가를 가린 채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 … 좋아.”

라트로가 활짝 웃었다. 아르마는 약하게 인상을 쓰고 그런 라트로를 노려봤다. 웃지마. 내가 언제 웃었다고. 지금도 웃고 있잖아. 아닌데. 밉지 않은 말다툼이 오갔다. 순간 대화가 끊겼다. 라트로가 테라스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 위에서 가지고 놀던 아르마의 손을, 라트로가 힘주어 붙들었다.

“알, 들었어?”

아르마도 테라스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명소리. 거리가 멀어 작게 들렸으나, 두 사람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환청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곧 사이렌 소리가 사방을 뒤덮었다. 

애애애애앵-.

더없이 익숙했으나, 지금 이렇게 들려서는 안되는 소리였다. 균열 예측 경보도 없이, 대피 명령도 없이, 균열의 좌표 안내도 없이, 이렇게 바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익숙한 손길이 아이템창에서 완장과 장비를 끄집어 냈다.

균열이 터졌다.




“통제실, 들립니까?”

[통제실입니다. 본부 바로 뒤편에서 몬스터 습격 중입니다!]

다급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균열은 본부와 가까운 곳에 열린 것 같았다. 사람의 목소리 뒤로 비명소리와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있었다.

[균열 예측기가 작동을 안했습니다. 본부 안까지 몬스터가 들어와서, 지금 통제실도 지키기 어렵습니다!]

균열 예측기가 작동하지 않았다니. 각성자와 헌터의 존재가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고 아이템 산업이 활발해지면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은 틀림없었다. 쯧, 아르마가 혀를 차며 앞에서 뛰어오는 몬스터에게 총알을 박았다.

“지금 거기까지 못갑니다. 일단 대피하십시오!”

[균열은 본부 바로 뒤편입니다! 아레나와 가까워요!]

협회원 중 하나일 사람은 다급하게 균열의 위치를 외치더니 통신을 끊었다. 무사히 대피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아르마는 행사 관리 위원회용 무전기를 아이템창에 던져 넣고 급하게 한걸음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에 커다란 발톱이 박혔다.

“라트!”

부름과 동시에 타탕, 총소리와 뻑, 타격음이 울렸다. 아르마는 정면에 있던 몬스터에게 총알을 박고, 라트로는 아르마의 뒤를 급습하려던 몬스터에게 주먹을 꽂았다. 몬스터가 쓰러지자 마자 사람들이 주위에서 뛰쳐나갔다.

“본부에서는 뭐래?”

“본부 뒤편에서 균열 발생, 그래서 본부부터 습격 당했나봐. 더이상 통신도 안돼.”

하필. 라트로도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다른 지부의 건물이라면 전투 헌터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어 안전했겠지만, 중앙 지부, 본부는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이 비전투 헌터들, 심지어 현재는 행사 중이라 원래 있던 전투 헌터들도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본부가 몬스터에게 점령 당했다는 것은 통신탑과 관제탑을 동시에 잃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단 본부 쪽으로 가야겠네.”

“응, 사람들 대피부터 시키고.”

타다다당,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렸다. 몬스터와 사람들이 뒤엉켜 있어 정밀한 조준이 필요했다. 쿠구궁, 총알이 적중한 몬스터 네 마리가 동시에 쓰러졌다. 라트로가 잽싸게 달려나가 몬스터 사체 주변에서 사람들을 끄집어 냈다.

“대피소 안내판을 따라 대피해 주십시오!”

아르마가 사람들을 한쪽 방향으로 모았다. 마구잡이로 달려나가던 사람들은 완장을 차고 몬스터를 상대하는 헌터의 말에 따라 방향을 틀었다. 곳곳에서 달려온 흰 옷을 입은 헌터들도 보였다. 중앙 지부의 헌터들이었다. 그들은 몬스터를 상대하려다가, 아르마와 라트로를 보곤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에 전념했다.

사람들은 한층 빠져나갔지만 금세 몰려드는 몬스터 탓에 빈틈은 없었다. 주변에서 사람의 기척이 사라지자 아르마가 스킬을 다시 중첩했다. 무기 소환, 중첩. 수십개의 총기가 몰려오는 몬스터를 겨눴다.

“알, 지금!”

몬스터 한 마리의 머리를 터트리고, 라트로가 빠르게 달려나왔다. 라트로가 제 앞까지 도달한 순간에 쿠과과광, 엄청난 소음이 등 뒤를 휩쓸었다. 총기 특유의 매캐한 연기가 걷힌 자리에는 쓰러진 몬스터들이 즐비했다. 곧바로 철컥, 철컥, 다시 총기를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본부까지 길을 뚫으려면 아직 부족했다. 라트로가 먼저 달려나갔다. 본부 방향. 그 뒤를 따라 달리는 아르마의 코트깃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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