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공포소설 속 조연은 사람으로 살고싶다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일부 발췌
유릭은 발밑에 있는 싸늘한 시체를 내려다봤다.
그를 죽일 수 있는 마지막 인물로 큰 기대를 걸어왔지만, 역시 인간은 인간.
하늘이 붉게 타오르며 마수들이 그를 지나쳐 가는 왕성에서 유릭은 제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고대종 군집 속에서 노예로서 살던 시절.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소리를 흘리며 하늘을 비행하며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존재들.
그러나 그것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노예 종족의 반란에 백기를 들고 바다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 반란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그 끔찍한 도시를 탈출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검은 진흙의 땅을 달리며 뒤를 쫓아오는 마수들에게서 자신을 지켜준 것은 오직 단 한 분, 자신의 아버지뿐.
아버지는 자신을 위로했다. 미천한 자신을 흉내내며 제게 오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기꺼이 제 품에 유릭을 안았다. 이제까지 자신을 이렇게나 환대해준 존재는 없었다. 아버지는, 검은 진흙으로 된 옛 신은 오랫동안 마수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해주었다. 유릭은 검고 질척거리는 아버지의 속에서 잠들어있으면서 마치 죽은 것과 비슷한 환희를 맛보았다. 고대종들의 구역에서 여태까지 맛보았던 굴욕과 치욕은 멀리 사라졌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고, 무로 이루어진 공기를 떠다니는 듯한 감각. 의식과 감정을 모조리 빼앗아 버리는 안온함. 이제까지 겪었던 고통과 절망은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대는 변한다. 신은 쇠락하고, 자신의 아버지 역시 그러한 흐름에서 피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몸에서 빠져나온 후부터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유릭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다시 두려움에 떨며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자신과 비슷한 모양의 인간들을 발견했을 때는 얼마나 겁에 질렸던지.
그러나 유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했고, 또 강해져 있었다. 자신을 위협하던 고대의 마수와 닮은 것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품었던 아버지의 축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건 좀 더 자란 후의 이야기였다.
유릭은 품이 그리워 몇 번이고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라붙어 갔다. 어째서? 인간들을 집어넣어도, 마수들의 피를 쏟아부어도 아버지는 늘 허기가 진다 하셨다. 결국 유릭은 깊고 깊은 잠에 빠져버린 아버지를 그러모았다. 맨손으로, 집착과 닮은 사랑과 공포로. 아버지가 없다면 자신은 그 감각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유릭은 아킬로니아를 지배했다. 그가 필요에 의해 모은 인간들이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고, 사람을 죽였다. 얼마나 죽였지?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들 몇 명과 바닥이 질척질척하게 피로 물든 왕성을 점거했다. 그리고는 왕성을 뼈대로 삼아 아버지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여전히 아버지의 품 안에 있음을 상기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순간으로 한 번만 더 돌아가기 위해서.
성에 있어야 할 많은 이들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눈을 뜨지 않으셨다. 유릭은 그만 죽고 싶었다. 유릭은 인간을 가축처럼 키웠다. 불리고 불리고 또 수를 불리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버지를 살릴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유적을 파헤쳤다. 인간들을 견본으로 삼기 위해 삿된 신앙을 알려주고, 그것을 관찰해서 연구를 거듭했다. 물론 저항이 없던 건 아니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건국일부터 대충 개국공신이라며 던져준 공작위를 가진 가문, 그 중에서도 하르트만 공작부인만이 자신을 막아섰다. 게다가 자신과 닮았을지도 몰랐던 레안드로스의 소유권을 주장한 탓에, 유릭은 그녀를 구슬리던가 죽여버리던가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당연히 유릭이 택한 쪽은 후자였다. 누명을 씌우고 모두 죽여버리려 했지만 그녀의 자식만은 살아남았다. 왜? 레안드로스가 필사적으로 보호하며 달아났으니까. 유릭은 레안드로스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었고, 수 년 후 정말로 그리 되었다. 광증에 걸려 오락가락하는 어린 인간에게 작위를 승계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글쎄. 그게 오히려 사자의 아가리로 머리를 집어넣는 꼴이 되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을까? 레안드로스가 망한 공작가를 먹여 살리느라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시종의 눈 앞에서 울부짖는 어린 공작을 으스러뜨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굳이 유릭 본인이 아니더라도.
시종은 미쳤다. 그걸 본 레안드로스도 거의 미칠 뻔 했다. 레안드로스는 어린 공작의 썩은 유해를 담아서 품고 다니며 유릭을 죽이겠다고 발악했다. 유릭은 당연히 환영했다. 아, 다시 한 번 그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레안드로스, 너라면 나를 죽여주겠지. 이 모든 걸 멈춰주겠지. 깨지 않는 아버지 대신 나를 죽음으로 이끌어 주겠지. 인간 중에서 나를 닮은 너라면 혹시 모르잖나. 나는 그대를 믿어. 믿고 있어. 제발.
그러나 운명은 언제나 그를 배신했고, 세상은 처절한 몸부림을 가볍게 무시했다.
유릭은 발아래에 굴러다니는 시신을 걷어찼다. 그의 죽은 희망이 굴러갔다. 썩은 조연의 머리뼈도 함께 바스라져서 사라졌다.
작고 하잘것없는 연극의 막이 내렸다. 그 끝에는 불과, 진흙과, 피.
그리고 게으른 아버지의 하품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무료연재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93화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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