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게게

강탈

남의 물건이나 권리를 강제로 빼앗음.

h3 by GM
150
0
0

치치미즈, 죽음에 관한 소재

* 담배타임 (@non_filter28)의 연성에 영향을 받아 작성한 3차 창작입니다.

( https://x.com/non_filter28/status/1841879637204590643 )

영향 받은 구간 15~ 이후부터로, 문제가 생길시 해당 구간 영구 삭제 및 전체 글 암호로 돌릴 예정입니다.

*작업곡

1. https://youtu.be/SN7NLdiwcnk?si=yy545qoI-SmJJHo_

2. https://youtu.be/FHM0gxolq6o?si=WjGYSUkAMXj3RYC7


-1.

이건 동정인가? 아니. 강탈이다.

언젠가 너를 기억할지 모르는 나에게서 너를 앗아가는 행위다.

 

0.

미즈키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반생을 함께 한 이들이 그를 증명했다.

 

갑자기 대뜸 사상이 보인다며 말을 건 게게로가 그랬고,

요괴 열차를 타고 지옥으로 마실을 다녀오는 키타로가 그러했다.

 

1.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 속에 색이 섞였다. 유독 어둡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넘실거리는 어둠이 한 집을 향해 나아갔다. 유령족 부자와 한 인간이 사는 집이었다. 야윈 가지를 타고 담을 넘었다. 침입자를 막아야 할 담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다. 삿된 것은 결계에 막히거나 마당에서 타오르기 일쑤였다. 방금도, 거름망을 통과하지 못한 자가 타올랐다. 푸른 도깨비불이 빛났다. 밤의 시작을 알리는 등이 켜졌다. 배우지 않은 이들을 위해 건배! 술자리가 펼쳐지기도 전 건배사가 나왔다. 여기저기서 낄낄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인간이 들었다간 단번에 소름이 끼칠 요괴들의 농이었다. 소란이 커져갈 때쯤 속처럼 문이 열렸다. 걸어 나오는 건 키가 큰 남자였다. 특징적인 푸른 옷을 걸친 남자는 계절에 맞게 목도리를 두른 주제에 발은 전혀 감싸지 않았다. 거기에 이상함을 느끼는 이는 없었다. 아무렴. 그가 바로 이 자리의 주연이자 단둘만 남은 유령족의 아버지였다. 그가 팔을 올렸다. 모양 좋게 쭉 뻗은 검지가 창백한 입술을 눌렀다. 이다음 나올 말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쉿. 미즈키가 깨겠네.”

 

2. 미즈키가 비정기적으로 잠에 드는 건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이 그러하듯. 세월이 지날수록 미즈키는 활력을 잃어갔다. 점차 사라지는 생기에 키타로는 허둥거리기 일쑤였으나, 게게로는 담담했다. 검은 머리가 희게 되었고 윤기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찍 일어나 부산스럽게 출근을 준비하던 아침은 이제 없었다. 정년퇴직이라는 걸 한 이후는 매일이 일요일처럼 변했다. 미즈키가 늦게 일어나고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주길 그토록 바랐는데 막상 이루어지니 과거가 그립다며 고백하는 키타로에게 게게로는 비밀을 알려주었다. 자신 역시 그러하다고. 예전보다 바빠도 좋으니 미즈키가 일어나면 좋겠다고 말이다.

제일 먼저 줄어든 건 식사량이었다. 쌀 밥과 반찬, 그리고 국만 있어도 풍족한 식사였다. 남자 세 명이 사는 집이니 매일, 적어도 이틀에 한 번꼴로 고기나 튀김이 올라왔다. 그중 키타로가 최고로 꼽는 건 미즈키가 사 오던 고로케였다. 퇴근 후 장을 봐오며 사 오는 고로케는 미즈키가 고기를 사 왔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며 가끔은 하나밖에 없으니 아빠 몰래 먹으라며 쥐여주던 보물이었다. 소년의 정신을 벗어난 뒤에도 그 맛은 변하지 않았다. 직접 사 먹었을 때와는 천지차이였다. 미즈키에게 졸라야만 얻을 수 있었다. 고로케와 신선한 고기 세 근이 고로케 두 개로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미즈키 씨는 먹지 않나요? 겨우 물어봐도 미즈키는 너희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사양하기 바빴다. 기름 냄새에 더부룩한 속을 숨겼다. 게게로는 같이 권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먹기만 하였다. 식탁에는 야채의 비율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주방에 서는 건 늘 미즈키의 몫이었는데 어느새 게게로가 섞이게 되었다.

많이 마르지 않았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미즈키를 살피기도 하였다. 연한 얼굴선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모르는 선이 나 있었다. 놀라서 급하게 지우려 드는 키타로의 손길을 피하며 미즈키는 웃었다.

“키타로, 이건 주름이라는 거야.”

“흉이 아닌가요?”

“흉이라면 흉이지. 세월을 따라 나는 것이니.”

미즈키는 그것을 인생을 살아온 궤적이라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인생이라 확신했다. 미즈키가 웃는 표정 그대로 선이 접혔다. 웃음이 사라져도 선은 펴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았다. 키타로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 함께하던 종이접기가 떠올랐다. 허락을 받고 만져본 주름은 생각보다 더 부드럽고, 미즈키 다웠다. 게게로는 이 모든 걸 옆에서 바라보다가 자신도 만져도 되겠냐 물었다. 미즈키는 굳이? 표정으로 묻더니 이내 승낙했다. 키타로에게 만지게 한 만큼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던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의도였다. 친구에게 향하는 마음과 요괴를 위한 배려가 섞였다. 게게로는 미즈키의 얼굴을 매만지는 대신 손을 감쌌다. 고생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손이었다. 주름지고 투박한 손이 무에 귀한지. 한참 동안 매만지더니 한탄하듯 내뱉었다. 이제 도끼도 들기 어렵겠군. 당연한 말이었다.

미즈키는 늙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인 요괴들에게 그 사실을 꾸준히 알려주었다. 그가 건강하던 시절 누누이 해오던 말처럼.

“알겠어, 키타로? 사람은 모두 늙게 되어 있어.”

세월을 피해 달아날 수는 없었다. 미즈키는 달아날 생각조차 없었다. 늘 소란과 함께 하던 미즈키는 자취를 감추었다. 뛰지 않고 걷는 날이 늘어났다. 그마저도 줄어 점차 앉게 되었고. 눕게 되는 건 순간이었다. 미즈키도 그걸 알았는지 게게로에게 술자리를 갖자고 억지를 부린 날이 있었다. 유난히 달이 밝은 날이었다. 너와 달맞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이 안 들어. 유난히 또렷한 목소리였다. 차가운 청주가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잔을 털어 넣는 대신 몇 번이고 홀짝이며 풍류를 즐겼다. 풀벌레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옆에는 사랑하는 친구가 있었고 오랜만에 술도 잘 받았다. 기쁜 날이었다. 친구의 머뭇거림조차 사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몇 잔이나 자작을 이어갔을까. 마침내 침묵하던 게게로가 입을 열었다. 미즈키여. 그때의 답을 바꿔도 되겠는가. 미즈키는 잔을 내밀었다. 잔잔해진 수면에 달이 차올랐다. 그때와 똑같은 모양을 망설임 없이 삼켰다.

 

3. “싫어.”

 

4. 흔한 이야기였다.

젊은 치기라 해도 옳았다. 달이 아름다운 날, 취기에 새어 나와버린 마음이 있었다. 혼자 감추기엔 너무나도 커져 버린 본심이었다.

 

“게게로. 내가 널 좋아하는 모양이다.”

 

미즈키는 돌려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적어도 둘만의 술자리에선 그러했다. 게게로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눈앞의 광경과 친구의 고백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는 잔이 깨지기 전에 마루에 내려놓았다. 잠깐의 시간 동안 온갖 감정이 차올랐다. 먼저 건져낸 건 당황이었다. 미즈키가, 나를, 왜? 단편적인 의문이 떠다녔다. 가족으로서가 맞냐고 묻기엔 미즈키가 원체 진지했다. 거짓말이라 회피할 수도 없었다. 미즈키에 대한 모욕이었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돌려주어야 했다.

“내게는 아내밖에 없네.”

“나도 알아. 오히려 받아줬다면 제정신이냐 물었을 거다.”

“알면서도 고백한 건가? 어째서?”

“거절당할 거라는 확신이 필요했거든.”

미즈키는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방금 고백을 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평온이 있었다. 걱정 마. 널 가족으로도 사랑하니까. 이런 일은 다신 없을 거야. 부드러운 성색에 오히려 게게로가 혼란스러워졌다.

“…만 내가 받아줬다면?”

“기뻤겠지.”

망설임도 사치였다. 미즈키는 젖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쳤다. 태연하게 이미 차 있는 게게로의 잔에 술을 부었다. 넘쳐흐른 액체가 마루를 타고 마당으로 사라졌다. 애써 매달려 있던 물방울도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떨어졌다. 깊게 파고들어선 안 되는 주제였다. 누구도 득을 보지 못했다. 건배할 거냐? 미즈키가 물었다. 게게로는 잔을 부딪치길 택했다. 미즈키도 게게로도 아는 게 많은 어른이었다. 말솜씨가 나쁜 편도 아니었기에 대화의 전환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게게로의 중심은 아내였기에 무심코 그녀의 화제를 꺼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오히려 미즈키가 말을 멈춘 게게로를 독촉했다.

너희 부부의 이야기를 자신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느냐고.

게게로는 빈 행간 사이 놓인 문장을 읽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느냐고.

그러니 밝히지 않은 문장은 못 본 체했다.

한눈을 감고. 밤이 깊어지도록 친구와 사랑하는 가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후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게게로는 긴장했다. 혹시라도 미즈키가 또 같은 주제를 내면 어쩌지. 처음에는 불안했다. 몇 년 후엔 기대를 품었으나, 미즈키는 중요한 일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5.

“아버지, 미즈키 씨. 날이 찹니다. 슬슬 안으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들을 부르러 나온 키타로의 말이 서서히 멈추었다. 미즈키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친구의 등에 기대 달빛을 맞으며 자고 있었다. 게게로는 그를 애틋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타로는 구태여 둘을 부르는 대신 이불을 밖으로 날랐다. 미즈키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덮었다. 게게로는 눈빛으로 감사를 표했다. 어스름한 풍경을 깨지 않기 위해 키타로가 물러났다. 단단한 어깨가 움찔거릴 때마다 게게로가 속삭였다. 마른 입술이 벌어졌다. 같이 있는 이들에게서 안개의 향취가 났다. 새벽이슬이 땅을 적시며 나는 향기와 함께였다. 밤에만 맡을 수 있었다.

 

6. 위안이 있다면 그의 잠이 평화로웠다는 것이다.

악몽에 앓지도, 놀라 깨어나지도 않았다. 머리 맡에는 종종 게게로가 앉아있곤 했다. 볕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서 시간을 함께 보냈다. 키타로는 간혹 아버지의 코 아래 손을 대보고 싶었다. 이대로 멈춰버리지는 않을까. 이미 멈춰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게게로가 자리를 비울 때면 키타로가 미즈키 곁으로 갔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아, 이래서 아버지가 움직이지 않았구나. 깨달았다. 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아직 살아있노라 미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게 된 건 비단 그들이 나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게게로가 위라면 키타로는 빈자리에 함께 눕길 택했다. 몰래 들어온 고양이처럼 옆에 누워 있다 보면 미즈키도 함께 몸을 돌렸다. 잠결에 아들을 찾아 익숙하게 안아주는 것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생긴 버릇이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키타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곤 잠을 깨우지 않게 조용히, 아주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다. 감싸오는 온기.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로 가득한 방.

키타로는 이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게게로가 돌아와 교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키타로는 미즈키를 깨우지 않고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았다. 혹은 미즈키의 감각이 더 둔해졌거나. 미즈키는 일어나지도 않으면서 곁이 비었다는 건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상관없었다. 옆을 더듬거리곤 빈 것을 깨달으면 이것이 옳다는 듯 정자세로 돌아갔다. 찾아 웅크리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게 서러웠을 때 키타로는 며칠이고 미즈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고 있을 때도 깨어나서도 착 달라붙은 모습을 미즈키는 꼬마 유령이라 칭하곤 했다. 유일하게 같이 갈 수 없는 곳은 화장실 뿐이었다. 부축은 받으면서 여기까지 아들의 신세를 질 수 없다고. 그런 꼴을 보여주느니 죽는 게 나아. 단호하게 거절했다.

“… ….”

“미즈키.”

“잠깐만. 키타로. 내가 잘못했다. 말실수였어.”

아버지들이 당황했다. 미즈키가 허둥지둥 다가왔다. 안기고 나서야 키타로는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온통 미즈키의 냄새가 났다. 언제고 그리워할 냄새가.

키타로는 손을 올려 미즈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지 마세요. 빌지 못했다.

아버지는 되는데 저는 안 되나요? 묻지 못했다.

키타로에게 허락된 것들이 아니었다. 키타로도 이제 많은 걸 알았다. 인간이 늙는다는 게 어떤 뜻인지, 이별이라는 게 무엇인지, 불확실한 미래를 애타게 바라는 심정을, 과거를 반추할 때마다 눈동자가 일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타인을 다치지 않게 하는 힘 조절을. 이 모든 걸 한 사람에게서 배웠기에 차마 꺼내지 못했다. 놓치면 안 된다는 듯 잡고 있는 게 전부였다. 눈물이 떨어졌다. 미즈키 씨, 저는 아직 보낼 수 없어요. 이대로 있어주세요. 긴 마음이 녹아있는 물이었다.

말없이 우는 키타로 위에서 아버지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아들의 어리광을 받아주기로 했다. 미즈키가 힘주어 키타로를 끌어안았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은 게게로였다. 키타로가 얼마나 자랐든 그들에게 키타로는 늘 어린아이였다. 그 사실에 더 서글퍼졌던 것 같기도 하다.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게게로는 능숙하게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키타로는 바로 빠져나가지 않고 조금 더 머물렀다. 그들의 교대는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러도 되었다. 단지, 둘 모두 자리를 비우면 안 됐다. 그의 기상에 그들이 함께 하길 바랐다.

미즈키도 그들의 욕심을 인식했다. 깜박. 눈꺼풀이 들렸다. 점차 희게 바래져가는 푸른색이 드러났다. 오래 잠들었다 깨어나도 변치 않을 이들이 곁에 있었다. 몇 년을 잠들었다 해도 깜박 속아버릴 만큼 그대로였다.

“미즈키 씨. 물입니다.”

미즈키가 마른 목을 움직이기도 전이었다. 키타로가 눈치 빠르게 물을 내밀었다. 마시기 쉽게 미지근한 물이었다. 팔로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는 걸 게게로가 도왔다. 이번 기상은 낮인가 보다. 키타로가 커튼을 걷자 임의로 만들어낸 어둠이 사라졌다. 미즈키는 잠시 따스함을 만끽했다.

“이번에는 얼마 만에 일어났어?”

“사흘하고 네 시간 만입니다.”

“열두 시간 만인가. 오래 잤네.”

미즈키는 기지개를 켜다 게게로에게 혼났다. 몸이 굳어있는데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불합리한 이유였다.

유령족은 노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단순히 노쇠하여 잠이 많아지는 거라 해도 믿지 않았다. 참으로 재밌었다. 늘 1년을 하루처럼 살아오던 유령족이 짧은 시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이. 그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떨어지지 않는 것이. 덕분에 그는 깰 때마다 친구와 양자를 볼 수 있었다. 운이 좋다면 둘 중 한 명을. 더더욱 운이 좋다면 둘 모두를 보았다. 운이 나쁠 일은 없었다. 현생의 죄가 더해지면 어떠한가. 성격 나쁜 남자는 늙어서도 변한 게 없었다. 그들에게 미안하게도, 미즈키는 이 평온을 만끽하고 있었다.

 

7. 간혹 그는 외부의 소란에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때 함께 있는 이는 키타로로 고정되었다. 게게로는 바깥에서 요괴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인간이 표현할 수 없는 색들이 빛났다. 그것은 누군가의 눈동자였으며 입속 부속품이자 그 자체이기도 하였다. 요괴. 듣자마자 도망쳐야 했을 그것은 이제 미즈키의 일부가 되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그를 증명했다. 오늘의 키타로는 옆에 앉아 미즈키의 손을 잡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손가락으로 기상을 눈치챘는지 상냥하게 속삭였다.

“일어나셨나요, 미즈키 씨?”

“아아, 좋은 밤이야. 키타로.”

수발의 일부는 거절하고 일부는 받으면서 미즈키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거창하게 말해봤자 밀린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는 게 다였다. 미즈키는 많은 것을 들었다. 지난밤 후쿠오카에서 벌어진 실종 사건의 범인이라던가, 산간 지역에서 토지를 멋대로 개발하는 바람에 신이 분노했다던가, 다른 사람들은 믿지 못할 이야기가 난무했다. 증인은 창 아래 요괴들이었다. 게게로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장이었다.

유령족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작은 요괴도 함부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요괴들은 강에 상관없이 섞여들였다. 마음껏 술을 나누고 대화를 했다. 고민을 털어놓는 이들은 대가로 식료품이나 귀금품을 내밀었다. 자릿값이라며 들고 오는 요괴도 있었다. 인간이나 중요하게 여길 법한 금을 받는 게 의아한 눈치였다가, 다른 식구를 떠올리고 납득했다. 미즈키도 저곳에 껴서 같이 대화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창밖과 안으로 나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이것이 오늘의 진상품인 딸기입니다.”

꿈결을 떠돌던 시선이 다시 키타로에게 집중되었다.

“진상품이라니 너무 거창하잖아.”

“드셔보시면 이해하실 거예요.”

꼭지가 제거된 딸기가 태연하게 내밀어졌다. 크기도 색도 최상급이었다. 입가 가까이 댄 손만 아니라면 즐겁게 주워 먹었을 것이다.

“내 손으로 먹을 수 있대도.”

“미즈키 씨의 손을 더럽힐 수 없어요.”

“먹고 닦으면 되는 거 아니야?”

“제가 먹여드리고 싶어요.”

“…하나만이야.”

미즈키가 포기하고 입을 벌렸다. 키타로는 기쁘게 딸기를 먹여주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키타로는 씻어둔 딸기의 절반을 먹이는데 성공했다. 아버지의 몫도 충분하니 걱정 말라 끊는 기술은 이제 일류의 솜씨였다. 미즈키는 날이 갈수록 걱정이 많아졌다. 책임감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진 사람이라 그랬다. 역할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질문과 답변이 필요했다. 모든 질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내가 챙겨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아니요. 키타로는 아우성치는 속내를 무시하고 꿋꿋하게 긍정했다. 단 한 번이라도 부정하는 순간 미즈키는 그들을 영원히 챙겨주어야 할 이로 여길 것이었다. 그리곤 그들을 남기고 가는 걸 후회하겠지. 그럴 수는 없었다. 미련은 남는 자의 특권이었다. 제아무리 미즈키라 할지라도 줄 수 없었다. 좋은 삶이었노라며 홀가분하게 떠난 그를 붙잡고 그제야 속내를 고백하는 건 키타로만의 몫이었다. 친구와 아들의 차이라 해도 좋았다. 게게로야 지금도 붙잡기 일쑤이니. 키타로만이 미즈키가 살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끝을 그리고 있었다.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자리에 머무르고 싶어도 미즈키의 가르침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꽤 엄한 면이 있어 양자의 슬픔도 쉽게 봐주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직시할 때는 멀었다. 키타로는 눈을 감고 웃었다.

 

그 뒤로 그들은 대화를 이어갔다. 주로 말을 꺼내는 건 키타로였다. 미즈키가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게게로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반복되는 하루건만 그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왜 이리 많은지.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기억이 소중하게 포장되어 나왔다. 이야기보따리가 쉽게 닫히지 않았다. 미즈키는 벽에 기댄 채 키타로의 말을 모두 들었다. 응, 그렇구나. 응… 하고, 미즈키가 일정하게 답해주는 소리가 기분 좋아 키타로의 말은 더욱 길이를 늘렸다.

일부에 한해서이지만, 이제 게게로의 요리는 수준급이 되었다 했다. 속이 불편한 날이 길어지며 맛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해가 빠르게 지는 계절이 와 잔치의 시간이 길어졌다 했다. 이 소란에 잠에서 깨는 시간이 많아지고 싶다 욕심냈다. 외출했을 때 떨어지는 마지막 단풍을 잡게 되었다 했다.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행운이 찾아오길 바랐다. 대기의 온도와 욕탕에 관하여, 그리고 마침내 요괴와 인간의 다툼을 중재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반쯤 잠결이었다. 좋은 아이로 자랐구나. 숨소리에 섞인 문장을 요괴의 귀가 주워들었다. 키타로는 허리를 바짝 세웠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미즈키가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는 것에 의문을 느낄 때까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키타로? 왜 그래. 졸려?”

“네, 그런가 봐요.”

졸려서 그런가 봐요. 졸려서. 이게 다 졸리기 때문에. 키타로는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끌었다. 익숙한 옆자리에 웅크렸다. 이놈, 손은 닦고 자야지. 깨우려는 듯, 더욱 깊게 재우려는 듯 등을 하게 토닥이는 손길을 느꼈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킬 것이다. 아무렇게나 훔쳐내도 될 걸 꼭 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줄 것이다.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못 본 걸 노안 탓으로 돌리며 계속할 것이다. 아직도 손가락 끝이 끈적였다. 속된 단맛이었다. 키타로는 그걸 입에 넣는 대신 미즈키를 기다렸다.

 

8. 키타로에겐 태생적으로 결핍이 속되어 있었다.

첫 순간부터 그랬다. 존재하지 않는 눈, 사진으로만 남은 어머니, 언제고 헤어질 그.

 

키타로는 그 사실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그는 타고난 것을 원망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너는 아버지를 닮았구나.

목소리는 또 어떻고. 아내를 쏙 빼닮았네.

외모도 어머니를 닮았으면 좋았을 것을….

미즈키? 무슨 뜻인가?

사소한 일에도 장난을 치는 어른들이었다. 흔한 비유지만, 웃음이 흘러넘쳤다. 아기의 모습일 때는 싸우더라도 여파가 키타로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어색함을 추측할 수 있었다. 서로 마주 보려 들지 않더라도 키타로가 기어 오면 꼭 손을 잡아주었다. 교두보가 된 키타로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곁눈질로 흘끔거리던 눈이 맞게 되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고 화해라도 하듯 다음을 논하기 시작했다. 그때쯤 키타로도 함께 웃고 있었다. 인간의 손과 요괴의 손 사이가 키타로의 세계였다. 그 속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아니, 벗어나기 싫었다.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버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좁은 세계가 키타로의 근간이었다. 그 누가 와서 흔든데도 꺾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흠집이 날지언정 결코 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아버지와 그와 함께라면. 그 속에서 키타로는 흠이 결코 결점이 아님을 깨달았다.

험한 삶을 살았음에도 그는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요괴이기 때문에 웃자란 키타로를 붙잡고 교육을 시킨 점이 그러했다. 그때쯤 둘은 인간과 요괴의 차이로 많이 다투었다. 둘 다 고집불통이라 결판은 쉽게 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일상생활은 고스란히 함께 보냈다. 얼굴도 보지 않으려 들면서 거리는 가까웠다. 싸우는 내내 키타로를 챙기기도 했다. 요괴는 요괴답게 살아야 한 대도. 그 말을 하며 아버지는 젓가락으로 생선 살을 깔끔하게 발라주기 위해 노력했다. 요괴답게 사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야. 배워야 한다는 거다. 그가 접시를 빼앗아갔다. 능숙한 솜씨로 뼈를 발라내고 돌려주었다. 그는 타인을 위해. 결국 자신을 위해 배워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생선은 입을 이용해 말끔하게 먹어치울 수 있는 아버지는 잠자코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긍정했다.

긴 생. 몇 년쯤은 투자해 보겠노라고.

그게 족히 오십 년은 넘게 흐르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학교를 그만둔 뒤에도 가르침은 계속되었다. 키타로는 많은 걸 배우고 깨달았다. 자립을 위해 짐을 챙기던 날의 대화를 키타로는 여태 기억했다. 개인 짐이라 부를만한 물건은 몇 개 없었다. 두고 가는 게 훨씬 많았다. 어릴 적에 놀던 장난감, 쓰지 않게 된 학용품, 늘 쓰던 방석과 컵 같은 물건들이었다. 다 제각각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들의 위로 추억이라는 이름의 봉인을 붙였다. 소중할수록 자주 열어보아야 한다는 걸 모르던 시기였다. 먼 곳으로 떠나는 건 처음이지. 이제 외로워지겠구나. 그의 말을 키타로는 부정했었다. 아버지도 있고 동료들도 있다고. 외로워하지 않을 거라 답했다. 그가 지은 미소의 뜻도 모르고. 어른스러워졌다는 말에 티 내지 않고 기뻐하기 바빴다. 창피한 일이었다. 그 후론 정말 어른스러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자랑스러운 모습이 되었을 때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보고 싶을 때마다 보고 오겠다며 훌쩍 다녀오는 아버지를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가 키타로를 귀여워하는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단지, 키타로가 키타로이기 때문이었다.

 

9. 미즈키의 우선순위는 유령족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더 세세하게 나눠보자면 1순위는 언제나 키타로의 차지였다. 그럼에도 키타로는 순위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인지했다. 비교는 어려웠다. 서로 다른 두 개를 가져와 부딪히는 꼴이었다. 그것마저 갖고 싶었던가, 떠올려보아도 욕심이 난 적은 없었다. 키타로가 어른스러운 탓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 한편 깊이 인정하고 있었다.

드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의 소란은 서서히 멎어가고 있었다.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한 대상이 반대였는지 게게로의 걸음이 멈칫였다. 비스듬히 얹혀 있던 미즈키의 손이 살살 움직였다. 입가를 벙긋거리며 부르는 모습이 떠올랐다. 가까이에서 옷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주향으로 둘러싸인 밤공기를 맡았다. 이불이 무게에 눌리며 살짝 내려앉았다. 키타로는 게게로의 시선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머리가 쓰다듬어졌다. 일어날 필요가 없음을 예감했다. 그 역시 키타로의 자는 척을 눈감아주었다. 머리 위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었다. 목소리는 무척 작고 낮았다.

“오늘은 뭘 받아왔어?”

“싱싱한 물고기와 탕일세. 왜, 옛날에 끓여 먹었던 거 말이네.”

“그 맛 없는 거?”

미즈키가 질색했다. 인간은 나이를 먹으며 점차 호불호가 사라진다던데 미즈키는 정반대였다.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양 마음대로 행동했다. 좋고 싫음의 경계가 확실해졌다. 외부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았다. 성격이 부드러워진 것과는 관계없었다. 예전보다 힘은 해졌지만, 이리 오렴, 키타로를 부르며 끌어안았다. 어떤 나함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키타로는 게게로가 어떻게 단호할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어허. 게게로가 마치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다 먹으면 딸기를 주마.”

“한발 늦었어. 그건 이미 키타로가 먹여줬거든.”

자랑이 분명했다. 뭣이라, 놀라며 부러워하는 게게로도 게게로였다. 키타로가 아직 미숙했다면 바로 얼굴이 붉어질 뻔했다. 웅크려지려는 어깨를 겨우 막았다.

“나도 나중에 먹여달라 해야겠어.”

“아서라. 키타로 도망갈라.”

“우리 아들이 얼마나 효자인지 알면서 그러긴가.”

“알고 있지. 그래도 당분간은 나만 독점하고 싶거든. 넌 내가 먹여주마.”

“정말인가?”

“그래, 정말이고 말고.”

계속 막고 있었다. 가슴까지 끓어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키타로는 미즈키에게 딸기를 먹일 수 있었다. 원한다면 반대의 상황도 가능했다. 그릇을 앞에 두고 수줍게, 혹은 덤덤하게 입을 벌리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미즈키는 키타로에게 딸기를 먹여줄게 분명했다. 달고 새콤한 붉은 과일을. 질리기 전까지 넣어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왜 다르게 느껴지는지. 속에 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지는 몰랐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키타로가 깨끗하게 지켜낸 미즈키의 손가락이 더러워지기 때문일까. 새끼손가락끼리 꼬이는 상상을 했다. 그 순간 키타로의 일정이 정해졌다. 바로 미즈키에게 식기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포크를 들려주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대화도 점차 깊어졌다.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들 했다. 요괴들은 그게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건 점차 밝아지는 과정의 일부였다.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나 되감을 수 없는 낮이 오기 전,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다. 숨소리가 어렴풋하게 울렸다. 이 시간대 미즈키는 늘 똑같은 주제를 꺼냈다. 처음에는 확신을 얻기 위하여. 그 이후에는 마치 결심하듯.

“죽으면 다들 죗값을 치르는 거겠지?”

“당연한 말을. 우리 유령족이라면 모를까 인간이 염라대왕의 심판에서 벗어날 일은 없네. 미즈키여, 여기 마침 인과에서 벗어날 좋은 것이...”

“하하! 농담도 삼십 년이면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어?”

그들은 태연하게 대화를 반복했다. 변하는 것이라곤 권유 문구와 연도뿐이었다. 미즈키는 게게로의 시무룩한 표정을 능숙하게 넘겼다. 어깨를 흔드는 행동이 점차 기침으로 변해갈 때까지 고요하게 웃었다.

 

10. 곧 동이 튼다.

 

11. “자네한테서 사상이 비친다네.”

미즈키는 일렁이는 목소리에서 끝을 느꼈다. 이 앞에 기다리는 건 지옥이었다.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 살긴 했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납득했다. 그는 잘못된 마음을 품었을지언정 억지로 생을 연명할 마음은 품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이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아남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잠이 늘고 허리가 아팠지만 심각하진 않았다. 가벼운 폐결핵은 논할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피워 온 담배 연기를 모은다면 미즈키의 폐는 꽉 차다 못해 터져나갈 것이다. 그는 오랜 습관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고 보면 그에게서 기호 식품을 빼앗기 위해 유령족들이 참 고생했었다. 아무리 빼앗고 숨기고 묻어놔도 거짓말처럼 다음 날이면 주머니로 담뱃갑이 돌아와 있었다. 일종의 저주가 아니냐며 동그란 눈들이 심각하게 논하는 모습은 꽤 유쾌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지. 형씨, 다음에도 이용해 달라고. 비열하게 손을 비비던 쥐의 그림자를 숨기기에도 딱이었다. 들키고 난 뒤에는 크게 혼나는 줄 알았는데 불쌍한 선생만 호되게 내쫓기고 그에겐 담배 금지령만 떨어졌다. 아직도 게게로와 키타로의 표정이 선명했다. 눈이 점차 마비되어 가는 와중에도 둘의 얼굴만큼은 뚜렷하게 그릴 수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미즈키는 오래된 기억을 불러왔다. 예전처럼 게게로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붉은 눈동자에는 죽을 상을 띄운 사람이 비쳤다. 어딘가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피우지 못한 담배를 아깝다고 생각할 여유도 없던 때였다. 미즈키는 과거를 답습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 반문하지 않았다. 어딘가 냉정하게 자신의 상태를 진단했다.

“신기하네. 울거나 매달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렇지 않아.”

“자네가 그럴 리 없지. 미련이 남았다면 내 제안을 받았을 테니.”

“그건… 그렇지. 너도, 나도 질리지 않는구나.”

어딘가 담배 연기가 감도는 말이었다.

 

게게로가 조용히 물었다.

 

12.

”날 사랑하나?“

”언제까지고.“

 

13. 언젠가부터 미즈키는 사랑을 쉽게 입에 담았다.

이 무게가 가벼워졌다고 착각하길 바랐다.

비가 내리면 옷자락이 젖는 게 당연하듯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를.

 

그리하여 자신을 그리워하며 울지 않길 소망했다.

 

연인이란 몹시 그리며 사랑하는 사람이라 했다.

미즈키의 죽음과 이어지지 못한 사랑은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는 확고한 의지로 인간으로 죽길 택했다. 키타로를 위해, 게게로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권유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으나, 타고난 생의 차이를 떠올리자 평화로워졌다. 이별이 예정되어 있기에 담담할 수 있었다. 마음속의 중요한 부분은 바뀌지 않았다. 들키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진실로 겹쳐 발랐을 뿐이었다. 그는 연인이 아닌 가족으로 남고 싶었다. 언젠가 그를 떠올린다면 그런 인간이 있었지 가볍게 넘어가거나, 아주 오래전 자신을 친애하는 인간이 있었다고 막연하게 상기하길 원했다.

 

14. 그렇게 미즈키는 오랜 잠에 들었다.

유령족이 존재하기 전부터 실재하던 것이었다.

 

그날은 하늘이 매우 맑았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아 이런 날이면 볕도 좋으리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미즈키는 커튼 틈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미즈키를 제외한 모두가 아래를 보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가끔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다가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요괴들이란 죽을 날도 알아차릴 수 있는 건지, 우연히 모인 것인지 모르겠다. 궁금증을 꺼내기는 싫었다. 그런 사소한 일보다 지금을 즐기고 싶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말이 호기심이라니. 아, 세상에. 그건 너무 멋이 없지 않은가. 마지막 멋 내기 정도는 용서해 주었으면 했다. 미즈키는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밤의 냄새가 났다. 무덤가에 가까운 냄새였다. 죽음이 목 끝까지 차오른 상황에서 그는 평온을 느낄 수 있었다.

젊을 적 상상해왔던 미래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비록 으리으리한 저택도 방을 가득 채울만한 금속도 갖지 못하였지만, 더 값진 것을 얻었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사치스러운 죽음은 없다 자신했다. 아쉬움이 있다면 하나뿐이었다.

”키타로. 커튼을 걷어주지 않으련?“

언제나 목을 괴롭히던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유독 깨끗한 목소리였다. 아버지 등에 반쯤 숨어있던 키타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대답은 무척이나 짧았다. 밤을 지새운 건 미즈키일 텐데 키타로의 목이 대신 잠겼나 보다.

키타로가 커튼을 걷었다. 점차 밝아져 오는 세상이 보였다. 방 안에 깔린 어둠이 물러나고 어슴푸레하게 보이던 게게로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그는 키타로와 함께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울보인 주제에 눈물 하나 보이지 않고 탄식 하나 뱉지 않고 앉아있었다. 네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즈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말의 토씨 하나 어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더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으로 그가 간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미즈키가 팔을 뻗었다.

입술이 열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15. 그가 바라던 대로 되었는지, 아닌지 미즈키는 알지 못했다.

알 방법이 없었다. 몸은 죽었고 넋은 떠났다. 이후의 이야기는 남은 자들이 만들어가면 될 일이다. 그는 이제 지옥에 가 죗값을 치르기만 하면 되었다. 염라의 거울 앞에서 발가벗겨져 숨겨두었던 죄를 모조리 드러내고 긴 심판을 받으면 되었다. 판결을 받고 형벌을 받아 쌓아둔 이자를 모두 치른 언젠가 그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광경을 보리라곤 상상도 못 했단 말이다.

미즈키는 익숙한 집 안에서 마치 유령처럼 떠있었다. 처음에는 흔한 부유령이 된 줄 알았다. 반투명하게 비치는 자신의 몸을 볼 기회란 얼마나 귀한가. 나이도 잊고 들떠 마음껏 움직였다. 하늘인지 신인지 요괴인지 모를 무언가가 간의 시간을 더 허락해 주었다 여겼다. 게게로와 키타로를 보고 싶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데 능했다. 분명 미즈키가 돌아왔다 알아차려 줄 것이었다. 고통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몸을 끌고 그들을 찾은 순간, 미즈키는 보고 말았다. 목격하고 말았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목소리는 세 개였다. 수수께끼의 광경이었다. 심지어 한 남자의 얼굴은 자신과 무척이나 유사하다 못해 똑같았다. 얼굴은 아직 젊은데 머리만 하얗게 변해 있었다. 본능적으로 저 자와 자신은 동일 인물이라는 걸 느꼈다. 미즈키는 또 다른 자신에 충격을 받아야 할지, 말하는 눈알에 충격을 느껴야 할지, 변한 게게로의 분위기에 충격을 금치 못해야 할지 헷갈렸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충격을 알릴 방법도 없었다. 무엇이든 통과하는 몸은 목소리마저 통과시켰다. 아무리 외쳐도 듣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거실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아도 소용없었다, 자신의 모습 역시 젊을 때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은 게 성과의 전부였다. 마치 구별이라도 하듯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그는 늙기 전까지 이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즈키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게게로를 닮아간다 여긴 색이 본래대로 돌아간 게 아쉬우면서도 게게로가 자신의 색에 휩싸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미묘한 감정을 불러왔다. 정신이 몸을 따라가는 것처럼 몰려오는 격정을 인내했다.

그는 사람과 눈알이 대화하고 눈알과 유령이 대립하며 유령이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기묘한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 녀석이 있다는 거지?“

”내 이름을 불러주게. 미즈키“

”맞네. 아직도 보이지 않나? 아직도 자네의 주변에 머물고 있어.“

”핫, 작은 놈을 괴롭히는 건 한심한 짓이란 걸 이제야 알았나 보지?“

”자네가 게게로라 부르지 않았나. 그리 불러주지 않았던가.“

”그것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네만….“

 

게게로, 라 칭해도 좋을까.

그건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잘 찾아보면 그를 표현할 더 거창하고 위대한 단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죽은 미즈키에게 있어, 그건 요괴라 하기엔 참으로 연하고 인간이라 하기엔 참으로 덧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유령이었다. 인지되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불러주길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차마 건들지도 못하고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기만 했다.

 

16.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유령으로 변한지 어언 몇 주. 아니 몇 달인가. 미즈키는 유령족과 인간의 시간의 흐름이 다른 이유를 알아차렸다. 세상에 동화되어 흘러가듯 살 수 있다면 누구라도 알게 될 것이다. 그동안 미즈키는 내내 그들의 대화를 보았다. 붉은색이 특징적인 눈알 역시 게게로라는걸 눈치채는 건 순식간이었다. 흰머리의 미즈키가 눈알이 공중에 떠있다고 놀라는 모습도 겸사겸사 함께 목격했다. 미즈키는 혹시나 해 분리되어 내려온 눈알을 찔러 보았다. 딱딱하지도 말랑하지도 않았다. 공기와 같은 감촉만이 느껴졌다. 집을 벗어나지도 못하게 하면서 만질 수조차 없다니. 참으로 야속한 일이었다.

 

17. 이 집에는 미즈키와 게게로가 두 명씩 있었다.

인간으로서, 요괴로서, 혹은 유령으로서.

 

18. 미즈키는 어느 날 가볍게 생각했다.

부르고 싶다면 내가 불러주면 되지 않을까.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름,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꺼내도 되지 않을까.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게로. 마침내 그것을 입에 담고 말았다.

 

언제나 흰 미즈키를 따라다니던 시선이 서서히 돌아갔다. 눈이 마주쳤다. 미즈키. 언제나 부르던 그의 이름이 낯설게 들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미즈키는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그들을 지켜보며 미즈키는 이곳의 게게로가 자신의 게게로가 아님을 알았다. 이곳의 미즈키가 완전한 의미의 자신이 아니듯이. 그럼에도 게게로가 불러주는 이름에는 그만한 충격이 있었다.

그사이 다른 미즈키와 눈알은 방을 나가고 있었다. 눈알만이 이상함을 느끼고 뒤돌아보았으나, 허공을 보며 미즈키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자신의 몸이 전부였다. 통상의 몸이었다. 곧 따라오겠지. 납득하며 나가는 미즈키를 따라갔다. 그런 주변의 상황도 인식할 수 없었다. 미즈키는 겨우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보였던 거냐?“

게게로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대답해, 게게로!“

마주쳐버린 시선을 피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게게로가 서있는 공간에만 음영이 졌다. 그대로 녹아버릴 듯해 미즈키는 반사적으로 게게로의 팔을 쥐었다. 만져졌다.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았지만, 만질 수 있었다. 그들은 온전히 똑같은 체온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불러버리고 말았구나.“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불러버리고 말았어. 자네만은 끌어들이지 않으려 했네만.“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화가 돋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진 모른 체해왔던 그의 멱살까지 잡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게게로가 울자마자 모두 녹아내렸다. 미즈키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게게로가 우는 얼굴을 아주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미즈키는 다시금 그를 독촉해야 할지, 눈물을 닦아주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둘 다 했다. 끌어들이는 게 무슨 의미냐 물으며 거친 정장 옷감으로 게게로의 얼굴을 문질렀다. 이러면 늘 밝고 얼빠지던 게게로가 되지 않을까 헛된 생각도 함께였다. 게게로는 재주도 좋게 그 상태로 답했다.

”말 그대로일세. 비록 꼴은 이리 됐어도 유령족은 유령족. 미즈키가 날 불러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자네를 불렀어.“

”지금 내 상태가 이런 건.“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어서겠지.“

미즈키의 팔이 멈췄다. 게게로는 아직 닿아있는 팔에 기대듯 고개를 숙였다. 한계까지 물기를 머금은 옷 아래로 눈물이 떨어졌다.

”자네는 지금 삼도천을 건너고 있네. 나를 신경 쓰다간 물에 빠져 흔적도 없이 녹아버릴 테지. 미즈키, 미즈키…. 못 본 척 떠나게. 이 길도 잠시뿐이니. 두 눈을 모두 감고 떠나주게.“

게게로는 고해하는 죄인이었다. 미즈키를 통해 미즈키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미즈키에게 인지되지 않는 게게로, 그런 게게로에게만 인지되는 미즈키. 그도 수수께끼의 굴레에 끼어들었음을 직감했다. 감히 이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동정심이 어울렸다.

”나에게 걸맞는 최후로군.“

게게로가 급히 고개를 올렸다. 미즈키가 웃고 있었다. 다시는 그에게 향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홀릴 수밖에 없는 미소였다.

”딱 좋아. 하나만 물어보자. 만약 내가 여기 뛰어든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그야 당연히 … ….”

미즈키는 답을 들었다. 그가 게게로이고, 그가 미즈키인 이상 변하지 않을 답이었다.

 

19. 미즈키는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움직임을 따라 나룻배가 흔들렸다. 몸을 기울이자 수면이 보였다. 온통 검었다.

망설임 없이 품을 향해 뛰어들었다.

 

20.

풍덩.

그리고 암전.

 

 


빼앗긴 것이 많지요.

양부와 양자, 가족과 친구, 죽음과 인간, 이후의 속.

알고 빼앗겼든 모르고 빼앗겼든 그것들을 암암리에 내비치고 싶었습니다.

이건 강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세계의 게게로를 데리러 가는 미즈키의 이야기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