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괴이담

Tirocinium

권산군 뱀프 au (w.해건)


처음으로 권속을 만들고 알게 된 점이 있다면, 감각의 아주 작은 어느 한 부분이 매 순간 권속의 존재를 감각하고 있다는 거였다. 딱히 대단한 감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기묘한 감각으로도 산군은 짐작할 수 있었다. 권속이 많을수록 뱀파이어는 세상에 좀 더 단단히 발을 디딘 듯한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걸. 그러나 뱀파이어가 세상에 좀 더 단단히 발붙인 듯한 감각을 느껴 무엇할까. 세상에 대한 같잖은 애착이라도 가지게 되려나? 의미없는 짓을.

 

입술에 닿은 살갗 위 숨결 같은 웃음 흘려낸 산군이 제 허리로 사붓하게 감겨드는 다리를 쓸어 올렸다. 바짝 맞닿은 몸, 인간의 온기 가득한 체온이 서늘한 제 체온으로 옮겨붙는 순간이면 산군은 종종 생각했다. 인간의 삶이 보잘 것 없으리만치 짧은 이유가 여기 있을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불태워 소모하는 삶. 어떤 인간들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라 칭송하곤 했다만 글쎄, 산군이 보기에 그 말들은 그저 자신들의 볼품없는 삶을 조금이나마 의미있는 것으로 포장하기 위한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산군에게 인간의 체온이 기꺼운 때는 오로지 흡혈할 때뿐이었다. 그야, 식어빠진 피는 맛이 없으니까. 산군은 제 어깨며 등을 쓸어내리는 손을 가벼이 감싸 당겨 입술을 부볐다. 마치 애정이라도 속삭이듯, 다정하고 부드럽게. 턱선 끝에서 매끄러이 떨어지는 목줄기를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리고 곧게 뻗은 쇄골에 약하게 이를 세웠다. 그것만으로도 밀빛의 피부 위로 가느란 붉은 줄이 생겨났다. 혀를 내어 희미한 핏기를 핥는다. 밀착한 몸 사이에서 가볍게 눌리던 상대의 부푼 가슴을 애무하듯 문지르고 입술로 지분댔다.

 

포식자인 뱀파이어에겐 피식자인 인간을 쉽게 사냥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흔히들 인간을 ‘홀리게 만든다’던지 ‘매혹한다’고 표현하곤 했는데, 일종의 최면처럼 뱀파이어는 인간의 이지를 흐트러뜨릴 수 있었다. 물론 산군이야 경험해본 일이 없으니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뱀파이어가 건 매혹에 빠지면 기분이 몽롱해지고 몸이 달뜬다던가. 제대로 저항할 수 없고, 고통에도 둔감해지므로 그야말로 흡혈당하기에 딱 적당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매혹에서 깨고 나면 대부분의 인간은 매혹에 빠져있던 동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러니 이쪽의 얼굴을 기억할 리도 없고. 포식자로서 인간을 사냥하기에 정말 딱 알맞은 진화가 아닌가.

 

제 아래 깔린 몸 이곳저곳 생채기를 남기며 탐한다. 달뜬 숨 내뱉으며 바르작대는 허리를 쓰다듬고 들숨에 납작해지는 배 위로 입맞춤을 떨구며, 곱아든 발끝으로 시트를 밀어내는 다리를 부드러이 벌려냈다. 별 것 하지 않았음에도 젖어들어 있는 아래를 보며 피식 실소한다. 손가락 두 개를 모아 반질거리는 여린 살을 문지르고 벌어진 틈을 가르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엷은 교성이 터져나오는 것이 들렸다. 뜨겁기까지 한 온도가 손가락을 감싼다. 주름진 안쪽을 더듬어 만지듯 굴면 침대 위 눕혀진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몇 번 들락이듯 움직인 것만으로도 한껏 물기어린 소리가 새어나왔다.

 

애무인지, 희롱인지 모를 것을 이어가며 산군이 고개를 떨구었다. 코끝으로 여리고 보드라운 안쪽 허벅지의 윤곽을 따라 그리듯 쓸었다. 여전히 조금은 서늘한 온도를 띈 입술로 가벼이 머금듯 지분거린다. 설핏 벌어진 산군의 입술 새로 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았다. 내리깐 시선에 한가득 차오른 밀빛의 허벅지로 이를 박아 넣는 행동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입안 가득 뜨겁고 달콤한 피가 차오른다. 혈액 특유의 희미한 쇳내가 코끝을 감돌았다. 허벅지를 감싸쥔 손끝이 짧게 떨린다. 희멀겋기만 하던 뺨이며 목덜미와 같은 피부에 엷은 핏기가 돈다. 산군은 흡혈의 순간을 제법 즐겼다. 몸을 데우는 열기가 성적 흥분의 순간과도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으므로.

 

일정량의 피를 취한 끝에 산군이 입술을 떨어뜨리며 목 안으로 낮은 신음을 삼켰다. 허리를 일으켜 세우곤 혀를 내어 입술 위로 번진 피를 핥아낸다. 안을 휘젓던 젖은 손을 빼내어 산군이 제 것을 감싸 쥐고 훑었다. 침대 위로 흐트러진 여성의 몸이 나른함에 잠식된 것처럼 늘어져 있었다. 매혹으로도 모자라 피까지 잃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더 몽롱할 터였다. 물론 어떤 상태이든 저와는 관계없었다. 직접 걸어 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살려두면 되는 일 아닌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골라왔다면 피를 조금 더 마셔도 괜찮았을텐데. 그 점이 조금 아쉽긴 했다. 돌아가는 길에 피를 좀 더 마실까, 따위의 실없는 생각을 이어가던 산군은 단단히 일어선 제 것을 잔뜩 젖어있는 아래에 부비듯 문지르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삽입해나갔다. 몸을 숙여 한숨 같은 교성 터트리는 입에 가벼이 입맞춘다. 고민은 즐길 걸 다 즐긴 후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하늘은 새파랗고 바람은 가벼이 살랑였다. 마침 토요일이니 어디론가 나들이를 가기엔 금상첨화란 뜻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런 날이면 나들이를 못 가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것처럼 외출을 일삼았다. 물론 인간의 개체 수는 지긋지긋하도록 많았으므로 안 그런 이들도 상당히 많긴 했다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럴 수 없는 인간 또한 존재했다. 예컨대 토요일임에도 잔업을 위해 출근을 했다 밖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가는 저 김해건처럼 말이다. 아직도 인간 음식을 먹네. 한 손에 따뜻한 커피를 든 채 길목에 서 있던 산군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괜히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하곤 짐짓 반가운 기색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잘 지냈냐고 묻기엔 날이 좀 그런가, 토요일에도 출근한 직장인?”

“…시비 거는 건가요.”

“애석하다는 뜻이지.”

 

지난 번 공원에서 제 피를 먹인 이후로 꼬박 석 달 만인가. 저를 무시하고 싶은 듯 걸음을 옮기는 해건과 나란히 걸으며 산군이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잔을 내밀었다.

 

“직장인은 후식으로 커피가 필수 코스 아닌가. 아메리카노 마시지?”

 

해건이 의심서린 눈으로 컵과 산군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산군은 선량한 낯을 해보이며 커피를 재차 내밀었다.

 

“내 권속이 토요일인데도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그런 산군을 조금쯤 이상한 놈 보듯 쳐다보던 해건이 커피를 받아들었다. 의심을 채 거두지 못한 낯이었으나 산군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얼마간 산군의 반응을 더 살피던 해건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작게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산군의 입매에 서린 웃음이 좀 더 짙어졌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듯한 해건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실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산군은 그제야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넌 그게 뭐라고 생각하고 마시는 중일까.”

“…….”

 

짧은 틈이 지나고 해건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파리하던 낯이 더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산군은 퍽 재미난 광경을 본다는 듯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침착을 가장하는 해건의 얼굴이 굳어있었다. 테이크아웃 잔을 거의 떠넘기다시피 되돌려준 해건이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내뱉었다.

 

“다시는 뵐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로 쌩하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산군은 제 손으로 되돌아온 커피를 여유롭게 마셨다. 해건의 반응을 보아하니 지난 번 제 피를 먹인 이후로 변이가 더 빨라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아마도 해건이 근시일에 섭취한 것들 중 이 커피만큼 달고 향긋한 것이 없었으리라. 해건은 이제 뱀파이어 쪽에 좀 더 가까워져 있을 텐데, 이건 인간의 피를 섞은 커피였으니 맛이 남다를 수밖에. 산군은 멀어지는 해건의 뒷모습을 가벼이 일별하곤 돌아섰다.

 

저도 마냥 놀고먹는 컨셉의 삶은 아니었으니 적어도 한 달 정도는 해건을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2주 만에 제 권속을 마주한 지금, 산군은 입가에 피어오르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주저앉은 해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언젠가 억지로 찔러 넣어준 명함을 써먹어 제게 먼저 연락한 것이다. 해건이 자의로 사람을 해쳤다. 아니, 이성을 잃었을 게 빤하니 자의라고 하기엔 약간의 어폐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정에 가까워진 밤, 산군은 셔츠 앞이 피로 얼룩진 해건과 그 옆에 쓰러진 인간을 번갈아보았다. 미약한 숨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첫 흡혈일 텐데도 요령 좋게 사람의 숨을 끊어먹진 않았다 싶었다. 퍽 대견하다는 듯한 목소리라 숨김 없이 흘러나왔다.

 

“다시 볼 일 없으면 좋겠다더니, 이렇게 한층 성장한 모습을 직접 보여줄 줄은 몰랐네.”

 

가로등의 불빛이 채 닿지 않는 건물과 건물의 틈 사이였다. 통행을 위한 길이라기엔 좁고, 끽해야 흡연자들이 잠시 멈춰 서서 담배나 피울까 싶은 정도의. 해건이 있는 안쪽까지 걸어들어간 산군이 허리를 굽혀 해건과 가까이서 눈을 마주했다.

 

“축하해?”

“이게 어떻게 축하할 일인데요.”

“이제 뱀파이어로 첫 발을 뗐다고도 할 수 있을 테니 축하할 일이지. 급하게 오느라 꽃을 못 샀네.”

 

답잖게 가벼운 너스레를 떤 산군이 몸을 일으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엎드린 자세로 쓰러진 인간의 몸을 발로 뒤집었다. 뭐, 이정도면 깔끔하게 물어놨네.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자 해건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것도 당신이 짜고 친 판입니까?”

 

산군의 고개가 설핏 기울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잠시간 해건을 내려다보던 얼굴에 곧 삐뚜름한 웃음이 번진다.

 

“그래, 뭐. 첫 경험이라 당혹스럽겠지. 그래서 남 탓이라고 치부하면 좀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해건아. 이건 오롯이 네 의지로 저지른 일이라는 거 알아둬.”

“……”

“김해건 네가, 못 참고. 물어뜯은 거야.”

 

짐짓 다정한 기색으로 못 박는 음성을 따라 저 파리한 얼굴 위 번지는 감정은 과연 허망함일까, 절망감일까. 이 사건이 오롯이 저 자신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 정도는 깨달은 모양이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서 나한테 연락을 한 건 아무래도 뒤치다꺼리를 해달라는 거겠네. 간도 커? 식사는 혼자서 신나게 해놓고 청소해달라고 날 부르고.”

“이게 어떻게 신나게…!”

“네 입가랑 옷에 증거가 그렇게 잔뜩 남았는데 뭘 발뺌 해.”

 

산군의 길게 뻗은 손가락이 입가와 옷 주변을 가리켜 보이자 해건이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이니까 한 번 정도는 뒤처리 해주지. 두 번은 없으니까 다음부턴 깨끗하게 먹어.”

 

너그러운 어조로 퍽 시혜적인 태도를 내비친 산군이 허릴 숙여 늘어진 인간의 몸을 한 손으로도 가뿐하게 쥐어 올린다. 들어 올려진 몸의 사지가 축 늘어져 가벼이 흔들렸다. 여전히 주저앉은 채인 해건을 흘긋 눈길에 담은 산군이 다른 말을 덧붙이는 대신 그냥 돌아섰다. 이 정도면 제 권속에게 최대한의 친절을 베푼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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