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순리를 따르는 일

마지막 미션


갑작스레 시작되었던 살육의 밤은 시작만큼이나 갑작스레 끝났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움직이기를 멈춘 시체들 사이에서 케일럽은 유일하게 서 있는 존재였다. 시체로 그득한 호텔 로비를 한 바퀴 훑어보았다. 바닥에 흥건한 피, 리셥션 데스크 위를 물들이는 피, 벽에 수놓아진 피. 피. 피. 온 사방이 시체와 피였다. 방금 전까지 뺨에 새롭게 튀었던 피를 닦으려던 케일럽은 멈칫,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 역시 피투성이였다. 얼굴을 닦아내진 못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증명하라 일렀던 목소리가 또 한 번 말했다. 인류의 선한 의지가 이겼다고. 그러니 이제 대가를 치르라고. 

 

"왜 이런 세계를 무너트리려 하는 거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담의, 엘리엇의, 외조모의 목소리가 한데 겹쳐 들려왔다. 언젠가 케일럽이 등을 겨눴던 외조부의 목소리도 거기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목소리를 낼 만한 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았다. 케일럽이 세계를 무너트리려 하는 데에는 그리 거창한 이유가 없었다. 지극히 사적이었다. 그저 삶이 따분하고 지루했다. 또한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복잡했으므로. 지금의 세계가 멸망을 맞이하고 만에 하나 새로운 세계가 열리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달라진 세계에서 저 또한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다였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는다면 그대로도 좋았다. 따분하고 지루한 삶을 끝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되므로. 케일럽은 마담의 말대로 자신이 고장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케일럽이 느끼는 희노애락을 위시한 감정들은 가느다란 실과도 같았다. 너무나도 가늘어 그 존재를 제대로 느낄 수도 없는 그런 것.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감정을 뚜렷하게 느낄 줄 안다. 그런 의미에서 케일럽은 고장난 게 맞았다. 혹은 자신을 구성하는 부품 하나가 없는 채로 태어났거나. 

 

"왜 이런 세계를 무너트리려 하는 거야?"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어릴 적 자신의 목소리와 비슷한 것도 같았다. 발 아래에서 흰 점이 퍼졌다. 둥글게 퍼져나간 흰 빛은 핏자국을, 벽을, 시체를 삼켜나갔다. 케일럽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면 화려한 상들리에는 온데간데 없이 호텔 로비는 온통 흰 빛으로 물든 공간이 되어있었다. 아니, 호텔 로비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공간이었다. 잠시 좌우를 둘러본 케일럽이 걸음을 뗐다. 발자국조차 남지 않는 흰 공간이었다. 방향도 잡지 않고 무작정 뗀 걸음은 흰 빛뿐인 공간을 휘저었다. 하얀 종이 위에 튄 얼룩이 된 기분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기만 할 것 같던 걸음이 멈춘 것은 또 다른 얼룩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케일럽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기억에 있는 얼굴. 이름이 라이언 그레이슨이었던가.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대가를 치르라는 거였다. 상대의 목숨으로, 상대의 피를 흘려 대가를 치루라고.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흰 공간으로 오기 전부터 두 손으로는 셀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나. 

 

"당신, 코람데오였군요."

 

케일럽은 툭하니 내뱉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같은 코람데오의 이름 아래 같은 대행자로 만나 차를 마셨던 이를 이렇게 또 본다니 참 재미있는 인연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케일럽은 잠시 가늠하듯 라이언을 쳐다보았다. 능력이 수인화라고 했었다. 원하는 부분을 동물화 시킬 수 있다고. 원하는 부분이라면 제약없이 원하는 모든 곳을 동물화 시킬 수 있다는 뜻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로? 케일럽은 여상한 얼굴로 손을 들어올려 라이언을 향해 능력을 사용했다. 실체없는 공기를 여러번 쏘아내자 그것을 피하듯 몸을 움직인 라이언이 어느 틈엔가 한 마리 검은 호랑이가 되어 서 있었다. 케일럽의 눈이 크기를 조금 더했다. 그가 동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머리로만 아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검은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뱉고는 케일럽을 향해 달려들었다. 케일럽은 마타도르라도 되는 양 몸을 틀어 달려드는 것을 피했고, 스쳐지나는 호랑이의 몸을 향해 공기를 쏘았다. 공기를 쏜다는 것은 상대방이 공격을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이점이 있으나 케일럽 또한 공격이 향하는 방향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제대로 노렸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는 호랑이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하지만 케일럽은 그것으로 공격을 멈추지 않고 다시 손을 뻗어 호랑이로 변한 라이언의 다리를 노렸다. 사냥을 할 때처럼 숨을 죽이고 침착히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째에 호랑이의 뒷다리에서 피가 튀었다. 

 

절뚝이며 돌아선 푸른 눈의 검은 호랑이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잠시 날아올라 그를 피할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케일럽은 이내 생각을 접었다. 날아올라서는 능력을 동시에 같이 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도망다니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거기 더해 라이언이 날 수 있는 동물로 변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으므로. 케일럽은 몇 번이고 주춤거리며 틈을 살피다 다시 한 번 달려드는 호랑이를 피해 왼쪽으로 크게 훌쩍 물러섰다. 훌쩍 뛰어오르는 순간 등 뒤에서 자라난 에테르의 날개가 퍼덕이며 케일럽의 발을 다시 땅에 닫도록 했다. 날개는 제 할 일을 다 한 듯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케일럽은 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달려드는 호랑이를 피해 다시 몸을 틀었으나, 이번만큼은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배 위로 섬뜩한 통증이 내달리는 순간 손 끝에 닿은 털가죽 입은 몸을 향해 공기를 쏘았다. 푹하고 파고드는 공기의 바람빠지는 소리가 작게 귓가를 스친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케일럽은 배를 감싸쥔 채 휘청이며 뒷걸음질하다, 다리가 풀린 사람처럼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실제로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찢어진 옷 사이 발톱의 궤적대로 벌어진 피부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구친다. 몇 방울의 마른 피가 튀어있을 뿐이던 케일럽의 셔츠가 삽시간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케일럽은 생경한 감각을 느끼듯 제 몸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낯설도록 선명한 감각이었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사람으로 돌아온 라이언이 자리에 선 채 케일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와 한 쪽 허벅지가 피로 물들어있었다. 

 

"왜…멸망을 막으려고, 합니까?" 

"나는 당연한 일을 하는 거예요."

 

멸망을 막는 것이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했는데. 왜 그는 멸망을 막는 일을 당연하다고 하는 걸까. 케일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꼭 뭔가 특별한 것을 느껴야 하나. 맥박에 맞춰 피가 흐르는 상처를 손으로 덮어 가리고 케일럽은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피로가 사지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항상 묻는다. 기분이 어떠냐던가, 감정이 어떠냐던가. 혹은 소감을 말해달라거나, 느끼는 것을 표현하라거나. 케일럽이 손에 쥐고 있는 얇은 감정의 끈들로는 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기가 힘들었다. 

 

"…평소에…겪을 일 없는, 신선한 일이라… 재미있네요." 

 

그래, 차라리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재미라고 부를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 싶었다. 죽음의 숨결에 바로 지척에 닿아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희노애락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머리로는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말을 내뱉은 후 밀려온 피로함에 고개를 떨어뜨렸던 케일럽이 다시 시선을 들어올렸다. 라이언은 여전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왜 멸망을 원하죠?"

"어차피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건데요."

 

멸망을 막겠다는 사람이 멸망을 원하는 사람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케일럽은 그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삶이 따분하고 지겨워서, 라고 대답했을 때 돌아올 라이언의 표정이나 반응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배의 상처는 케일럽으로 하여금 움직임을 아끼게 만들었다. 배 위를 가로지른 상처는 몸을 조금 움직이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평소보다 많은 에너지를 쓰게 만들고 있었다. 케일럽은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떨궜다. 달리기를 한 것처럼 호흡이 조금씩 가빠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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