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어바등-재희무현

[재희무현] 환연 五.

무협au

-드디어 본격 무협장르 같아졌어요

산을 오르던 무현은 손등으로 땀을 훔치고 가져온 물을 들이켰다. 무현이 쉽게 오갈만한 곳은 쓸만한 풀이 더이상 없어서 평소보다 멀리 왔더니 지리가 좀처럼 눈에 익지 않았다. 아침 해가 진작에 떴을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안개 탓에 무현은 한 치 앞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곤란한데. 안 그래도 낯선 지역인데 해 마저 없으니 방향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바위를 발견한 무현이 다가가 이끼를 찾으며 북쪽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아주 미세한 바람소리였다. 산에서 흔하게 들리는 소리로 착각할 수도 있었지만 산에서 거의 살다시피한 무현에게는 어딘가 이질감이 드는 소리였다. 이상한 소리에 의문을 갖기도 전에 먼저 반응한 몸은 흐릿하게 지나가는 빛을 피해 옆으로 굴렀다.

“어…?”

옆으로 한 발짝 구른 무현은 방금까지 제 앞에 있던 바위가 쩌억 갈라진 것을 확인하고 경악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앞으로 엎드렸다. 종으로 그어졌던 빛줄기가 이번에는 횡으로 나무 세 그루를 동시에 쓰러뜨렸다. 나무가 떨어지며 쿵 소리를 내기도 전, 무현은 다시 번쩍이는 빛을 보고 빛이 날아드는 방향과 정면으로 비스듬히 팔을 뻗어 나무뿌리를 잡고 확 잡아당겼다. 무현의 몸보다 단단한 나무뿌리는 잡아 당기는 무현의 몸을 오히려 제쪽으로 끌어당겼다.

힘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나무에 이마를 부딪친 무현은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바로 몸을 앞으로 굴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방금까지만해도 아무도 없던 공간에는 죽립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지저분한 수염을 기른 남자가 무현의 상체만한 길이의 검을 든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행색이 남루한 낭인은 칼을 바로 세우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무공 없는 일반인이라더니, 이걸 피하네?”

“…뭐야? 강도?”

“내가 누군지는 곧 죽을 놈이 알 바가 아니지.”

무현은 쭈그려 앉은 발 끝에 힘을 줬다. 다짜고짜 자신을 해치려 하는 놈에게 순순히 죽어줄 마음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방금까지도 이상한 바람소리와 언뜻 보이는 빛으로 가늠해 겨우 피했다. 자신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낭인의 칼 끝이 하늘로 올라가고, 무현의 눈이 그 모습을 좇았다. 느리고 천천히. 다 헤진 낭인의 옷깃이 어떻게 주름졌다가 펴지는지. 움직이며 생겨난 미풍이 어떻게 옷과 머리카락을 휘감았다가 흩어지는지. 찰나였을 순간이 죽음의 위협에 놓인 무현에게 한없이 늘어졌다.

그리고 칼 끝이 마침내 하늘과 수직을 이룬 순간, 대지가 부서지는 굉음과 함께 무현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뒤늦게 오른쪽 팔뚝에 고통이 밀려왔다. 누군가 옆에서 당목(종을 칠 때 쓰는 큰 나무 막대)이라도 휘둘러 범종 대신 자신을 친 것 같았다. 무현은 왼손으로 팔뚝을 감싼 채 낭인의 다음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돌아선 무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칼을 휘두르는 낭인이 아니었다.

하늘하늘 바람에 나부끼는 얇디 얇은 흰색 멱리 밑으로 눈 부신 백색의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옷도, 신발도, 모든 것이 새하얀 인영의 앞으로 붉은 색의 선혈이 분수처럼 치솟는 모습은 언뜻 아름다워보였다. 대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팔 너머로 곧게 이어진 칼날이 검붉은 빛으로 반짝이는 것에 시선을 빼앗긴 무현은 잠시 처한 상황을 잊고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러나 곧 이성을 되찾은 무현이 새로 나타난 사람이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는 사이에 백색의 무사는 칼을 크게 휘둘러 머금고 있던 핏물을 흙바닥에 뿌리고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움직임으로 칼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멱리가 얼굴과 몸 대부분을 은은하게 가리고 있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선뜻 구분하기 어려웠던 무인은 고개를 살짝 돌려 무현을 확인하더니 나무에 부딪쳤을 때 떨어뜨린 무현의 가죽주머니를 주워 들고 무현에게 다가왔다.

무현이 오른팔을 감싸쥔 채로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게 뒷발을 빼고 경계 태세를 취하자 그는 세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무현에게 손바닥을 들어보인 무사는 가지고 온 가죽 주머니를 무현의 발치에 던졌다. 무현의 시선이 순간 주머니로 향했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으나 무현의 앞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

멀리서 어렴풋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저 멀리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안개가 반대쪽으로 밀려나며 해량과 그의 호위 둘이 달려 왔다. 무현은 낯익은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끈 떨어진 인형처럼 힘 없이 주저앉았다. 놀란 해량이 빠르게 다가와 무현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무현은 잡힌 손목에서 따뜻한 기운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참았던 숨을 뱉었다. 그러고나서야 자신이 지금까지 숨도 못 쉬고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현의 몸을 꼼꼼히 살핀 해량은 그의 몸에 크고 작은 타박상만 있고 치명상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무현을 놓아 주었다. 그 사이 지혁은 기감으로 주변을 살피며 남은 잔당이 있는지 살폈고 애영은 숨이 끊어졌음에도 피를 흘리고 있는 시체를 확인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에….”

뒤늦게 긴장했던 여파가 밀려오며 몸을 덜덜 떠는 무현에게 해량은 더 빨리 오지 못해서 송구하다며 연신 사과했다. 무현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데 지혁이 가까이 다가왔다.

“실은 얼마 전부터 누군가 소가주를 노린다는 첩보가 있었거든요. 이 도시에서 소가주가 선생님 아끼는 것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답니까? 그래서 선생님의 호위도 서고 있었는데 저희가 방심했네요. 미안해요.”

“…제 호위를요?”

“네. 모르셨죠? 선생님 불편하실까봐 몰래 섰습니다.”

무현은 지혁의 발언에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아닌지 몰라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한 번 사과하는 해량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볼 때마다 놀랍도록 잘생긴 남자는 송구스러워하는 모습도 멋있구나…하고 무현이 잠깐 헛생각을 하는 사이 애영은 뒤따라온 호위대에게 낭인의 시체를 맡기고 해량의 곁으로 돌아왔다. 애영이 무슨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해량이 잠깐 애영을 쳐다봤다가 심각해진 얼굴로 무현에게 물었다.

“혹여 저 살수를 베고 선생님을 구해준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네? 아뇨….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못 봤습니다.”

“인상착의는 보셨다는 말이군요. 자세히 알려주시겠습니까? 일단 저희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어….”

습관처럼 거절하려던 무현은 제 꼴을 내려봤다. 흙바닥에 구르고 돌 파편이 튀어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꼴을 가만히 보던 무현은 더 이상 빼지 않고 얌전히 해량을 따라 갔다.

해량의 저택으로 안내 된 무현은 먼저 치료부터 받았다. 구르고 부딪치느라 여기저기 멍이 든 몸 중에 가장 심각한 곳은 오른팔이었다. 의원이 놀란 눈으로 누구한테 얻어 맞았냐고 물었다가 뒤에서 눈썹을 찌푸리며 눈치를 주는 소가주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의원이 물러간 후에 무현이 기대 앉은 침상 옆에 앉은 해량이 물었다.

“죽은 살수가 선생님을 찬 건가요?”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 아마, 저를 도와주신 분이 검을 피하게 하려고 밀었나봅니다.”

무현도 당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몽둥이로 얻어 맞은것 마냥 팔이 아팠을 뿐이었다. 정황상 그 하얀 낭인이 자신을 구해주려다가 힘조절을 못하고 세게 밀어낸 듯 싶었다. 해량은 무현의 목소리에 미미하게 실려 있는 호감을 눈치 채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무현이 해량의 목숨을 구해준 후로 신씨 세가와 엮이긴 했지만 무현은 원래 일반인이었다. 내공과 외공의 차이도 정확히 모르는 일반인.

하지만 해량이 직속 호위단을 풀어 무현을 경호했음에도 떼거지로 나타난 사파 놈들에게 발이 묶여 은인을 죽게 할 뻔 했다. 해량은 잠시간의 고민을 끝내고 무현에게 솔직히 말하기로 결정했다. 이만큼 말려들었으면 박 무현에게 무작정 숨기는 것만이 좋지는 않을 터였다.

“선생님. 정파와 사파, 마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어….”

풀을 캐다 팔아 세금을 내고 먹고 살기도 바쁜 평민에게 무림은 동떨어진 별세계였다. 거기다 무현이 살고 있는 도시는 비록 구파일방같은 큰 세력은 아닐지라도 나름의 역사가 있는 신씨 세가가 치안 관리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 사파는 깡패같다는 소문만 들어봤지 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그 무림맹인가, 거기에 가입되어 있고 협을 중시하는 문파가 정파인 건 압니다. 사파는 소문만 들어봤구요.”

“마교는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요….”

교로 끝나는 것을 보니 사이비 중 하나 같았다. 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해량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무림인이 아닌 사람은 모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마교와 전쟁을 치른지도 몇 백년은 되었을테니까요. 그 뒤로도 자잘한 마도인은 몇 번 나오긴 했으나 일반인은 모르게 덮었습니다.”

해량은 적당히 식은 차를 무현의 잔에 따라주고 자신도 한 모금 마셨다.

“저희가 마교로 정의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맹목적인 종교의 형태를 띠는가. 생명을 함부로 여기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공에 묵기가 도는가.”

“묵기요?”

“내공을 수련하면 개인 또는 문파의 성향에 따라 색채를 띠게 됩니다. 보통은 문파의 역사가 오래되었기에 문파 고유의 색을 따르는 경우가 크죠.

마교의 경우는 교리나 교주가 때때로 바뀌지만 언제나 내공은 새카만 흑색이었습니다. 사파에서도 대체로 어두운 빛을 띠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봐선, 아마 죄업이 내공의 색을 탁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무현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에 색이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는데 더 탁해지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다소 신기했다.

“내공을 사용하면 한동안은 내공의 흔적이 주위에 남습니다. 그런데 아까 선생님을 해치려 했던 자에게 남은 내공에 묵기가 서려있더군요.”

“네?”

무현은 한 순간 자신의 주목을 끌어 당겼던 흰색의 무인을 떠올렸다. 흔들리던 멱리와 옷자락이 생생히 그려졌다.

“마교인은 사람의 목숨을 벌레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교리를 위해, 목적을 위해, 도시 하나 정도는 한순간에 불태울 수 있는 자들입니다. 왜 그가 선생님을 도왔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하십시오.”

“아…음…네….”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무현에게 해량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뒤늦게 한 마디 더 붙였다.

“…그리고 산해객잔의 붉은 머리 점소이와 친하게 지내시는 것 같던데요.”

“아 동백 씨요?”

“…이름으로 부르는 사이셨군요. 이런 말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그와 거리를 조금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왜요?”

갑작스러운 인간 관계에 대한 간섭에 무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량 또한 남에게, 그것도 다 큰 어른에게 이런 간섭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뭔가 그는 수상했다.

“그 자는 뭔가…석연치 않습니다. 최근에 들어온 외부인이기도 하고요.”

“어…음…”

떨떠름해하는 무현에게 해량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자리를 비워주었다. 해량을 노리는 세력의 본거지를 방금 알아냈다며 박살내고 오겠다는 말을 하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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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5

댓글 1


  • 열정적인 뱁새

    흥미진진해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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