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를 위한 공멸
묻겠다.
다만 고통을 공유하는 것은 결국 가장 궁극적인 형태의 이해이자 공존이 아닌가?
어린 아델라이데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정확히는 인간이 어째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려고 결심하면 못 할 것은 또 아니었으나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이유는 쉽다. 아델라이데가 날카로운 진실이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토막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자랐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그러한 것은 유년기 아델라이데가 신경을 기울여야 할 범위 바깥의 일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타인의 상처도 통증도, 그것은 온전히 타인의 소유인 것이다. 아델라이데는 감각할 일이 없는.
그러므로 유년기의 아델라이데가 신경을 기울이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안위 그 자체였다.
당장 오늘 손에 쥐고 먹을 수 있는 빵, 어제 넘어져서 다친 상처, 집구석에서 고함을 질러대며 싸우는 부모님, 집의 지붕에서 뚝 뚝 새서 하필 아델라이데가 잠드는 구석으로 떨어지는 빗물, 내일은 또 뭘로 돈을 벌면 좋을까 하는 고민. 지독하게 원초적인 고민들.
지금 와서 돌이켜 보건대 어머니 또한 악마 계약자였던 것 같다. 악마 계약자도 유전이 되는지 ─ 어머니의 악마가 정확히 누구인지 이런 것들은 지금의 아델라이데도 아직 몰랐다. 다만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은 이 정도다. 어머니의 악마는 '감정'을 주관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자신은 어머니 하나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계약한 악마의 피조물이기도 하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 악마가 상당히 악취미적인 호기심을 지녔다는 것 정도까지.
이름 모를 악마는 어머니와의 계약을 통해 태중의 아델라이데에게서 격렬한 감정을 앗아갔다.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나 첫 울음을 터뜨린 그 순간부터, 아델라이데에게 마치 세상의 모든 감정은 어떤 ─ 희끄무레한 베일에 휩싸인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이 마음에 다가오든 한 꺼풀 꺾여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타인의 이해하고자 하면 또 못 할 것도 아니었으나 그 전에 우선은 논리가 먼저 필요했다. 그러고 나서도 타인의 감정이 마치 제 것처럼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의 감정마저 한 단계 죽어서 감각되는데 타인의 것이라고 잘 될 리 없었다.
다만.
이 세계에서,
타인을 이해하지 않을 것은 권력을 지닌 자들만의 특권이었다.
낡고 먼지 쌓인 뒷골목에서 나고 자란 아델라이데는 억지로라도 타인을 학습해야 했다. 때로는 눈치를 봐야 했고 때로는 비위를 맞춰야 했으며 때로는 납작 엎드려야 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아델라이데는 인간에 대해 배우고 외웠다.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반응을 하는구나, 그 후에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그것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의, 생존을 위한 전략이었다.
그것이 힘겹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기 때문에 아델라이데는 강렬하게 소망했다. 차라리 그 이름 모를 악마가 빼앗아간 감정을 돌려받고 싶다고. 자신 또한 타인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고 싶다고. 타인의 감정에 대해 공감하고 싶다고. 그리고 때로는 강렬한 소망은 기적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것이 축복일지 저주일지는 모르는 일이나. 원한다면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 기적이.
'…당신은?'
공중에 나이와 성별을 종잡을 수 없는 낮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한낱 인간이 나의 이름을 발음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
'…나베리우스.'
'그거면 충분해.'
아, 통증.
그 악마가 아델라이데에게 선사한 것은 그런 종류의 능력이었다.
'아델, 그 눈은 왜 그래?'
'……응? 어렸을 적부터 이랬잖아요. 기억 안 나요?'
그리고 바야흐로 인생 최초의 거짓말.
따라서 통증은 부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그가 원했던 능력이라 칭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아델라이데는 타인에게 자신의 거짓을 진실로 믿도록 새겨넣을 수 있게 하는 대신, 그 타인의 정신을 완벽하게 공유받을 수 있었다. 그 거짓말이 유지되는 이상, 대상자의 고통과 괴로움 따위의 타격은 함께 아델라이데에게도 밀려들어왔다. 그것은 아델라이데가 최초로 감각한 감정 ─ 통증 ─ 그리고 타인의 아픔.
'그대는 이제 거짓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지.'
'그대의 거짓말을 믿는 이와 통증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
'……그러니 묻겠다. 다만 고통을 공유하는 것은 결국 가장 궁극적인 형태의 이해이자 공존이 아닌가?'
최초로 정신적 통증을 ─ 아무런 방벽 없이, 깎여나간 것도 없이 온전하게 감각할 수 있을 때의 그 희열을, 과연 수천가지의 단어를 가져다 붙인다 한들 어떻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아델라이데에게 언제나 통증은 이해이며 희열이 된다.
당신을 감각하고 싶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는 말 또한 그런 뜻이며 ─ 당신이 바라보는 풍경을 함께 보고 싶다는 것 역시도 그런 뜻이다. 통증을 함께 느끼겠다는 뜻이다.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통증으로 치환된다. 둔한 감각은 유일하게 통증만을 지각한다. 그것이 아델라이데가 지각할 수 있는 세상의 전부이기에.
그리하여 그는 평생을 합리와 논리의 그늘 아래 살아왔으나, 언제고 감정과 충동을 선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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