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백호]마음속 꼬마 녀석

백호의 잠 못 드는 밤, 그 곁을 지키는 호열. #호열백호_한주전력 #뽀뽀뽀_240217

호백 뽀뽀해 by 여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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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투정' 사용.

*약 3천 자의 짧고 눅눅한 글.

베개만 베면 잠들어서 뒤통수에 스위치가 달린 거냐고 친구들이 놀리곤 하는 강백호에게도 잠 못 드는 밤이 있다. 오늘따라 방바닥에 냉기가 돌고, 작은 바람에도 덜컹거리는 창문이 요란하며, 훌쩍 자란 몸에 낮게만 느껴지던 천장이 누워서 올려다보면 그렇게 높을 수가 없는 밤. 그런 날이면 백호는 제 속에 꼬마 녀석이 들어앉은 것만 같다.

이 조그마한 꼬마 녀석은 다른 친구들보다 한 뼘은 더 자란 백호의 몸과는 맞지 않아서 꼭 빈자리를 느끼게 만든다. 마음과 몸이 맞지 않으면 그 틈으로 찬기가 스며드는 법. 아무리 몸에 열이 많고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썼어도 가슴 안쪽 틈에 고인 찬기는 백호를 잠 못 들게 했다.

그럴 때면 백호는 전화기 옆에 쭈그려 앉아 더듬더듬 손에 익은 번호를 눌렀다. 틀리지 않고 제대로 누르면 긴 수신음 끝에 늘어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백호야?

상대는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백호를 알아챈다. 이 시간에 전화 걸 사람은 백호밖에 없으니까. 그 사실이 미안해서 주절주절 아무 얘기나 주워섬기면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상대가 말한다.

-야, 너 때문에 잠 다 깼잖아. 지금 너네 집 갈 테니까 좀 재워주라.

백호는 괜한 거절을 몇 번 흘리다 마지못해 허락했다. 제 목소리에 섞인 기쁨을 들켰을까 걱정하기도 전에 상대는 금방 가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백호는 서둘러 이불을 더 꺼내 자리를 정돈하고 불 꺼진 현관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러면 속 안의 찬기가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시린 밤공기를 휘감은 양호열이 들어온다.

호열은 익숙하게 백호를 일으켜 세우고 두툼한 요 위에 눕혔다. 손끝에 묻은 찬 바람이 피부에 닿지만 틈에 서린 찬기에 비하면 별거 아니다. 백호는 호열을 잡아당겨 자기 옆에 눕혔다.

“나 겉옷도 안 벗었는데? 이불 더러워지잖냐.”

그렇게 타박하면서도 호열은 백호를 밀어내지 않고 누운 채로 겉옷을 벗었다. 옷을 대충 구석에 던져 놓고 옆으로 몸을 돌려 눈을 맞추는 호열의 얼굴에는 역시나 잠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밤거리를 걸어도 깨지 않은 잠을 이겨내고 두 눈으로 백호를 살핀다. 아마 그는 내일, 아니,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 온종일 개운치 못할 것이다. 그것이 미안해서 입을 삐죽이고 있으면 호열이 팔을 툭툭, 무심한 듯하면서 걱정을 담아 두드린다.

“나 안 재워주냐? 아침에 머리 넘기려면 빨리 일어나야 한다고.”

백호는 고민하다 자장가라도 불러줄까, 묻는다. 낄낄 웃은 호열이 잠만 더 깰 거라며 아무 얘기나 해보라고 부추긴다. 백호는 그렇게 했다.

점심에 먹은 빵이 맛있었고, 얼마 전에 옆반 여학생이랑 인사했다고 자랑하고, 고등학교는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 뒤에야 백호는 조용조용 본심을 꺼낸다. 호열은 반쯤 감은 눈으로 귀 기울여 들었다. 잠을 이겨내려 애쓰는 눈동자가 다정하게 빛난다.

저런 눈은 꼭 이렇게 백호가 잠 못 드는 밤, 솔직하지 못한 투정을 부려 기어코 호열이 밤거리를 걷게 만들고, 한참 딴 얘기를 하다가 마음속 꼬마 녀석 때문에 얼마나 속이 시린지 슬쩍 고백할 때만 볼 수 있다. 그런 귀한 눈앞에서 백호는 마음껏 투정 부렸다.

“나 너무 춥다, 호열아.”

그러면 평소처럼 호쾌하진 않지만 다른 백군 녀석들이 보면 깜짝 놀랄 만큼 다정한 미소를 지은 호열이 팔을 벌린다. 커다란 몸을 구겨가며 꾸물꾸물 작은 품에 머리부터 들이민다. 닿은 몸으로 호열이 잔잔히 웃는 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투박한 손이 머리에 얹어졌다. 허락을 구하듯 살살 쓰다듬는 손길에 가만히 있으면 어깨를 쓸고 등으로 내려간 손이 부드럽게 도닥이기 시작했다.

이 다정한 품에서 마음속 꼬마 녀석이 점점 자라난다. 문을 열고 인사를 던져도 아무도 돌려주지 않고 온기 없이 차가운 텅 빈 집을 볼 때마다 쪼그라들던 녀석이 씩씩하게 몸집을 불린다. 몸과 마음의 틈에 더는 찬기가 들지 않게, 외로움이 스미지 않게. 내일은 평소처럼 웃을 수 있게.

커다란 꼬마가 작지만 넓은 품에서 잠들었다.


“호열이 녀석, 오늘따라 엄청 조네.”

“백호는 답지 않게 수발을 들고 앉았고. 썩 도움은 안 되지만.”

“어제 호열이가 꽤 고생했나 보다.”

대남과 구식, 용팔은 여느 때처럼 옥상에서 점심을 먹고 놀다가 호열이 이제 자야 하니까 시끄럽게 굴지 말라는 백호의 닦달에 쫓겨났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원인도 알고 있었고.

용팔이 혀를 찼다.

“가끔은 우리 불러도 된다니까 꼭 호열이만 부른단 말이지.”

“얌마, 아무리 그래도 널 부르긴 힘들지. 전에 한바탕 혼났다면서.”

“그리고 너 빼고 부르는 것보단 한 명만 부르는 게 낫지 않냐?”

“듣고 보니 그렇네. 나 빼고 모이기만 해 봐라!”

“우하하하! 하지만 매번 일찍 가는 건 너잖냐! 오늘 있을 제8회 백호군단 모임에서 또 이용팔만 집에 가겠구나!”

“통금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 재밌게 놀아주마!”

“이 자식들이?!”

세 사람은 시끄럽게 장난치며 학교를 빠져나갔다. 오늘 오후 수업은 땡땡이다. 잠 못 드는 친구가 오늘은 푹 잘 수 있도록 신나게 놀 준비를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저기 서점 좀 들리자. 점프 신간 사서 가져가게. 너희는 뭐 챙길 거냐?”

“난 E.T 비디오랑 카드.”

“또 자전거 타는 외계인이야? 다른 건 없어?”

“있는데 백호가 이걸 제일 좋아하잖아.”

“그건 그렇지. 참고로 오늘 과자는 내가 쏜다. 머리당 하나씩 골라!”

“오오오오! 통 큰데, 노구식! 어쩐 일이냐?”

“후후후, 마침 어제 용돈을 받았지.”

“그럼 오늘 물주는 너다! 이 자식 지갑 다 털어버려!”

호열과 백호는 낮잠 좀 자고 알아서 백호의 집으로 올 것이다. 집 열쇠는 미리 받아두었다. 먼저 가서 놀고 있다가 두 사람이 합류하면 백호군단의 비정기 모임이 시작된다. 작년 이맘때 시작한 모임의 목적은 단순하다.

신나게 놀고 먹고 게임하다 끝내주게 잠드는 것!

비록 용팔은 점프 읽고 과자를 먹으며 카드 게임 좀 하다가 먼저 집에 가겠지만, 그가 남기고 간 비디오를 보고 훌쩍훌쩍 우는 백호를 신나게 놀리다 박치기 한 방씩 맞은 다음 와글와글 모여서 씻고 나란히 누우면 다들 순식간에 잠들 곤 했다. 물론 백호가 잘 잠들었는지 확인한 뒤에야 다른 세 사람도 눈을 붙였지만.

이렇게 모이고 난 다음 날이면 언제 기운 없었냐는 듯 완벽하게 부활한 백호를 볼 수 있기에 멋대로 외박했다며 혼내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오늘 밤은 아무도 찬기에 떨며 잠을 설치지 않을 것이다. 찬기가 파고들 틈 없이 신나게 놀아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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