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저지의 기억 하나
Esh Eil, 블루벨 버드
* '자캐 커뮤니티 <Esh Eil>'을 러닝한 블루벨 버드의 과거 로그입니다.
최초의 기억은 동부저지의 들판에서부터 시작했다. 10세 무렵의 일이라고 여기는 그 기억은 어째서인지 지금도 잊히지 않고 선명하게 그려졌다.
눈을 뜨고 나서는 가만히 눈꺼풀을 끔뻑이며 하늘만 보았다. 날씨는 조금 더웠지만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고, 들판에 무성한 풀들이 푹신해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이곳에 서 있는지를 떠올리려고 할 때면 두통이 몰려와서 기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다른 건 떠올리기를 포기하고 들판을 정처 없이 걸었다.
끝도 없이 푸른 들판을 걸으며 여러 풍경을 보았다. 강줄기를 따라 시원하게 굽이치는 시냇물이 보였고, 그 강 너머에 깎아지른 듯한 협곡이 보였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다 발길이 멈춘 곳에는 파란색이 넘실거리는 꽃밭이 있었다. 나는 그 꽃밭에 홀린 듯이 다가갔다.
“이 꽃은 ‘블루벨’이라고 해. 이렇게 꽃밭으로 보니까 마치 하늘의 한쪽을 따와서 땅에 심어둔 것 같지 않니?”
꽃밭에 들어가니 누군가가 해준 말이 머릿속에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가까스로 떠올린 기억이었으나 그 문장만이 머릿속에 맴돌 뿐 누가 해준 것인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목소리만이 선명하고 말을 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오히려 괴로웠다. 하지만 꽃을 계속 보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서 나는 직감적으로 ‘이 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내 이름은 ‘블루벨’이 되었다. 혹시라도 이 이름을 듣고서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어린아이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부저지에 있는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내 기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때는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인지, 기억을 잃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게 친절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떠날 때 먹으라며 음식을 주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은 방을 빌려줄 수 있다며 하룻밤을 묵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그런 도움이 무색하게도 의미 있는 기억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고작 해봐야 생일이나, 수프와 단 것을 좋아했다는 정도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큰 수확 없이 동부저지 방방곡곡을 둘러본 것도 거의 1년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어쩌다 보니 신세 지게 된 마을은 며칠 전 드래곤족 한 마리로 인해 화를 입은 곳이었다. 아주 큰 사고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불에 탄 건물도 조금 있었고 경중에 상관없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작은 손이나마 빌려드리고 싶어서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자잘한 일들을 조금씩 도와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 성도에서 치유사를 파견해 마을에 내려보냈다. 트리시아와 내가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그와 만나고 난 후로 짧은 악연이 스쳐 지나갔지만, 오히려 그 사람은 내게 자신을 따라오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다. 한 번은 거절했더니, 갑자기 억지를 쓰며 나를 데려가겠다고 아예 못까지 박아버렸다.
처음에는 기억 찾기도 바쁜데 따라가서 심부름꾼 노릇까지 해야 하는 게 달갑지도 않았고, 나를 얼마나 보았다고 데려가겠다고 하는지 의심부터 갔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트리시아의 억지에 어울려 준 이유는… 나의 변덕도 있었지만 그를 따라다니며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억도 되찾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그와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20년이 넘도록 내 기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은 어린 시절만큼 잃어버린 기억에 목을 매지는 않는다. 내게는 이제 가족이 생겼으며, 호의로 가득 찬 추억이 어린 시절을 덮을 만큼 많이 쌓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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