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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

클라디아스 해밍턴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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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파해갈 무렵 오스카 울스워터는 거의 모든 것에 진력이 나 있었다. 예의를 모르고 옷자락을 스쳐 지나가는 여러 얼굴 없는 손, 걸핏하면 발끝을 밟는 데뷔탕트들의 구둣발과 먹잇감을 찾아 눈을 굴리는 늙은이들… 무대 위에서 악사들이 오토마타처럼 반복해 연주하는 수십 가지의 무곡이 그 모든 광경에 무료함을 한층 더해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재미를 보지 못한 여러 귀족이나 방탕한 명분 아래 본 목적을 달성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저택을 떠나고 없었다. 오스카는 제 이름과 직위에 발이 묶여 비교적 오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이제는 자리를 비워도 될 성싶었다. 한창 정원이 시끄러울 볕 좋은 오후에 오스카는 조용히 대령해 놓은 마차로 향했다. 분명 별달리 떠난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몇몇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인사해야 할 사람들은 일찍이 개인적으로 인사를 마치고 왔기 때문에 오스카는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썩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 사이에서도 내심 기대하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은 들었다. 높은 발판을 딛고 마차에 올라타며 주변을 둘러보던 오스카는 마침 눈이 마주친 남자를 손짓해 불렀다.

 

해밍턴 후작은 어디 있나?

아, 그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그는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실상 해밍턴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스카는 짧게 혀를 찼다. 됐다, 그렇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저 멀리 인파 너머로 검은 쇠창살로 된 저택의 정문을 여는 이가 보였다. 클라디아스 해밍턴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멀리 서 있었지만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오스카는 팔을 뻗어 해밍턴에게 손을 까딱거렸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손짓 한 번에 그는 머뭇거리다 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 오스카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멈춰선 클라디아스가 좀 더 다가올 때까지. 얼굴을 조금 굳히면서도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물러설 때쯤 오스카는 클라디아스를 내려다보고 옷깃을 가다듬어 주며 넌지시 물었다.

 

언제쯤 떠날 생각인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클라디아스는 도저히 영문을 알지 못하는 얼굴로 미간을 좁히면서도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볼일이 끝나면… 떠날 생각입니다.

그대 같은 이도 이런 곳에 볼일이 있나?

 

그는 짐짓 의아한 체하는 목소리 아래 놀림조를 곧바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건 경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옅은 조소와 함께 돌아온 대답에 비해 그는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오스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클라디아스는 오스카의 반응을 일일이 살피는 대신 입을 꾹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를 채근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오스카는 그의 태도를 꼬집는 대신 옷깃을 매만지던 손을 옮겼다. 장갑 낀 손끝이 그의 턱을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그대는 내게 빚이 있는 걸 잊지 말게.

 

오스카는 둘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러자 클라디아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주저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오스카는 그가 분명 제 덫에 걸려들었으리라고…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

 

연회에서 돌아올 때는 눈이 녹아가는 겨울이었으므로 머지않아 봄꽃의 순이 트기 시작했다. 정원사들이 바빠지는 계절이었다. 오스카는 한가한 날이면 가벼운 겉옷을 걸치고 정원에 나가 사용인들이 오가는 것을 구경하며 괜한 말을 한두 마디씩 얹었다. 머지않아 영지의 주인이 바뀔 것을 직감한 몇몇 사용인들은 그것을 짓궂은 도련님의 농담으로 넘기지 않고 조용히 그의 말을 따르곤 했다.

그리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봉오리가 성급히 영글어갈 때쯤 울스워터 저로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오스카의 앞으로 온 것이었다. 문장 없이 그저 붉은 밀랍으로 봉한 편지 안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어떻게 갚길 원하냐니. 턱을 괴고 의자에 앉은 채 편지지를 꽉 채운 여백을 바라보며 오스카는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는 그에 대해 오래 생각하면서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적잖이 짜증이 나 있던 참이라 그의 편지는 오스카에게 있어 드물게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도망치는 법을 모르는 자로군. 확실히 빚을 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밍턴은 덫에 걸린 새였고 그의 처분은 오롯이 오스카에게 달려 있었다. 그런데 오스카는 사실 자신이 왜 그 새를 갖고 싶어 했는지, 왜 덫을 놓고 그 새가 잡히기를 기다렸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 무의식 속 깊은 곳에선 아직 그에게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인가? 마치 비단과도 같은 값비싼 종이를 엄지로 매만지며 오스카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어떤 이유든 전부 옳다. 어쨌든 오스카는 클라디아스에게 아직 만족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말대로 빚은 아직 남아 있었다. 오스카는 그가 이 여백을 전부 채워오기를 원했다. 오스카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온전한 그의 자의로 갈구하는 편지 한 장을 갖고 오길 바랐다. 쓰이는 단어 하나하나도 쉽게 골라선 안 되며, 신중하고 또 긴장하며, 한껏 애쓰고 공을 들여서, 그가 아는 여러 문장 중에서도 가장 보기 좋고 정갈한 것으로만 선별하여서 완벽한 한 장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결국은 자존심 싸움이었다. 묻어두기로 해놓고는 아직도 그러지 못한 거야. 그러나 오스카는 부끄럽지 않았다. 그게 잘못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유치한 힘겨루기에서 시작된 일일지라도 원하게 되었다면, 그래서 손에 넣기로 결심했다면 그건 오스카에게는 더 이상 유치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텅 빈 양피지를 펼쳐놓고 깃펜을 손에 쥔 채로 첫 문장을 고민하던 오스카는 고작 술 한 잔에 술을 처음 마시던 아이처럼 눈가를 붉히던 해밍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해밍턴이 아니라 클라디아스의 고유한 얼굴이었다. 그는 모두에게 그랬듯 오스카에게도 자신을 윌이라 부를 것을 간청했으나, 오스카의 앞에서 클라디아스는 윌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분명 그럴 것이다. 오스카는 이미 첫 단추를 끼웠다. 어긋났다고 생각했던 그것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제법 괜찮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저 그게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끝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리고 오스카는 한결 즐거운 마음이 되어 막힘없이 글을 써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서기가 없이도 훌륭한 글씨와 문장을 만들 줄 알았고, 남의 손을 거치지 않은 글만이 클라디아스에게 온전한 제 뜻을 전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클라디아스가 고민 끝에 오스카에게 단 한 줄을 적어 보내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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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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