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EAEN

고삐

매듭 / 220223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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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비위를 맞추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오스카는 기대 이하의 것에 미미한 짜증을 느꼈다. 열렬히 타오르는 감정은 금세 재가 되어 사라지건만 정작 얕은 불은 바람이 불어도 쉬이 꺼지지 않았다. 억누르기엔 미미하고 내버려 두기엔 속이 쓰리다.

*

‘윌리엄이었나?’ 

세간의 소문이란 소문은 전부 귀에 흘러 들어왔으나 오스카는 왜인지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먼저 클라디아스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 애칭에서부터 제 무의식이 안일하게 추측해낸 게 아닌가 의심되었고, 또 몇 시간 전의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 사소한 일에 기분이 상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오스카는 자신을 눈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여태껏 제 눈으로 본 사실은 그랬다……. 

그러니 해밍턴 후작이 그 기색을 숨길 만큼 능숙하거나 불쾌한 감정을 잊게 할 만큼 아양을 떨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테다. 그러지 못했다는 게 문제다. 분위기를 몰라서 흠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분명 그랬을 텐데. 사람은 그렇게 빨리 바뀌지 않는다지만. 오스카는 말채찍의 손잡이를 손 안에서 만지작거리며 눈을 감고 있다가 종래에는 짜증이 나 그것을 벽에 집어던졌다. 어린 아이의 투정이 아니었기에 살벌한 소리 후 조용해졌다. 

여하튼 오스카 울스워터는 그런 일에 하루종일 신경을 쏟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일련의 해프닝은 잠든 사이 오래된 분노에 잡아먹혀 사라졌다. 약혼은 맹약이고 사교는 전략이므로 그는 당장 눈 앞에 있는 것에 집중했다.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웃음이 사고에 빈틈을 만들어주었다. 날이 밝았다가 저무는 내내 오스카는 어제 느꼈던 불쾌감에 대해서는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고,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더라도 그때만큼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게 정중한 노크 뒤로 문을 열고 들어온 클라디아스에게 웃어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애초 그 또한 반색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으나 한 손에 병이 들려있는 것만은 의외였다. 오스카는 뒤늦게 그 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해냈다. 웃지 못하는 해밍턴 후작에게 싱글거리며 병을 들려보냈을 헤드리스 공작의 얼굴이 선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굳이 나에게 가지고 올 필요가 있었나……. 

오스카는 그 자신이 당장은 클라디아스에게 분노나 기대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어 어제만큼 감정이 동요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아량인가, 체념인가. 확실한 건 오스카는 무자비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클라디아스가 영영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한 번은 용서했을 것이다. 다만 제 발로 찾아온 이상 혼자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오스카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는 대신 그저 무식하게 보울을 꽉 채운 와인이 넘실거리는 것, 이윽고 그의 손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것을 눈으로 쫓았다. 웃지 않는 술자리는 오스카에게도 꽤나 어색한 것이다. 그러나 한결 나쁘지 않은 기분이 되어 오스카는 클라디아스가 홀로 잔을 비우는 것을 구경했다. 단숨에 비우지도 못하고 눈을 연신 깜빡이는 것을 보니 딱 보아도 술에 강한 이는 아니었다. 

애초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클라디아스는 거칠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어떤 방식이든… 빚을 지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며 오스카는 생각한다. 고작 술 반 병이 아까워 그의 이름에 빚을 달아둘 만큼 인색하지는 않다. 그러나 클라디아스는 그것을 알든 모르든 필시 찾아왔을 거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렇다면 왜? 용서를 구하고 싶었나? 아니면 그냥 마음 편해지고 싶었을 뿐인가? 아, 답지 않게 유치한 소리를 하고 있군. 나야말로……. 낮은 한숨을 삼키며 오스카는 걸터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서둘러 제 몫을 비우고 나가기 위해 다시금 잔에 손을 뻗고 있었다.

*

오스카가 보기에 그는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밍턴 후작.”

그리 건조하게 불린 이는 걸음을 마음대로 멈추질 못했다. 저렇게 술에 약한 사람이 무슨 객기가 일어 혼자 이런 퍼포먼스나 벌일 생각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사실 그 모습이 제게 희미한 즐거움을 준 것또한 사실이었다. 오스카는 그 새 조금 노곤한 기분이 되어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때 그는 성조차도 양보하지 못해 같은 배에서 난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냈다. 그런데 누군가는 오로지 타인의 이름을 듣기 위해 자신이 이름 불릴 기회를 내버린다니. 

애틋하기도 하지, 올리. 그리고 태생적으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류를 고르라 하면 꼭 그와 같은 부류일 것이다. 그러나……. 피곤한 낯빛으로 눈썹 위쪽을 문지르던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어제는 나도 감정이 앞섰네. 다시 그러지만 말아.”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또 남에게 매정한 성정은 아니었다. 또 오스카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더 캐내지 않기로 하여 묻어두고 나면 어떤 고민이든 그의 안에서는 완전히 종결에 이르는 것이다. 다만 시간이 조금 필요했던 게 마음에 걸린다. 아니, 끝내 억눌렀으니 아무래도 좋은가.

다음에 또 와. 그 때는 함께 한 잔 하지. 뒤통수에 대고 축객령을 내린 그가 손을 휘적거린다.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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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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