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모모세 아마네 개인지 후기】잘 부탁드립니다. 모모세 아마네입니다!

부제 : 모모세 아마네 회지는 모모세 아마네 오시의 필독서다

기타 by 현
58
0
0

다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작성된 글입니다. 오타, 문맥 오류, 혹은 이 부분은 뭔 헛소리지 싶으신 부분을 일러주신다면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불친절한 글이므로 내용 정독 후 읽으심을 추천드립니다.

가정폭력•종교적 가해(소재)•살인 등에 대한 언급과 설명이 있습니다.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초반 부분은 온전히 회지에 대한 후기, 그리고 그 아래 1차 경고 이후 분석글이 있습니다.

여러모로 자잘한 디테일이나 숨겨진 의도같은… 신경쓰신 게 많은 것 같은데 의도를 콕 집기에는 제가 디테일과는 먼 사람이라 우선 죄송하단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우선 이 이야기는 왜? 어째서? 어떻게?를 줄곧 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모세 아마네가 왜 종교를 (현재 진행형으로) 믿는지, 어째서 종교(부모)를 포기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종교를 믿게 되었는지, 과거에서부터 찬찬히 거슬러와 우리에게 모모세 아마네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통 그림은 시각적이기 때문에 타인의 삶을 본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나 소설이고, 1인칭이기에 우리는 모모세 아마네(부모에게 종교를 믿고 따를 것을 강요받고, 그런 그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종교를 믿고, 착한 아이가 되며, 그들을 사랑하는 한 아이)가 되어, 모모세 아마네의 사고방식으로 모모세 아마네의 삶을 바라보게됩니다.

위에서 나열한 것으로 우리가 추측한, 그리고 이 개인지 속에서의 아마네의 삶은 우리의 예상대로입니다. 강박적이고, 엄격하며, 무섭고, 끔찍하기도 합니다. 어딜 봐도 학대고, 가정폭력이며, [어린아이가 겪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성인(준성인)에 가까운 우리의 입장에서 아마네의 삶은 겪기 싫은 끔찍한 것이고요.

특히 아마네의 경우 종교와 그로 인해 받았을 폭력이 여실히 드러나서 밀그램의 누구보다(그나마 하루카가 비슷한 수준일까요) 확연히 「피해자」로서 인식이 박히죠.

게다가 종교의 규칙도, 그로 인해 제한된 삶도, 고통을 시련이라 칭하는 아마네의 태도는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공감도 거의 못 하실 거고요. 그러니 아마네는 몰이해로 인하여 [종교에 세뇌된 어린아이]가 되어버리죠. 가엾다. 불쌍하다. 그런 인식이 되어버려요.

그러나 아마네는 다릅니다. 그 끔찍한 행위를 사랑으로 취급하며, 그들을 사랑하기에 사랑받으려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따릅니다. 이렇게 문장으로 정리하면 우리는 당연히 아마네가 처음에는 다소 불쌍할 수 있습니다. 불행해보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이 개인지를 읽다보면 느끼는, 모모세 아마네의 시점에서 본 그 삶은 너무나도 평범한 가정입니다. 다친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며 자연스레 그에 답하는 아마네, 서로를 사랑한다 말하는 가족, 평범한 학교 생활과 사소하지만 소중한 추억들까지.

아마네가 말했던 “사람을 불행하다고 단정짓지 말아주세요. 조금 엄격해서 힘들 때가 있어도 저는 행복해요”라고 했던 말은 이 회지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행복이 아니라고 한들, 아마네가 겪었던 행복과 일상이 단번에 거짓이 되지는 않습니다. 없었던 일이 되지도 않고요. 모모세 아마네는 이런 [비정상]인 삶 속에서 충분히 행복했어요.

본인께는 따로 말씀드렸지만 저는 오므햄 님의 개인지는 늘 이런 분위기라서 좋아해요. 당연히 네 삶은 불행할 거라고 은연중에 단정지은 우리에게 그들은 자신의 기억을 건네어주며 이 삶이 불행하지 않다고, 그저 나의 삶(보통)에 불과하다고… 혹은 이 요소로 인해 나는 행복하다고 말해옵니다. 전 그게 좋았어요. 그저 평범한 한 사람 분의 삶이 거기에 있으니까요. 그런 삶의 불행과 행복에 각각 조명을 비추지만, 그것을 묘사하면서도 평범하다는 걸 말하고 있으니까요.

앞서 내셨던 사쿠라이 하루카(01), 카지야마 후우타(03), 카야노 미코토(09) 소설은 그나마 [불행]과 [행복]이 묘하게 나뉘어져있었습니다. 특히 후우타의 경우는 [학교]가 불행, [가정]이 행복이라는 형태였습니다(물론 그런 이분법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굳이 나눴을 때의 이야기고요). 그랬지만 아마네의 경우는 아마네의 행복은 우리에게 불행이고, 우리의 행복(단 것, 무지, 어리광 등 당연한 행복)가 아마네에게는 불행(가져서는 안 될 것)이고요.

그 간극을 메우고, 모모세 아마네가 생각하는 사랑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저는 정말로 대단하시다고 생각해요. 후후, 같은 말의 반복일까요. 말을 정리하는 건 서툴러서요. 그렇지만 정말로 좋았어요. 모모세 아마네의 단편을 주운 것 같아서. 비로소 모모세 아마네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그 부분에서 많은 분들이 이 회지에 매력을 느끼셨다고도 생각하고요.

자, 여기서 스탑.

혹시 지금이라도 난 스포 없이 모모세 아마네 회지를 감상하고 싶어지셨다, 그런 분께서는 여기로 가셔서 당장 구매하시길 바랍니다. 혹은 오므햄 님의 계정으로 가셔서 샘플 구경하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다른 샘플도 다 흥미로우니 같이 감상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오므햄 님 개인지를 보면서 하나, 둘… 점점 애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아래는 정말로 본편 내용을 스포일러 이상의 수준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반절은 분석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의적인 해석과 추측이 난무합니다. 주의하시길 바라며 귀여운 아마네 한 번 보시고 가시길 바랍니다.

일단은 표지가 무척 좋았어요. 전 처음 봤을 때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인이 이거 표정이 반반씩 달라요,라고 하시고서야 눈치를 챘습니다.

왼쪽은 종교의 의미인 빙글 돌아가는 눈동자에다가 입모양도 다르고, 오른쪽은 멀쩡한 눈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있고요. 맞은 흔적도 있네요. 이건 다른가. 그리고 아마네가 땀도 흘리고 있는데, 고양이를 치료해줄 때처럼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면 고통을 참고 있거나 혹은 물고문의 흔적…이건 너무 간 것 같으니 잊어주시길 바랍니다. 떠오른 추측을 다 말해볼 뿐이니까요.

고양이 목줄이 반쯤 풀려있는 걸 보면 아마네가 고양이를 치료해줬으나 그것이 들켜 고양이에게 해가 가해진 이후…라고도 생각이 듭니다. 그 고양이가 아마네에게 활짝 웃고 있는 건 역시 아마네의 희망이나 바람일까요.

나쁜 아이는 벌을 받아야 하니까요,라는 문장은 부모가 아마네에게 주입한 폭력의 정당성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아마네가 타인에게 저지르는 일종의 또 다른 폭력(신체적 폭력 뿐만이 아니라 약간의 굴복시키겠다는...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 식의)의 정당성이 되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실제로 이후의 사건들(어머니를 죽인 일, 사상을 부정한 에스에게 가위를 휘두른 일)도 그런 이유로 저질러지니까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거지만 역시 모모세 아마네는 어린아이고, 미성숙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스러운 것이 미덕이기에, 그런 자신이 가정 내에서 긍정받았기에, 그리고 그런 자신을 추구했기에 아마네는 무척이나 어른스럽지만 역시 히라타의 도발에 간단히 넘어간다던가… 상황에 휩쓸려 시간을 놓쳐 달려간다던가. 그러나 그런 어린애다운 모습이 아마네에게 다소의 시련이나 위협을 가져다주는 걸 보면 아마네가 어른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알겠지만요.

뭐, 그렇지만 에스가 말했듯 아마네의 자아는 특수한 환경에서 자란 자아니까요.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 하는… 사회성이라고 할까, 적어도 사람 그것도 같은 나이대의 사람을 대하는 법은 다소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단어 뜻을 구구절절 설명한다거나 국어사전이냐는 물음에 국어는 좋아한다고 답하거나. 아마네는 또래와 교류할 시간도 없고, 기회도 없었으니까요. 하교 후엔 바로 집으로 가야 했고요. 그 점이 더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하니 지식은 많고 어린아이치고는 어른스러운 태도들로 조금 가려지는 면이지만요.

아마네에게 있어 어른스러운 건 본인의 욕구를 참는 행위로 학습된 것 같기도 하네요. 정확히는 어린아이다운 면모를 드러내지 않는 것,겠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아마네의 기준은 너무나도 모호하기 때문에... 동물을 만지고 싶다라는 요구마저도 어린아이가 할 법한 짓이라고 치부하니 말이죠...

그리고 이 부분은 다시 읽어보니 좋은 점이 유령이 있다고 말하는 히라타에게 아마네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듯. 이것도 제법 아마네의 현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네에게 있어서 상식인 유령이 없다,를 주장하는 히라타와 그런 근거 없는 말을 인정하지 못해 부정하려는 아마네. 꽤 닮아있지 않나요? 신은 없다, 혹은 신앙을 가진 아마네를 부정한 에스와 신은 있다, 나는 신을 믿는다…라고 「근거없이」 주장하는 아마네. 곰곰히 생각해보니 꽤 비슷해서 즐거웠습니다. 일부러 이런 주제를 선정하셨나 싶을 정도로요. 이제는 아마네가 부정당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재미있네요.

아마네의 독백 중 “노력은 보답받는 법이니까요. 아니, 받아야만 합니다”가 역시 아마네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과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싶네요. 역으로 말하자면 보상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도 될 거고요. 아마네가 추후 사랑받기 위해 먼저 사랑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걸 떠올리면 역시 맞는 걸까요. 애초에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도 「칭찬해줄 것이다」라고 생각했고요.

이걸 읽기 전의 저는 이걸 자기합리화나 희망에 가깝다고 하석했는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아마네가 규칙을 어겼다고 벌을 주는 건 아버지였고, 이번엔 어머니가 규칙을 어겼고 그걸 아버지를 대신해 벌을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마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사고입니다. 고작 지각 하나로 물고문을 받은 아마네에게는, 아버지는 신실하신 분이며 규칙에 엄하지만 자신(개인적으로는 이게 모모세 아마네가 아니라 신앙의 대변자임을 아마네도 짐작하고 있을 것 같기도요. 그래서 오히려 신앙에 집착하는 거죠. 신앙의 대리인이 아닌, 약속을 어긴 자신은 사랑받지 못할 테니까)을 사랑하는 분이시니까… 그게 이 집의 약속이자 룰이었으니까요. 아마네에게는 오히려 그게 범죄를 저지르면 감옥에 간다,이상으로 확고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네가 달려가며 단화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 역시 아마네의 현 상황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낡아서 맞지 않는 단화의 고통(부모의 무관심/압박/훈육/종교 등)을 애써 무시하고 보상 심리와 규칙 위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달려나가는(앞으로 나아가는/스스로는 오히려 신경쓰지 않는 점) 것은 아마네의 과거, 현재... 아니 인생 전부가 그런 느낌이죠. 현재의 고통보다는 미래에 있고 동시에 과거에 있었던 보상과 고통을 바라며 두려워하는 것... 부정당하자 오히려 종교에 빠져드는 모습도 그럴까요.

그리고 앞서 말했듯 읽으며 역시 아마네는 어린아이구나~를 다시 한 번 체감한 건 열쇠를 못 빼는 부분이네요. 주입된 지식과 명령을 그대로 읊을 때는 어른스럽지만 그 외의 상황에 직면하자마자 바로 당황하며 어린애다운 면모가 드러났으니까요. 다만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열쇠 돌리기 방법을 몇 번이나 다시 하다가 안 됐을 때가 되고서야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를 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마네를 부정했을 때 아마네가 종교에 더 깊게 빠져 부모나 주변(종교의) 어른의 말을 그대로 읊으며 신 흉내를 낸 건 그게 아마네에게 있어 열쇠 돌리기의 것처럼 옳은 방법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그걸 틀렸다고 부정하며, 용서하지 않는다... 즉 아마네의 열쇠로는 용서한다의 문을 열지 못했으니 본인이 아는 옳은 종교를 설파하고, 고집한 거죠. 그게 아마네에게 옳은 문 열기 방법이니까요. 후우타 역시 동조해줬고요. 하지만 우리가 2심에서 그것을 재차 부정했다면 여기서의 아마네처럼 아마네는 처음부터 다시,를 했을까요? 이미 지나가버렸지만 전 아마네가 2심에서 용서받지 않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파였던터라 이걸 보니 더 아쉬워지네요.

뒷꿈치의 상처를 직면하면 더 아프니 외면한다... 이게 아마네가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다루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이나 종교나, 그 외의 모든 것을 마주하기보다는 외면하며 고통을 [인지하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방식이요. 외면해봤자 단화(가족 등)에 의해 계속 상처는 날 텐데 말이죠. 아버지의 축축한 포옹과 잠깐의 침묵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 받아들이는 것 역시도요. 축축한 감각보다도, 침묵에 대한 불안보다도 그 이후에 있는 똑같은 답에 대한 기대와 포옹의 의미를 찾아 애써 불쾌와 불안보다는 기쁨을 느끼네요. 아마네의 종교에 대한 믿음 역시 이렇다고 봅니다. 종교 그 자체를 믿는다기보다는 고통이 무서워서 외면하면서 동시에 믿음으로서(혹은 그런 척 태도를 바로잡으므로서) 받는 보상에 대한 기대로 고통을 참는 거죠. 뭐, 다른 의미로는 누구나 축축한 옷에 대한 불쾌감을 느끼고, 아마네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그 행위에 행복을 느끼는 것… 종교에 대한 반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걸(정확히는 그 부가적인 요소에) 행복을 느끼는 아마네의… [비정상]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 이거 2심 트레일러의 아마네 보이스죠? 제가 회지를 읽고 나서 2심 트레일러 아무 생각 없이 들으러 갔다가 얼마나 놀랐던지. 역시 공식의 사소한 설정도 다 뜯어내서 회지에 모으셔서 보다 더 현실감 있는 과거를 만들어내신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책가방에 아무것도 안 들고 다니는 편이 이상하다<보편적으로 보면 보통의 아이들은(적어도 히라타라는 아이는) 공부를 우선시하지 않기에 그게 보통이지만, 아마네는 그 보통을 오히려 비정상 취급하네요.

아마네가 말하기를 중시하거나 좋아하는 건 역시 부모가 본인들은 일방적으로 떠드는 주제에 아마네에게 일방적으로 청자를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마네에게 동경... 혹은 목표로 삼은 것이랄까 부모의 위치를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도 싶었는데 보다 보니 후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동경했고…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다만 말하기를 좋아하는 건 지금... 그러니까 2심의 아마네와도 닮아있습니다. 타인의 말을 듣기보단 일방적으로 제 옳음을 설파하며 본인의 귀는 닫아버리는 것이요. 결국 상대를 굴복시키고 싶다(혹은 이해하게 만들고 싶다)는 감정과 그것은 닮아 있지 않을까요.

아마네가 가족을 버틴 건 보상 심리... 미래에 대한 기대. 노력이 보상받을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는데. 그럴 수 없다,라는 걸 깨닫자마자 즉 지금까지 나으리라고, 직면하면 더 아프니 외면해온 상처(어머니의 완전한 변화)를 깨닫자마자 그때 화장실에서 기도했듯 신앙에 기대네요. 그게 아마네에게 있어 상처에 대한 올바른 대처겠죠. 그게 아마네가 학습한 옳은 것,이라고 봅니다.

우선 차례를 보면 일곱 번째 이야기까지는 □□(이)랑 ■■(이)랑,으로 각각 대비되는 요소들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저는 이게 각각 아마네가 비교하고 있달까, 두 개의 선택지라고 느꼈습니다. 정확히는 「착한 아이인 모모세 아마네」가 지켜야 할 것과 「그냥 모모세 아마네」의 무언가(소망, 바람, 호불호 등).

그리고 그 이후에는 죄송해요 - 갈색 고양이 씨 - 장마 - 잘 부탁드립니다 - 모모세 아마네입니다…로 나뉘어져 있고요. 그리고 「죄송해요」 파트 바로 직전에 아마네는 “죄송해요 어머니”라는 말로 그 파트는 끝납니다. 그리고 바로 「죄송해요」 파트로 넘어가죠. 전 그게… (과거의) 모모세 아마네가 (현재의) 모모세 아마네가 되는 과정이라고 느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죄송해요」 파트 다음이 「갈색 고양이 씨」이듯… 아마네의 죄송해요의 대상이 바뀜과 동시에 모모세 아마네의 태도가 급변하는 파트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모모세 아마네이고자 싶었던 「신앙의 대리인」인 자신을 미워하는 어머니를, 「신앙의 대리인」으로서 단죄하고자 하게 되는 이야기. 모모세 아마네이기보다 신앙의 대리인이 되기를 선택하는 과정이요.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장마는 계기이자 모모세 아마네와 신앙의 대리인 사이의 중간같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하나.로 시작하는 종교의 원칙 중 하나는 아마네가 아마네가 아닌 신앙의 대리인으로 이곳에 왔음을(모모세 아마네가 아니라 신앙의 대리인임을 택했음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앞에서는 닫혀있던 방문보다도 자신의 진심이 닿지 않아 서운해하던 아마네가 마지막에는 열리고 있는 현관문처럼 진심을 토해내는 점이 기억에 남네요.

다만 문이 닫혀있을 때 아마네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는데.. 지금의 아마네는 웃고 있으나 역시 속으로는 똑같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녀 -> 죄인 -> 어머니 순으로의 호칭이 아마네가 「신앙의 대리인」인 자신을 버리고 진심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는 아마네에게 있어 [어머니]였으니까요. 아마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에게 있어 아마네가 [신앙의 대리인]이었듯. 그리고 이윽고 아마네가 아마네임을 버리고 신앙의 대리인임을 택한 순간에 어머니는 [아마네]에게 사과했듯… 설령 그게 진심 어린 사과는 아니더라도요.

차라리 아마네는 본인에게 (이제와서) 사과하지 않았다면 마지막까지 기회를 줬을 거라고 봅니다. 어머니가 그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여전히 [신앙의 대리인]이라고 여겼다면, 신앙을 관철했다면, 아마네가 아니라 신께 잘못을 빌었다면 말이죠. 뭐, 의미없는 가정이지만요.

작중에서 줄곧 그랬지만 아마네는 역시 공백을 멋대로 상상으로 채워나가며 현재를 감내하는데요. 침묵을 사랑으로 해석했듯이. 기억조차 못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표정을 칭찬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듯.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마지막에 어머니를 죽이며 웃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라면 웃으며 칭찬해주실 테니까. 그러니 신앙의 대리인인 자신 역시 웃어야 한다.

앞에서 동급생인 하라다 군들에게 두려움은 무지에서 오는 것이고, 앎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용기를 준다라고 했던 말은 아마네의 사상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네의 믿음은 부모의 폭력 행위로부터 믿는다는 행위를 따르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의태한 것이라는 걸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를 죽인다는 행위 역시 아버지는 나를 칭찬할 것이다. 나는 정당한 단죄자다. 너는 죄인이다. 나는 신님에게 긍정받았다. 라는 자기합리화로 무장하고는 행한 짓이니까요.

여러모로 확대 해석인 것 같아서 부끄럽네요. 그렇지만 여러모로 모모세 아마네에 대해 알아가고,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이라 즐거웠습니다. 본편도 충분히 좋지만 저는 후기를 위해서 이 책을 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이건 사람마다 다르지만 전 후기의 한 마디가 정말 좋은 느낌을 준다고 생각하기에). 분명 오므햄 님의 회지에서 이렇게나 다정하고 상냥함을 느낄 수 있는 건 오므햄 님 본인이 그러시기 때문이라는 걸 회지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기에 이렇게까지 부드럽고 상냥하게 풀어내시는 것은 분명 오므햄 님만의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오므햄 님의 회지가 늘 너무 좋아요. 아이들을 향한 배려로 가득차있어서.

늘 회지를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해서 최소 가격에 판매하시느라 손실이 나신다고 들었는데, 전 오므햄 님이 지치지 않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기에… 이건 좀 별개고. 아무튼 다음엔 회지 가격 두 배로 내셔도 살 마음 있습니다… 설령 제가 밀그램을 파지 않고… 다른 장르나 1차 창작으로 오므햄 님의 창작물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전 분명 오므햄 님만의 이 문체와 특징을 사랑하게 되었을 것 같아요. 늘 감사합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1디페에 내실 코토코 회지도 기쁘게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아마네의 끝이 행복으로 끝나길 바라며. 후기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