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텔엘

짝사랑

케이카OC by 케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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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은 술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못 마신다는 건 아니고, 상황이 될 때나 마시지 굳이 혼자서 바에 찾아와 스트레이트로 마셔댈 만큼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굳이 혼자서 바에 찾아와 스트레이트로 마셔대는’ 엘의 행동은 이상한 것이었다. 같은 카포- 즉 라텔 밑에 속한 스나이퍼 팀의 A는 지금 저기 앉아있는 사람이 엘이 맞는지 잠시 눈을 비벼봐야 했다.

이미 시간이 꽤나 지났는지 그의 앞에는 값비싸고 도수 높은 술병 하나가 놓여있었고, 잔 여러 개가 늘어져 있었다. 바텐더가 이미 다른 병을 치웠다고 가정하면 엘은 거의 만취 상태가 다름이 없으리라.

 

“선배.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혼자서 자작하고 있어요, 왜.”

 

나이도 비슷하고, 같은 직급의 솔다토였으나 A는 엘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엘의 경력에는 웬만한 카포들과도 비할 바 못 되었기에 그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선배나 델론 씨 등의 경어를 들었다.

호박색의 빛깔 좋은 술을 단번에 들이켠 엘이 A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웬만하면 거의 변하지 않는 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걸 보니 역시 취해있는 상태가 분명했다. A는 그의 옆자리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왜 그래요. 실연당한 사람처럼.”

 

A는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다. 엘은 사람에게 관심 없기로 유명했다. 다른 이들을 보조하는 스나이퍼라는 포지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할 때는 잘 하지만 파트너와의 관계는 싸늘하기 그지 없음은 조직의 모든 이들이 알았다.

게다가 최근에 일어난 파트너 교체에서 그 유명한 라텔과 붙자, 이제는 하루가 멀다고 싸워댄다고 한다. 전번에는 병원에 실려 나갔다고 하니 말 다 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애는커녕 친구를 사귀기는 할 수 있을까.

사실 문제는 그 이전, 원초적인 부분에 있었다. 소문으로는 총과 사랑에 빠졌다고 하던가. 그는 도통 누군가와 교류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감정이든, 몸이든. 입에서 튀어나오는 무시무시한 독설을 배제하고 나면 겉모습만은 혹할 법한 외모를 지닌 엘이었기에, 그에게 다가가려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전부 쳐내졌다.

첫째로 능력 없는 사람은 상대조차 하지 않았으며, 둘째로 시답지 않은 말은 20번에 한 번꼴로 기분에 따라 받아줄 만큼 대화가 없었고, 셋째로 강제로 그에게 접촉하려 하면 험한 꼴을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그를 절벽 위의 꽃…이 아니라 지뢰로 만들었다.

암암리에 도는 말로는 누군가가 그를 억지로 방에 끌고 들어갔다가 어깨에 구멍 하나 뚫려 나와선 그 뒤로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어쨌거나. 결론은 엘이 성애적인 무언가를 할 리가 없다는 이야기-

-라고 A는 생각했다. 엘은 가만히 A를 바라보다가 빈 잔을 든 제 손등에 이마를 기대었다. 푸우-. 주정뱅이다운 깊고 더운 한숨을 내쉬곤, 조용히 중얼거린다.

 

“티 나냐?”

“……예?”

 

아지트에 계실 존경하는 돈(don). 제가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요. A는 자신이 증발한 술의 향에 취해버린 것인지 의심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실연당했냐’라는 물음에 긍정적인 답변을 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질 리가 없지 않은가. A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있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 엘이 픽 웃음을 흘렸다.

 

“나는 누구 좀 좋아하면 안 돼?”

“아, 아, 아, 아니…! 그, 그건 아닌데….”

“뭐… 실연당하기도 전에 말 한 번 못 해봤지만….”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엘은 유리잔 끄트머리를 입술에 물고 나른히 눈을 뜬 채 허공을 응시했다. 흐린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사납기 그지없는 표정을 한 캬라멜색 머리의 남자. 예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허구한 날 하는 건 잔소리와 장난질에, 힘만 무식하게 센 괴물 같은 남자였다. 닮은 곳 하나 없으면서 손발은 지금껏 함께 나서왔던 다른 어떤 파트너보다도 잘 맞는 그런 이상한 자식을, 대체 왜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에게서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아무리 베테랑이라고는 하지만 마치 몇 년은 함께한 것만 같은 자연스러움이라니. 서로의 행동에 배려 따위는 없었으나 오히려 상대를 신경 썼다면 맞을 수 없는 합이었다. 그곳에 있던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한 자부심. 엘은 그런 그에게 '제법이네.'라는 감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것이 끝일 줄 알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임무에서만 잘 지내면 그 이외에는 알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어디에서나 사사건건 부딪치고 시비를 걸고 걸리게 된 것은 고의가 아니었다는 소리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앙숙일 수 있는지. 그들이 임무 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보스의 명령으로 그의 집에 함께 살게 되었을 때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허구한 날 가구가 부서져나가고 장전된 총의 방아쇠를 진심으로 당길 뻔한 것이 십수 번. 어쩌면 저렇게 안 맞을 수가 있지. 어쩌면 저렇게 짜증이 날 수가 있지. 하루가 멀다고 그와 싸우며 제 감정을 가감 없이 분출해 댔다.

아마 그래서 눈치 채지 못했던 것 같다. 한 겹 두 겹 벗어던진 벽 틈새로 그가 파고 들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뒤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는 걸, 엘은 이렇게 회상하는 동안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는 사나웠다. 그러나 친절했다. 쪼잔해 보이는 것 같아도 한순간에 어색할 정도로 관대해졌다. 가명을 썼다. 의사면허를 가졌다. 요리를 잘했다. 그의 생활은 의외로 규칙적이었다. 그는 난폭했고, 한편으로는 치밀했으며, 많은 것을 알았고,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그런 그에게 어느샌가 사소한 구석까지 챙김 받고 있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기대고 싶어지기라도 한 건가.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자신의 사랑은 풋풋하거나, 고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애틋하거나. 그 무엇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음습하고, 추하고, 불필요했다. 사람을 해치는 일 외의 평범한 것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주제에 남들과 같은 사랑을 하기를 바란다?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시원하게 고백이나 하고 끝내고 싶어도 그 뒤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만약 없던 일처럼 할 수 없다면? 제 마음을 불쾌하게 여기며 파트너를 그만두자고 하기라도 한다면? 엘은 어쩌면, 자신이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헛소리처럼 느껴지는 생각을 했다.

손에 쥐면 새어나갈 모래 같은 것이라면 적어도 가만히 바라볼 수나 있게 해줘. 아무 말 하지 않고 숨기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모든 것은 깎아내고 깎아내면 어차피 무뎌지기 마련이잖아. 언젠가는 그런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떠올릴 수 없는 날이 올 테니. 지금만큼은 이 쓰린 속에 불을 끼얹든, 속 뒤집는 말만 골라 하는 그 입술에 폭력적인 키스를 퍼붓는 상상을 하든. 절대로 눈치채지 말기를.

 

“짜증 나는 늙은이….”

 

그렇게 입을 달싹이곤 병째로 술을 들이붓는다. A는 그런 엘을 보며 경악했다. 놀라서 크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들은 엘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차.

 

“…내가 뭐라고 말했냐?”

“그-”

 

A는 무심코 순순히 대답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지금 엘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들은 것에 대한 정보가 아닌 침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A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필사적으로 보일 법한 움직임이었다. 그것을 본 엘은 만족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두운 조명 아래 느슨히 미소 짓는 그의 표정은 몹시 낯설었다.

 

“아.”

 

순간, A는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발견해 버린 기분에 휩싸였다. 이런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건 기회일까? 지금껏 그에게서 받아온 감정이라고는 분노와 무관심뿐이었지만, 지금은 다를지도 모른다.

오르지 못할 거로 생각한 절벽 앞에 사다리가 놓인 것 같은 착각. 두꺼운 가시덩굴로 휘감겨 있던 탐스러운 장미가 눈앞에서 꽃을 피워낸 듯한 놀라움. 지금이라면 다가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존경, 경외, 두려움에 이은 독점욕이 솟구치는 걸 자기 자신이 자각하기도 전에 A는 이미 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A는 엘의 어깨를 밀어 눕히곤 그대로 짓눌렀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뇌는 몰라도 몸은 본능적으로 이해했는지 덜덜 떨렸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그 사람은 어차피 가망이 없으니까 날 선택하라고 할까? 아니면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안게 해달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 말 없이 지금 당장…까지 생각하던 A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순식간에 이성을 되찾았다.

그것은 소리 없이 다가와 턱 아래를 위협하고 있는 권총을 뒤늦게 눈치챘기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 웃었냐는 듯 서늘하게 식어있는 엘의 얼굴을 마주한 탓이다. 배신감이나 실망조차 비치는 일 없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무감각한 그의 표정이 A의 가슴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애새끼네.”

 

엘은 곧장 무릎을 들어 A의 배를 가격했다. 불시에 날아든 층격에 A가 소파 아래로 굴러 떨어지자 엘은 대체 언제 풀었는지 모를 권총의 안전장치를 잠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긴 했나. 머리가 뜨겁다. 엘은 열 오른 머리를 대충 털어내고는 쓰러진 A의 몸을 넘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왜 저는 안돼요?”

 

그때, 뒤에서 A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은 돌아보지 않았고,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저 흘리듯 나직이 대답할 뿐이었다.

 

“너라서 그런 게 아니야. 그 자식이 아니라서 안되는 거지.”

 

만약 A가 ‘왜 그 사람이냐’라고 물었다면 엘은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 그 늙은이가 아니면 안 될까. 엘 자신 또한 그 답을 몰랐다.

 


 

 

“야, 그 ×같은 늙은이 또 혼자 나갔냐? 진짜 돌았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금 나 물 먹이려고 작정한 거지? 이 ×××가. 차라리 노망이 났다고 해라. 이 ××같은 ×××….”

 

차마 필터 없이는 듣기 민망한 욕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분노에 찬 엘이 죄 없는 사무직원을 닦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많았으나 그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요즘 엘의 파트너 라텔이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그를 피하고 있다는 건 조직 내에서도 소문이 파다했다. 이제 드디어 파트너 교체 시기가 온 건가. 그렇게 싸워대더니 결국에는. 그런 말들이 수군수군 오가는 사이, A만은 다른 생각을 했다. 쌤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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