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 (2018)
라텔엘
“들어간다.”
감히 라텔의 사무실에 노크 한번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얼마나, 라고 해봐야 고작 두셋? 그 안에 엘이 들어있는 것은 말하면 입 아픈 사실이었다. 들어간다는 예고야 뭐, 들어오라 말라 허락조차 받지 않는데 의미가 있을 리 없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지만 이미 익숙해졌기에 안에서는 놀란 기색 하나 없다. 다만 오늘은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엘은 책상 앞에 앉아 깍지를 낀 두 손에 이마를 기대고 있는 라텔을 발견했다. 한숨을 한 번 푹, 내쉰다. 쟤는 갑자기 무슨 청승이래.
“뭘 청승 떨고 앉았냐.”
엘이 생각만으로 끝내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지금까지 벌여온 수많은 싸움 중 절반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툭 말을 내뱉은 엘은 책상 끝에 걸터앉아 라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문득 시선이 돌아간다. 그러고 보니 라텔 의자 뒤에 무언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아까 문 앞에서 봤을 때는 책상에 가려져 있어서 안보였는데.
“…오늘 무슨 날인지 몰라?”
엘이 목을 빼며 그것들을 구경하려 하자 라텔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화이트데이?”
엘의 입에서 정답이 튀어나오자, 라텔이 꽤 놀랍다는 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누굴 뭐로 보는 거야. 엘의 눈매가 샐쭉하게 찢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표정을 본 라텔이 손을 설렁설렁 내저었다.
“넌 이런 거에 관심 없을 줄 알았지.”
“그래도 알 건 알거든? 길거리에서 몇 주 전부터 설레발치는 걸 몰라보면 그게 사람이냐.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인데.”
“이 뒤에 있는 게 다 사탕이라고.”
“오. 뭔가 했네.”
엘은 라텔의 푹 가라앉은 얼굴을 보고는 낄낄 웃어대었다.
“인기 많은데? 너 단 거 싫어했던가?”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이 정도면 질리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마피아에게도 기념일은 찾아오는가. 누군가는 존경심에, 누군가는 장난으로, 누군가는 진심을 담아. 하나하나 쌓인 것이 이젠 언덕을 이루었다. 물론 처음에는 서늘한 표정으로 돌려보냈지만 몰래 던져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으니, 차라리 신상 명세나 정확히 알고 받자- 싶어 결국 이렇게 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너 웃을 때 아니거든. 절반은 네 거야.”
“뭐 이 자식아?”
“왜 갑자기 욕인데.”
“아니, 왜 내 걸 너한테 주는데.”
라텔은 진짜 모르냐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엘은 당당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당연히, 모르니까. 라텔이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쉰다.
“너, 누가 사탕 준다고 하면 가만히 서서 받을 거냐?”
“아니?”
“이따위니까 그렇지.”
결국 버리든 집으로 옮기든 움직이는 건 내가 될 것이다. 라텔은 안 봐도 뻔한 미래를 그렸다.
“…그러면 너 선물은 싫어?”
“이제 사탕은 수표 껴서 준대도 싫다.”
그렇게 한숨 섞인 대답을 하던 라텔은 문득 엘의 목소리가 묘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의아한 눈을 들던 라텔은 제 앞 책상에 툭 떨어지는 무언가에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사탕 아니니까."
엘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라텔과 의문의 상자 하나. 멍하니 문을 바라보던 라텔은 곧 상자 안에 든 것이 넥타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텔은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거. 집에서 볼 때 어쩌려고.
…설마 안 들어오려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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