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텔이 미인계를 쓴다면
“이건 또 무슨 재앙이야.”
“큽…!”
엘이 무심코 중얼거리자, 인이어에 연결된 팀원들이 황급히 소리를 끄는 차단음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타이밍이 늦어 터진 웃음을 미처 숨기지 못한 누군가의 명복을 빌었다. 한 사람은 누가 어떻게 되어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엘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누군가를 작신 밟을 예정의 장본인 라텔이었다.
‘이것들이 임무 중에 무전을 끊어?’
-라는 명목으로 모두가 갈궈질 게 뻔했지만, 그 또한 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억울해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었다. 잠시 짧은 한숨을 내쉰 엘은 다시 스코프에 눈을 갖다 댔다. 순식간에 좁아진 시야로 창문에 모로 기댄 라텔이 보인다. 아까 엘이 중얼거린 말을 들은 라텔이 창 너머로 몰래 가운뎃손가락을 슬쩍 내밀었다 거두었다.
평소보다 훨씬 단정하게 정리한 앞머리가 눈에 띄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쓰리피스 정장이야 꽤 자주 볼 수 있는 옷차림이었으나 머리 스타일과 합쳐보니 그게 그렇게 껄끄럽게 보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입가엔 평생 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도 안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걸치고 있다. 엘은 소리없이 웃었다. 설명으로야 '원만한 정보 습득을 위한 작전' 이라지만 결국 미인계라는 소리가 아닌가.
무려 저 나이를 먹고!
“아… 진짜 웃겨서 손가락 미끄러질 거 같아.”
목표물에 성큼 다가가던 라텔의 입가가 미세하게 씰룩였다. 아마 욕 한 바가지 하고 싶을 게 분명했지만 어쩌겠나. 임무 중에 헛소리를 내뱉어서 실패하면 그건 라텔의 잘못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엘은 몇 번 더 속을 긁는 말을 혼잣말인 듯 아닌듯 흘리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라텔이 낮고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대화가 들렸다. 동네 병원 의사로서 환자들을 대할 때의 태도도 엘에겐 어색한 모습일 것이 분명했으나 지금의 태도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엘은 다른 팀원들과 같은 머저리가 되고 싶지 않으므로 인이어를 끄거나 빼지 않았지만, 여과 없이 고막으로 흘러드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등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라텔의 눈꺼풀이 느긋하게 가라앉고, 곱게 자라 희고 곱기 그지없는 목표물의 뺨이 부드럽게 달아오르는 것이 뻔히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완벽한 첫 만남의 명장면이었다. 그러나 엘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길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저런 장면을 목격하더라도 화가 날 것 같지 않았다. 나 몰래 무슨 일을 맡은거야, 쯤의 생각을 하겠지.
임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한 몫하긴 했지만, 저 늙은이의 성격상 누군가를 대놓고 꼬여내는 일을 할 리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아는 탓이었다. 하지만.
“저 나이만 많은 늙은이가 바람을 피네.”
놀려먹을 기회는 흔치 않으므로 엘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아무렇게나 뱉었다. 또 다시 무전이 후두둑 끊어지고, 라텔이 헛기침을 하는 것을 보며 엘은 킬킬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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