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Σίσυφος

기본 타입|오마카세 소재•플롯 소설 [1만 2천자]

hatsukoi 99.9% by 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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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의 바람은 거친 먼지와 금속, 굳은 기름과 흙 섞인 피의 맛이 난다고 한다. 미타-혹은 이안 클라우스, 이제는 그릇된 이름이라 하더라도-는 혀를 내밀었다. 늘 그렇듯 드러난 점막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날 선 냉기를 남길 뿐이었다. 본래 바람은 무취에 무맛이라고 하나, 사람들에게 흔히 통용되는 비유를 손수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잠깐,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잠깐의 아쉬움을 남겼다. … 행위에 이유는 없었다. 그저 외곽에서 임무를 맡을 때면 의식처럼 바람을 시식했다. 존재가 존재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던가, 그렇게 거창한 이유를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미타의 무의식이 이성을 넘어 질주한다고 한들.
 

이제 막 손목의 자상이 복원되는 참이었다. 덕지덕지 말라붙은 피가, 깔끔하지 못한 절단면이 천천히 이어 붙고 메꿔져 매끈해지는 모습을 멀뚱히 쳐다본 지도 약 3분. 아, 그것보다 짧았나? 모르겠다. 심장을 타고 흐르는 피, 그리고 육체의 곳곳을 가르고 점유한 혈관을 따라 육체가 복원되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고 있을 뿐.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내장이 헤집어지거나 뼈가 분쇄되지는 않았다…. 방금 흘린 피가 마른 땅바닥을 군데군데 진흙으로 바꿔 놓고 있었지만. 미타는 가볍게 몸을 정자세로 돌려 누웠다.
 

시야 가득 담긴 하늘은 칙칙한 회색이었다. 분명 중앙 대륙의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사마르칸트의 하늘도 비슷한 회색일 테지만, 이곳이 외곽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하늘은 배로 음울하고 불길해 보였다. 초라한 구름마저 사람을 뒤섞는 곳. 구시대의 유화 물감을 대충 패대기쳐 그린 것처럼 보이는 곳. 한때는 ‘우리’의 소유였으나 이제는 완벽히 유리된- 어쩌면 추방된 곳이다. 헤드라인의 일원이 외곽을 묘사할 때 긍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말은 단 한 문장도 없었다. 짓궂게도 신입을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미타가 땅바닥을 짚고 일어서 허리를 짚었다.
 

“별 거지 같은 외곽 같으니라고.”
 

찢어져 형체를 잃은 장갑을 손에서 벗겨내 먼지를 탁탁 턴 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임무마다 새로 사야 하는 장비들이 넘쳐났다. 상여금을 더 달라고 하든가 해야지. 미타가 주위에 널브러진 인간 중 가까운 이에게 다가가 툭툭 건드린다. 반쯤 죽은 모양새를 한 그가 미타를 피해 몸을 굴렸다.
 

“이봐, 요셉. 적당히 하고 일어나. 너희가 느적거리는 바람에 빌어먹을 재앙이 또 온다면 난 너희를 버리고 당장 베이스캠프로 튀어 나갈 거고, 그러면 헤드라인은 징계를 내리겠지? 너희가 날 그렇게 만들도록 둘 수는 없어. 알아들었으면 빨리 일어나도록. 슬슬 인내심이 닳고 있거든.”

“…조셉입니다. 그리고 대장님,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다 죽어가는 팀원을 그런 식으로 대하시다니요. 상처가 악화하면 정식으로 항의할 겁니다.”

“그러시든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농담 따먹기나 하는 와중에, 시체처럼 누워있던 팀원들이 어물쩍 일어선다.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소총을 지지대 삼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이가 반이었다. 제대로 선 이도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고 상처를 지혈하고 있었다. 그나마 대체로 경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일까. 조셉을 일으켜 세운 미타가 비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굿이너프의 직원들이 보면 개처럼 웃겠군. 헤드라인의 알파 팀이 이런 꼴을 하다니 말이야…. 그간 재앙과 내외했다고 긴장을 풀기라도 한 건가? 다들 ‘살아남은 기념’ 2주년은 기념하기 싫은 거야. 그렇지?”

“아, 대장 또 그러십니다. 다들 적당히 좋은 5성급 호텔에서 다리 쭉 뻗고 한 이틀 정도 요양하면 다 나을 부상인데도요! 칭찬받을 법하지 않습니까?”
 

검붉은 머리카락과 피에 물든 이마가 조화를 이루어 거진 붉은 악마처럼 보이는 시세로가 어깨를 으쓱인다. 쇄골의 타박상을 고려하지 못한 바람에 금세 허리를 접고 고통을 호소해야 했지만. 미타의 입꼬리가 다시금 평형을 유지한다.
 

“너희 묘지에다 대고 읊는 것만 아니면 다 칭찬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예상했다는 듯 투덜거리는 목소리 사이로 유독 시세로의 목소리가 선명하다. 실제로 그가 제 얼굴을 미타에게 들이대서도 그렇고, 미타에게 답을 돌려받기 위해 말을 건네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서도 그렇다. 사선 위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 밀어내며 미타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정비하도록.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서 장비를 점검하고 원위치에서 임무를 계속한다. 이미 공장에서 꽤 많이 멀어진 것 같은데. 재앙은 적당히 부수고 간다. 2세대라도 수가 늘어나면 곤란해”
 

이후로는 미타가 더 입 열 일이 없었다. 그들, 헤드라인의 자랑스러운 알파 팀은 살아남은 이력이 긴 만큼 적당히 본인이 뭘 해야 하는지는 아는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곽이라고, 예상치 못한 침습이라고 얼타는 자들은 모두 묘지 아래서 긴 잠을 자고 있을 테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들이 방금까지 누워, 혹은 앉아있던 곳에는 깨진 금속판과 볼트, 전선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미타가 발을 움직일 때마다 군화 아래로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예상을 좀 벗어난 상황이었다. 재앙들은 2세대임에도 변칙적인 움직임을 보였으며, 알파 팀을 유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무엇을 위해서?
 

자문해도 답은 모호했다. 굿이너프의 공장이 타겟이라기에는, 재앙의 신체 자체가 가장 위협적인 무기였다. 굳이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들고 싸울 필요가 없단 말이다. 묵묵히 총기를 둘러매고 열을 세워 걷는 미타의 머리가 바삐 굴러간다. 존재할 리 없는 통증으로 피부 아래가 욱신거린다. 현 인류의 본능은 대체로 무뎌져 있으나, 미타는 평범함을 상회하여 늘 날카로운 운명을 눈앞에 두고 살아가는 이였다. 본능이 생각으로 전이된다. 인지하여 입 밖으로 내는 것은 한 번 더 피부가 욱신거렸을 때.
 

“-숙여!”
 

부지불식간에 다가온 것은 무광의 칼날. 날 안쪽에 선명하게 새겨진 T-3449가 빛을 받아 일순 반짝였다. 간신히 그늘과 빛이 구분되는 곳에서, 빛이 반사되었다는 말은…. 칼날을 잡아챈 미타가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몸을 낮춘다. 방금까지 미타의 목이 위치하던 곳을 총탄의 궤적이 그려졌다.
 

“젠장, 쟤네 부서지기 전에 구조 신호라도 보낸 겁니까? 눈물 나는 우정이네요!”

“시세로, 말할 여유 있으면 대열 정리부터 시키지 그래. 이러다 정말로 전멸하겠어.”
 

이쪽이 훨 불리한 상황이었다. 부상자들이 제대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제대로 정비하고 총을 견착할 시간조차 없었다. 팔과 손목의 힘을 고스란히 이용해서 총기를 받쳐 든 바람에 근육이 뻐근했다. 그러나 고작 이런 시련에 무너지기 위해 살아남은 알파가 아니다. 노련한 전투원의 이성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다.
 

“알파 팀 최소 전투원 제외한 전원 엄폐물 끼고 대기! 거리를 두고 시간을 번다!”
 

재앙과 직접적으로 대치 중인 이들은 미타를 비롯해, 실력이 확실한 이들. 홀로 재앙과 맞서 싸워도 생존할 확률이 높은 이들이다. 나머지 인원이 부상자를 이끌고 엄폐물 뒤에 숨어 전투를 준비할 동안, 버텨줘야 하는 역할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재앙이 자신에게만 공격을 가하는 것을 확인한 미타가 크게 뒤로 도약해 거리를 벌렸다. 빠르게 주변을 훑는 눈동자를 생각이 따라가지 못한다. 생각이 둔해진다면 직감은 날카로워진다. 오랫동안 유전자에 남아, 오늘날까지도 전해진 일종의 야생성이 벼려지는 순간. 미타의 흑색 눈에 재앙의 형상이 선명히 비친다.
 

재앙은 총 다섯 대. 선발대 두 대가 먼저 습격해왔고, 시차를 두고 나머지 세 대가 합류했다. 섬세한 합공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들이 소모전을 염두에 둔 듯 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1세대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입력과 출력 사이 연산에 그 어떤 간섭도 하지 못하는 고철 덩어리일 뿐인데. 변칙적으로 움직이며 베이스캠프와 멀어지도록 한 선발대와, 부러 전투의 속도를 늦추는 후발대. 정확한 내막은 몰라도 무언가 목적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가설은 두 가지이다. 보다 복잡한 명령을 할 수 있을 만큼 재앙 1세대의 기계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갔거나. …재앙 2세대 또한 발전과 진화를 거듭하고 있거나. 전자여도 영 골치 아픈 일일 텐데, 후자면 당장 증거 하나 잡아서 팀원 하나를 어떻게든 헤드라인의 본부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 이후는 헤드라인이나 굿이너프가 알아서 하겠지. UN과 정보를 공유해 재앙 섬멸 작전을 펼치거나 은폐할 것이다. 그리고 미타는 그 ‘유일하게 살아남을지 모르는 팀원’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이였다.
 

외곽을 벗어나 본부로 가기까지 무조건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상념을 뚫고 재앙의 총구가 미타를 겨누었다. 묵직한 M&P9를 사선으로 겨누어 선제 총격. 철이 긁히고 재앙의 몸체에 기다란 흠집이 난다. 재앙이 오직 하나의 대상을 타겟으로 선정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재앙은 최대 효율의 명령 달성을 목표로 하므로, 어지간하면 약한 이들부터 처리한 후 합심해 강한 이를 죽이고는 했는데. 벌써 재앙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분명히 미타의 승리였다.
 

재앙이 쏜 총탄의 모양 그대로 구멍 뚫린 피부가 동그랗게 수복된다. 머리에 열이 오른다. 조금만 더. 재앙이 움직이는 패턴을 그대로 따라 도주로를 막고, 밀어붙인다.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으나, 물에 잠긴 듯 먹먹한 귀는 문장을 제대로 입력하고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몸을 날리고, 막고, 금속성 표면을 인간의 몸으로 긁어 망가뜨리고자 한다. 총기를 발톱 삼았다. 야생성은 인간성을 잡아먹었으나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라면 미타에게 있어 본능에 몸을 맡기는 것을 저어할 이유가 없었다.
 

어느덧 날이 저무는지 거센 바람이 불었다. 미타의 머리카락이 크게 휘날려 눈 앞을 가린다.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을 거칠게 뒤로 쓸어 넘긴 미타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재앙의 철골 뼈대가 고스란히 드러날 지경이었다. 미타 또한 막 복원된 상처와, 복원되기 시작한 상처와, 복원된 이후 상처에 남은 핏자국으로 온몸이 얼룩덜룩했다. 미타와 재앙이 발을 끌어 몸을 크게 움직이고 거리를 벌렸다 좁히는 과정에서 뿌연 먼지구름이 계속해서 피어났다. 눈가가 간지러웠고,
 

속이 쓰렸다. 이유는 불명확했으나 전투에 있어 좋은 증상은 아니었다. 불온한 심장박동이다. 미타의 눈이 바삐 재앙의 움직임을 따랐다. 팔을 올려 쳐 재앙의 관절을 타격하고, 가까이 따라붙어 그들의 메인 엔진이 있을 곳에 정확히 총구를 겨누었다. 철과 철이 마찰해 끔찍한 소리를 냈다. 드드득, 까득, 틱. 총알이 없다. 한숨을 쉰 미타가 긴 총구를 표면에 쑤셔 박았다. 소음과 함께 총구와 엔진이 같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결코 들려서는 안 됐을……
 

“이-안, 클…라…-.”
 

짧은 목소리, 혹은 그보다 못한 기계음의 조합이.
 

동시에 총구가 완전히 엔진을 꿰뚫는다. 검은 기름이 울컥 새어 나오고, 불꽃이 튀다가 전류를 알맞게 방출하지 못한 엔진이 속에서 폭발한다. 가슴을 중심으로 터진 몸체는 토막 나며 부서진다. 익히 봐왔던 모습이다. 불길이 미타를 덮치고, 팔뚝으로 열기를 막은 미타가 뒤로 물러선다. 총신 삼분지 일이 녹은 HK416A5가 손에 딸려 나온다. 미타는 붉게 연소하는 재앙을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었다.
 
 

죽을 수 없는 것이 나의 영원한 사인死因이었다.

Σίσυφος

 
 

미타가 느리게 총을 떨어트렸다. 먼지와 연기가 뒤섞여 영영 걷히지 않을 장막이 드리워진 것처럼 보였다. 인지하지 못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이마와 콧잔등, 볼을 적셨으나 피가 턱에 고이기도 전에 상처가 복원되었다. 느리게 굳어가는 피 때문에 피부가 간지러워 얼굴을 마구 문질러 닦았다. 아직도 피비린내가 맡아지지 않았다.
 

마땅히 풍경이라고 부를만한 게 없었다. 회색빛의 폐허와 메마른 나무뿌리만이 눈에 들어왔다. 외곽의 찌꺼기를 찾아 기는 쥐들도 없었고, 겨우 숨 붙이고 있던 잡초들은 방금의 화재에 모조리 불살라졌다. 게다가 아직도 앞이 자욱해서 쉽게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얼마나 멀어진 거지? 주변을 살펴볼 수 있을 만큼 높은 건축물도 없었는지라, 팀원이 저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무작정 걷는 것 말고는 답이 안 보였다. 미타가 볼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패착이다. 이성을 잃었어.’
 

재앙을 등지고 걸었다. 외곽의 공기는 꽉 막힌 듯 매캐하고 텁텁했지만 미타에게는 중앙 대륙이나 외곽이나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어디에서나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듯 살아온 걸지도. 공간에 있어 차이점을 두지 못한다는 것은 정을 붙일 이유 또한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타는 의식적으로 깊게 심호흡했다. 새로운 공기가 몸을 순환하고 채우기를 기다렸다. 정신을 좀 차려야 했다.
 

굿이너프의 공장도 헤드라인의 직원도 없는 곳이라면 재앙을 만날 확률이 더 높은 것이 당연했다. 안전이 검증되지 않은, 외곽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알려진 것 없는 땅이 7할을 넘었다. 미타는 사냥꾼과, 겁대가리 없는 외곽의 주민과 재앙 말고는 아무도 찾지 않는 땅에 서 있는 셈이다. 어깨를 누르는 건 슬링을 대강 풀어 어깨와 허리를 가로지르게 고정했다. 기름이 묻어 무뎌진 나이프의 칼날을, 이제는 가죽 조각이 된 장갑으로 문질러 닦았다. 가능한 전투를 배제하고 움직여야 했다. 미타가 이곳에서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상황은 체력 소모로 인한 고립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만이 이방인으로서 외곽 생존시간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주민들은 다르겠지만, 미타는 공식 서류 속 현 거주지 주소를 변경하고 싶지 않았다….
 

간이 지도는 전투 중에 떨어트린 것 같았다. 이제는 외곽의 먼지 폭풍과 함께 세상을 구경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무전기는 재앙이 폭발할 때 어딜 잘못 맞았는지 맛이 가서 이상한 기계음만 토해내고 있었다. 그 소리가 거슬려 돌 위로 내리찍은 게 3분 전이다. 안테나, GPS? 굿이너프의 공장 근처에서도 간신히 연결되던 고물이다. 기대조차 갖지 않았다. 총탄 세 발 남은 M&P9와 기름으로 날부터 손잡이까지 찐득거리는 군용 나이프를 제외하곤 멀쩡한 게 미타 제 한 몸밖에 없었다. 이렇게 좆같을 수가!
 

화상과 생채기, 관통상의 흔적이 실리콘 덮어씌우듯 말끔해지고 있었다. 피부 위가 간지럽다. 벌레가 기어가거나 약한 바람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 전투가 끝난 이후 내내 느낀 감각이다. 감각이 무뎌, 모르는 이의 육체가 한 겹 더 붙어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인지하기 쉬워진다. 인지와 감각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살아있지 않아도 인지할 수 있어서. 비인간적 괴리감이다. 미타는 내내 살아있었지만 또한 존재하지 않음을 알았다.
 

정처 없이 걸었다. 어차피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육체였으므로, 적어도 재앙이 다가올 때에 어디에 숨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프로토콜은 알고 있었으므로 걷는 것이 가장 복귀 가능성 큰 선택지였다. 무한히 복잡한 미로와 무한한 영생을 사는 이 중 끝내 승리하는 것은 인간인 것처럼. 걸으면 바다든 중앙 대륙과 이어진 가장자리든 베이스캠프든 팀원이든 만나게 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사냥꾼을 만나 길을 물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꼬박꼬박 쌓이는 월급을 쓸 곳이 없었던 게 오늘을 위함이었나?
 

미타가 느끼는 것은 무력감이 아니었다. 그보다 섬세한 감정이다. 또한 아무런 생각도 머리를 스치지 않았다. 흡사 기계 덩어리. 걸음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날이 가깝지 않기만을 바랐다. 외곽의 풍경은 뭐 하나 비슷하기만 해서, 어두침침해진 하늘은 구름이 두껍게 껴 일말의 움직임 하나 없어서. 그래서 미타는 종종 제가 여전히 걷고 있는지, 멈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다른 냄새를 맡은 것은, 미타의 생체 내부 시계상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체외 감각계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미타는 그저 오래 지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이 냄새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수 없었으므로.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기다랗고 견고한 케이블 타워였다. 녹슨 철골이 교차하여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검은색 케이블이 타워를 칭칭 감고 있었고, 일부는 끊어져 바닥에 닿아 있었다. 지저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속박과 폐쇄를 은유하고 있었다. 둥근 돔 형태의 흰 표피는 어스름한 빛을 받아 그림자가 일렁였다. 저 겉은 부드러웠나, 분명 바람이 불 때 흔들렸던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기억이 겹쳐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낸다.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분명히 그곳이었다.
 

막 알에서 깨어난 새가 어미에게 각인하듯, 유전자 깊숙이 박힌 부름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그만큼 폭력적이었다.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아무리 인간 영생-즉 인간의 위치를 초월하려 했던-을 갈구한 이들이라고 해서 전쟁의 여파까지 비껴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땅이 고르지 않고 군데군데 파여 있었다. 커다란 크레이터도 적지 않게 보였다. 공기가 매캐한 재의 냄새를 붙잡고 있었는지, 씁쓰름했다. 입을 쉬이 열 수 없었다. 목구멍으로 침투한 냄새가 심장을 쥐어 잡고 어떤 행동을 명령할지 몰랐다……. 미타가 막 지나친 정문의 금속 명패에서 하겐바트 연구소의 이름이 반짝였다.
 

앞면과는 달리 뒷면은 직접적으로 폭격에 노출된 듯 유리가 온통 깨져 있었다. 거진 절반이 날아가 건물 속이 훤히 비쳐 보였다. 콘크리트는 깨지고 무너졌으며, 유리는 부스러지거나 두꺼운 먼지가 쌓여 불투명했다. 들어가야 했다. 체력을 보충하고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저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동행인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 눈동자에 어떤 형상이 흔들렸는지도.
 

연구소 내부는 입김이 나오겠다 싶을 정도로 서늘했다. 모든 그림자가 뒤로 길게 늘어졌다. 빛을 받는 쪽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겠거니 했다. 바닥을 밟을 때마다 발자국이 어지럽게 새겨졌다. 미타가 이곳을 밟은 첫 인간이었다. 간혹 재앙의 흔적이 보이기도 했다. 부서진 몸을 끌고, 미타와 똑같이 도망쳐 온 것인지 잔해가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제는 깡통이 된 재앙을 넘어 중심부로 걸어갔다. 지상층은 노출됨이 심했다. 지하로 가야 했다. 팔각형의 구조를 띠고 면마다 기둥이 박힌 중심부는 조명이 전부 깨지거나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태였다. 기대한 적 없지만, 감안하고도 한 치 앞을 보기 힘들 어둠이라 미타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있느니만 못한 감각이라면 차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었다.
 

귓가를 스치는 얕은 진동과 바람이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는 소리. 어디선가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소리가 공명하지 않는 환경이라 거리를 파악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아마 북서쪽 입구 근처에 지하와 연결된 비상용 사다리가 있을 것이다. 메리가 잠들기 전 동화를 읊어주듯 해 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홀로 빙하기를 겪고 있는 연구소에서 어떻게 너를 빼내 데려왔는지, 미끄러질까 봐 어쩔 수 없이 붙잡은 난간이 손바닥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더러운 성격의 방증이라고만 생각했던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메리도 몰랐을 것이다. 손에 까끌까끌한 난간이 잡혔다. 아래로 바람이 불었다. 통로였다.
 

지하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벽을 더듬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밀자 지직거리는 소리 끝에 불이 켜졌다. 한참 약해진 불이었지만, 한결 시야가 확보됐다. 눈이 부셔 왼 눈을 감고 미타가 거침없이 걸었다. 연구소는 따지자면 기억과 동일했다. 지나가듯 들은 말로는 혹시 몰라 대테러 벙커의 형식을 응용했다고 했다. 특수 제작된 금속성 벽이든 시멘트든 긴 시간의 흐름에는 어쩔 수 없는 건지 군데군데 낡은 티가 났다. 그리고, 분명 형태는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미타는 생각했다. 이렇게 초라하고 무질서한 공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렇게나 열려 있는 앰플과 사물함 속 삐져나온 종이 뭉치, 기계 위에 놓인 파일철. 벽 안에 본 풍경과 똑같은 데도 머리가 커서 보니 보잘것없었다. 왜 그때는 그렇게 두려워했지. 그들도 폭탄 하나에 울고 도망치고 넘어져 벌벌 떠는 인간들이었는데. 근 한 세대의 공백 이후 어거지로 체계적인 척을 한 이들일 텐데. 전쟁은 모두에게 동등한 광기와 폭력과 반향을 주었는데…. 그러나 이 말을 들어야 하는 이들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미타만이 메아리치지 않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무의미였다. 새하얀 머리카락은 순백의 상징인가 빛바랜 과거인가 눈물인가 얼어붙은 기억인가. 분명히 분노해야 했던 것만 알고 있었다. 사실 미타는 이제 아무렴 상관없었다. 시선에 감정 한 점 담지 않고 미타가 고개를 돌렸다. 저 안에 침구류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얇은 천막 천을 바닥에 깔고 누웠다. 눈을 감아도 사위가 시끄러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고,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안은 가능하면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까지도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참 말하지 않아 뻣뻣한 성대를 울리고 이름 하나가 입술을 비집는다.
 

“…아미타.”
 

거친 목소리가 벽에 닿는다. 냉기가 서려 있지 않은 연구소는 어쩌면 아주 자주, 생각날 것 같았다. 더 이상 희지 않고 미끄럽지 않은. 그립지 않고 잊을 수 없는…. 긴 밤을 보내야 했다. 잠이 죽음의 프로토타입이라면 잠든 틈을 타 그 애가 찾아오지 않기를 빌었다. 호명한 사람치고는 웃긴 소원이었다.
 

한동안 잠들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깨어있는 것과 잠들어있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어느샌가 자고 있었고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아있었다. 눈이 뻑뻑했다.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한숨을 내쉰 미타가 천막 천을 걷어 구석으로 밀었다. 뻐근한 몸으로 기어 올라간 연구소 지상층은 선명한 그림자가 져 있었다. 구름이 걷힌 모양이다. 노란 햇빛이 연구소를 동등하게 비추고 있었다. 미타는 그림자 아래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다시 걸을 차례였다.
 

그나마 덜 녹슬고 길이가 적당한 파이프 하나를 뜯어 땅을 짚었다. 리치가 긴 무기를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했다. 뭐,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지팡이의 기능도 얼추 할 수 있었다. 제자리를 빙빙 도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 연구소는 눈에 잘 띄는 색이었으니까. 흰색이라니, 어떤 생각으로 철판을 올리고 페인트를 칠했을까. 연구소를 뒤돌아보지 않은 미타가 걸음을 재촉했다.
 

모래 언덕을 몇 개 넘었다. 발아래가 단단한 것이 건물 잔해를 모래가 덮고 그대로 굳어진 것처럼 보였다. 알알이 떨어지는 모래 알갱이가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걸음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알파 팀을 만난 것은 표류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새 베이스캠프를 찍고 왔는지 제대로 무장한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꼴이 꽤나 우스웠고, 그래서 미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파이프를 내던지고 머리를 쓸어올리는 틈을 타 알파 팀이 미타를 중심으로 겹쳐 섰다.
 

“대장님! 어떻게 살아남으셨습니까? 전 진짜 송장 송환해야 하는 줄 알고 무서웠습니다. 아십니까?”

“얘 또 개소리하네. 근데 진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도 배우면 승진할 수 있을까요?”

“다 조용히 해. 대장 너희 때문에 쓰러지시겠다. 대장, 제가 본부로 헬기 요청 넣었습니다.”
 

목소리가 중첩된다. 미타는 진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외곽에서 헤맨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는데, 인간이 끼어드니 무게감이 완전히 달라진다. 왁자지껄한 사이로 평소와 같은 몇 마디를 던질 기력이 없었다. 되려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구소에서 예민해진 감각이 파업한 건지 둔해져, 언제부터 이렇게 소리 전달 속도가 느렸는지와 같은 시답잖은 질문이나 하게 만들었다. 멍했다. 헬기가 가까이 다가오며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휘날렸다. 쓸어 넘기고 정리한 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미타는 그저 빨리 어디로든 돌아가고 싶었다.
 

팀원들이 헬기에 차례대로 올라탄다. 미타가 가장 마지막이었다. 그 틈을 타 뒤를 돌아본 미타의 눈이 외곽을 훑었다. 지금껏 지나온 것과 똑같은 풍경이다. 비슷비슷한 요소들이 반복되는 곳이고, 저 멀리 지평선 뒤에 숨어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건 천천히 부서지는 과정 속에 놓여 있으므로, 우리 모두의 결말은 먼지나 모래에 불과하여서…. 아미타는 외곽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아미타는 지난 역사의 요약본이었고 미타는 그의 사료였다.
 

헬기에 올라탄 미타가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유물이 된 군인들의 뼈와 녹은 얼음이 가두고 있었을 세포와 부식된 금속에 대해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무엇도 회자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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