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 게이트 3

[아스타브] 초봄을 연습하다

안지님 연교

조각보 by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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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가진 자유시간이었다. 도시에 볼일이 있는 사람들은 각자 흩어졌고, 야영지에는 외출할 일이 없는 사람들만 남았다. 아스타리온과 코라는 후자로, 코라가 리라를 튕기며 즉석에서 노래를 만드는 사이 아스타리온은 한가롭게 책장을 넘겼다. 늘 울리던 칼 가는 소리도, 민스크의 북 치는 소리도 없는 야영지에서는 책 넘기는 소리도 꽤 도드라졌다.

삭, 삭, 종이가 넘어가는 틈으로 붉은 눈이 장난기를 담고 빛났다. 아스타리온은 지난 세월의 경험 상 남의 시선에 익숙했고, 코라가 리라의 현을 튕기는 척 하며 그를 쳐다보는 것 정도야 명상을 하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모르는 척 했고, 그 다음에는 즐거운 고민을 시작했다. 이대로 지켜볼까? 갑자기 불쑥 고개를 내밀어도 즐거울 것이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대답한 후 놀라는 걸 보는 것도 좋겠고, 그는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몇 가지 선택지를 굴려 보다가, 연주 소리가 잠시 멈춘 틈을 타 능숙하게 말을 뱉었다.

“뭘 그렇게 봐, 내가 그렇게 예뻐?”

속으로 숫자를 셋까지 세자, 기대대로의 반응이 돌아왔다.

“…갑자기 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절로 키득거리는 웃음이 샜다. 이렇게 반응을 재 보고 놀리는 게 영 좋지 못한 버릇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선행보다는 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이었다. 코라는 뿔에 건 장식들이 짤랑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허둥댔고, 그는 그 광경을 보며 숨이 넘어가도록-어차피 숨을 쉬진 않지만-웃었다. 그 사이 그녀는 나름대로 익숙하게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뾰족한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럼 조금만 더 놀려 볼까, 어차피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지 한참 된 책은 그렇게 덮여 짐 속으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당황하실까… 설마 날 안 봤다고 말하진 않을 거야. 그렇지? 그렇게 빤히 보고 있었으면서.”

사실 코라는 그렇게 말을 못 하는 편이 아니다. 온 도시를 누비며 연주하는 바드가 말솜씨가 없을 리 없다. 그러므로 아스타리온이 그녀를 놀릴 때 중요한 것은 속도였다. 다소 헛소리일지라도 정신없이 조잘대며 말을 늘어놓고 있으면, 코라는 무언가 말하려다가도 또다시 그를 빤히 바라보곤 했다.

“그럼 뭐, 늘 그랬듯이… 내 미모가 또 네 정신을 빼놓은 거 아니겠어. 그래도 너무 보는 거 아냐? 나 닳겠어, 자기.”

아스타리온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마쳤다. 코라는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리라를 한 쪽에 내려놓은 후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보통 얼굴이 새빨개져서 뚝딱대거나, 능청을 떨며 넘어가려고 시도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녀는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줄여 속삭였다.

“…혹시 내가 그래서… 싫었어?”

그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제일 먼저 최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민스크를 구출할 겸 은행을 털었던 일? 자헤이라의 집에 들렀던 일? 해그를 물리쳤던 일? 대체 뭐가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기에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는 코라가 어디서든 즐겁게 빛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고, 그게 이뤄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스타리온의 머릿속은 꽤 과격한 상상으로까지 굴러갔고, 코라가 말을 잇고서야 멈췄다.

“아니, 아니, 너 이상한 생각 하지? 그런 게 아니라… 뭐랄까, 내가 널, 좀 그렇게 봤나 싶어서…”

그 문장은 중요한 단어를 뭉개 놓은 것이었고,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손 끝에서 연주되는 선율만큼이나 화려하고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코라는 종종 그에게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랑이나 애정의 이야기보다는, 그를 마치 보석이 가득한 샹들리에처럼 바라보는 눈이었다. 눈이 멀 것처럼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그 눈, 아스타리온은 그 시선을 꽤 좋아하는 편이고, 그래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진 알겠어. 그런데 전혀 아니거든? 누가 날 어떤 식으로 보는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거야. 봐, 자기야…”

아스타리온이 고개를 숙여 몸을 가까이 붙였다. 코라는 또다시 삐걱대며 굳었지만, 그는 그 반응을 더 파고드는 대신 귓가를 깨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그 감각을 떠올렸는지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지만, 이걸 놀리는 건 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내가 싫어하는 건 날ㅡ 이렇게 보는 것들이지. 넌 아니잖아? 물론 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네 시선을 음흉한 쪽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ㅡ”

“그건! 정말! ⋯아냐!”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요는 넌 다르고, 네가 날 선망하듯 바라보는 건 꽤 좋으니까. 그냥 계속해.”

그는 언제 가까이 붙었냐는 듯 몸을 뒤로 뺐고, 오히려 그가 물러남에 따라 그녀의 얼굴이 부끄럼을 타듯 물드는 것을 즐겁게 구경했다. 그렇게 상황이 장난스러운 연인의 한때로 저물어 가려는 순간, 그가 다시 한 번 장난을 치고 싶지만 않았다면 코라의 오늘 치 부끄럼은 거기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보기만 하는 건 그만두고, 나한테 입이나 맞춰 줘. 내 까마귀 아가씨.”

아스타리온이 손을 뻗어 코라를 끌어당겼다. 붉은 천이나 금줄 등이 걸린 뿔이 잘랑이며 맑은 소리를 냈고, 급기야 코라의 얼굴이 붉게 펑 터지는 소리 정도는 막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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