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팬이라 하면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2300일 로그)
“혹시… 태량 님의 팬이세요?”
유즈리하가 이 질문을 어쩌다 듣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선 대략 30분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날짜는 11월 22일. 겨울 한기가 슬금슬금 머리를 들이미는 계절, 닷새간 태량은 집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주부터 무슨 광고 촬영 일정 때문에 바빠서 못 들어올 거라고 설명은 해줬었지만, 그 사실은 유즈리하를 괴롭히는 지루함을 조금도 덜어주지 않았다.
일은 한가했고, 게임도 질리던 차였고, 티비를 틀어 채널을 넘기다 시청한 영화는 심심하기 짝이 없어 의도치 않게 낮잠을 푹 자게 되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일주일 내내 위와 별다른 것 없는 일상을 지내고 있자니 주리를 틀 지경이어서 유즈리하는 충동적으로 밖으로 나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집이 아닌 유즈리하의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가 도달한 곳은 태량이 사는 행성, 타이마였다. 세계 간 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장치의 정확한 작동 원리는 몰랐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제대로 작동만 한다면 문제없지 않은가? 다만 스마트폰은 당연히 통신권 이탈이라 세계를 건너면 먹통이 되었기에, 유즈리하는 이동하기 전, 태량에게 그쪽으로 놀러 간다는 문자를 보내놓았다.
예전에 미리 문자를 보내놓지 않아 길이 엇갈리는 바람에 둘이 한참을 헤매고 난 후 태량에게 한 소리 들은 적도 있지만, 당장 그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니 생략하도록 한다.
유즈리하가 어슬렁거리기로 택한 장소는 배틀 아카데미 근처 거리였다. 점심은 이미 지났고 저녁은 아직 오지 않은 애매한 시간대라서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쌀쌀한 날씨에 붉은 토끼 귀 후드를 눌러쓰고 거리를 걷던 유즈리하의 눈에 익숙한 레몬색이 들어왔다.
아쉽게도 태량 본인은 아니었다. 한 상가 건물 벽면에 커다랗게 걸린 포스터를 보며 유즈리하가 입을 헤 벌렸다. 물론 단독으로 걸린 건 아니었고 주변에 다른 배틀러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포스터도 있었지만, 유즈리하의 눈은 오직 태량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런 걸 찍었으면 저한테도 좀 보여주지, 꼭꼭 숨길 생각이었냐며 속으로 불평 아닌 불평을 하고 유즈리하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문자는 불가능하더라도 카메라는 정상 작동하는 게 눈물 나게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각도를 바꿔가며 빛이 잘 드는 방향을 찾아 태량의 포스터 앞에서 바삐 셀카를 찍는 와중이었다. 낯선 목소리가 유즈리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 혹시… 태량 님의 팬이세요?”
유즈리하가 카메라 화면에서 눈을 떼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았다. 유즈리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청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와 태량의 포스터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유즈리하가 눈만 깜빡이자 청년이 펄쩍 뛰며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말을 건 건 아니었다. 그냥 태량의 팬인데 반가워서 물어본 거다. 필사적으로 늘어놓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유즈리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팬이라. 배틀러로서의 태량의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는데 팬이라고 자칭해도 될까? 하지만 무릇 팬이라 하면 어떠한 선망의 대상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즈리하는 단언컨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태량의 광팬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유즈리하가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당연하죠.”
“역시!”
청년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직 마음에 찰 만큼 셀카를 찍지도 못했는데 참아왔던 듯 말을 우다다 뱉는 그가 성가시게 느껴질 만도 했지만, 그중 태반이 태량에 관한 주접이라 유즈리하의 흥미가 끌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진짜 멋지지 않나요? 마치 전격의 화신처럼 훅 하고 사라졌다가 다른 데서 휙 나타나는 모습이.”
“그쵸.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보면 액션 화보 한 컷 찍어도 될 것 같고요.”
“역시 뭘 아시는 분이네요! 레몬색의 기라니 정말 이렇게까지 어울릴 수가 없고요.”
“하늘색도요. 사실 파란색을 그닥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태량을 만나고 나선 생각이 바뀌었죠.”
“맞아요. …어? 만나고 나선? 태량 님을 만나본 적이 있어요?”
생각 없이 신나게 맞장구치던 유즈리하가 멈칫했다. 이쪽 세계 사람도 아닌데 너무 입을 털었나? 그러나 걱정하기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뒷수습까지 생각하기 귀찮았던 유즈리하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네.”
“우와! 팬 미팅에서요? 아니면 우연히? 어느 쪽이든 진짜 부럽다.”
다행히 청년이 스스로 변명거리를 만들어주었기에 유즈리하는 머리를 굴릴 필요 없이 애매하게 고개만 끄덕여도 됐다. 청년의 눈은 이제 선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저도 언젠가 만나서 꼭 사인을 요청하고 싶어요. 직접 만나보니 어땠어요? 혹시….”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가 청년의 말을 끊어먹었다. 청년이 허둥대며 외투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들었다.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 어디 있냐며 핀잔주는 소리가 전화선 너머 유즈리하에게까지 들려왔다. 연신 사죄하며 전화를 끊은 청년이 울상을 지으며 유즈리하를 돌아보았다.
“죄송해요!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다시 만나면 같은 팬으로서 그때 더 이야기 나눠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유즈리하는 예의상 대충 손을 흔들어주었다. 청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즈리하가 활짝 미소 지었다.
“그냥 나오지 그랬어?”
“…너 같으면 그런 상황에 나올 수 있었겠어?”
골목 사이에서 태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늘한 바람 탓이었는지, 아니면 부끄럼 탓이었는지, 귓가가 눈에 띄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거기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맞장구치고 있었던 거라고?”
“역시 태량이야. 인기 많더라.”
태량은 동문서답하는 유즈리하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마침 잘 왔다며 포스터 앞에 선 자신을 찍어달라는 막무가내의 요청을 들어준 탓에 아직 귀가 홧홧했다. 제 얼굴이 문짝만 하게 나온 광고 앞에 손가락 브이를 하고 선 애인의 사진을 찍어주는 경험이 어디 흔했겠는가.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태량이 유즈리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팬 행세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행세라니, 난 진심이었는데.”
찌릿하고 정전기가 오른 옆구리를 문지르며 유즈리하가 검지를 척 들어 올렸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최고의 팬은 바로 연인이다!”
“…방금 그거 막 지어낸 거지.”
이곳은 몰라도 지구에는 진짜 그런 말이 존재한다고 잡아떼며 유즈리하가 슬쩍 태량의 손을 얽매듯 잡았다. 태량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 그런 걸로 하자.
아무래도 우상이라 하면, 팬의 사랑 앞에선 일부러 져줘야 하는 법이었다.
Written 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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