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모든 빗방울에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5주년 로그)
후텁지근하게 부슬비가 내릴 무렵, 소년은 소녀를 부른다.
‘비가 오는데 오늘도 산책할 거야?’ 소녀가 물어오는 질문에 소년은 망설임 없이 활짝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끈다. 내일은 너 없을 거잖아. 이 정도 비는 오히려 시원해서 좋지 않겠냐는 설득에 소녀는 반항하지 않고 같이 현관을 나선다.
둘의 손에 들린 것은 투명한 우산 하나. 지붕 아래를 벗어나자마자 토도독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비닐 위로 맺힌다. 한여름의 저녁은 시원하진 않지만, 내리쬐는 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더위가 한풀 꺾였나 하는 착각이 일게 한다.
찰박찰박 밟히는 웅덩이에서 물이 튀어 서늘한 감촉이 발목 부근을 적신다. 발밑을 예의주시하며 걷는 소녀를 소년이 장난스레 툭 건드리자, 소녀가 든 우산이 약간 흔들린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년을 바라보다 주고받듯 팔을 슬쩍 찌른다.
그렇게 장난이 하나둘 쌓여가며 평온은 미소가 되고, 미소는 웃음으로 변화한다. 펼쳐진 우산은 더는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둘은 다시 현관을 밟는다. 빗소리는 여전히 선명하게 창문을 두드린다.
내리는 모든 빗방울에 웃음이 있다. 소년과 소녀의 일상에 깃든 유쾌한 웃음이.
귓가를 시원하게 울리는 소나기가 쏟아지는 계절, 소년은 소녀를 떠올린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싫지는 않으나 어쩐지 텅 빈 집안이 허전하게 느껴진다.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행사였다고 했나, 그래서 며칠 집을 비울 거라고 했던가? 소년은 평소 눈길도 주지 않던 달력을 만지작거린다. 한 날짜에 작은 번개 모양이 그려져 있다.
혹여 번개가 치지는 않으려나 싶어 소년은 창밖을 쳐다본다. 회색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선 꾸준히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으나 그저 그뿐이다. 조금 아쉬운 표정이 되어 소년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슬쩍 올린다. 그리고 고개를 빼꼼 내민다.
처마 덕에 쫄딱 젖는 일은 없다. 소년이 한 손을 쭉 뻗어 내밀자, 물방울이 손바닥에 가볍게 튄다. 그게 마치 부재한 소녀가 보내는 전언인 양 소년이 빙그레 웃는다. 잘 지내고 있지? 나 보고 싶지? 나는 지금 네가 엄청나게 보고 싶은데.
하늘에 섬광이 번쩍 가로지른다. 소년이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전화가 진동한다. 소년의 눈이 반짝이고, 손을 빠르게 거둬들인 후 창문을 닫는다. 젖은 손을 대충 닦으며 문자함을 확인하는 순간이 소중하기 그지없다.
「잘 지내고 있어?」
내리는 모든 빗방울에 믿음이 있다. 소년과 소녀가 서로에게 전하는 굳건한 믿음이.
심장의 고동 소리처럼 천둥이 치는 밤, 소년은 소녀를 그리워한다.
본래도 취침 시간이 늦은 편인 데다, 시끄러워서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소년은 포기하고 몸을 일으킨다. 마차 소리 같기도 하고, 기차 소리 같기도 한 요란한 우레에 소년은 창문을 열지 않고 가만히 바라만 본다.
문득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다. 하늘에 별이 총총한 시간, 영화를 하나 틀어놓고 보다가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소년과 소녀 둘 다 집안을 뛰어다니며 열려있는 창문을 닫기 급급했던 밤이 있었다. 들이친 비를 마른걸레로 닦아내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영화는 제법 진행되어 있었다. 둘은 서로를 잠깐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되감기 해서 볼까? 영화를 되감았던 것처럼 소년은 소녀와의 단란한 기억을 되새기며 침대에 도로 드러눕는다. 결국 중간에 잠들어서 영화의 엔딩을 보지 못했더랬지. 내일 소녀가 돌아오면 엔딩을 마저 보자고 제의할까 고민하다가 소년은 눈을 감는다.
천둥소리가 다시 방을 채운다. 그러나 소년의 심장을 뒤흔드는 것은 하늘의 울림이 아닌, 소녀가 곧 돌아오리란 기대감이다.
내리는 모든 빗방울에 추억이 있다. 소년과 소녀가 공유하는 포근한 추억이.
하늘을 무겁게 덮은 장마가 한 걸음 물러날 때, 소년은 소녀를 기다린다.
우산을 받치고 소녀를 마중 나가는 소년의 발걸음은 가볍다 못해 경쾌하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이 믿을 수 없이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동시에 부풀어 오른 마음엔 기쁨만이 담겨있어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문득 위화감이 빨라지는 걸음을 붙들어 맨다. 소년이 고개를 젖히자, 우산도 뒤로 넘어간다. 그러나 얼굴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확연히 줄어들어 있다. 어느덧 옅어지는 회색 구름 사이로 미약하게 빛줄기가 통과한다.
비가 멈추고 하늘이 갠다. 소년은 눈을 깜빡이다가 우산을 접어 팔에 걸친다. 돌아가는 길에 같이 우산을 쓰지 못할 게 분명해 조금 아쉬워지면서도, 이참에 공원이나 한 바퀴 돌아보자고 꼬셔볼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다. 밝은 레몬색의 머리카락, 청명한 하늘을 닮은 눈동자. 소년을 발견하고 조용히 눈꼬리를 휘어 손을 들어 올리는 소녀의 모습이. 소년의 얼굴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처럼 환해진다. 반가운 이름이 입술에 맺힌다.
내리는 모든 빗방울에 설렘이 있다. 소년과 소녀가 가슴에 품은 여름 같은 설렘이.
내리는 모든 빗방울에 네 모습이 있다.
나를 향해 미소 짓는 네 모습이.
Written 23-07-28
2451자 (1837)
본 로그의 그림은 조랭 (@ johnzo__ )님의 커미션 입니다.
- 카테고리
- #오리지널
- 페어
-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