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즈태량

Waiting for your words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AU (1300일 로그)

노을이 지는 버스 정류장은 한적했다. 버스 전광판에 버스가 하나씩 도착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집으로 향하는 학생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아직 본인의 버스는 전광판에 뜨지도 않았던지라 유즈리하는 정류장 지붕 아래 멀뚱히 서서 닳아가는 핸드폰 배터리나 쳐다보고 있었다.

꼬르륵, 배에서 먹을 것을 달라는 시계 소리가 울리자 유즈리하는 전광판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기다리던 버스가 보여 반가운 마음도 잠시, 옆에 뜬 도착 시각에 유즈리하는 짜증 서린 한숨을 쉬고 차가운 정류장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근처 편의점을 다녀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돈이 없었다. 바닥을 친 교통카드 잔액을 충전하고 남은 잔돈으로 노래방에서 실컷 질렀더니 유즈리하에게 남은 건 아픈 목이요, 고픈 배뿐이었다. 혹시나 한 희망으로 주머니를 탈탈 털어봤지만, 동전 하나, 사탕 하나 나오지 않았다.

집에 일찍 들어가기야 싫었다. 평균적으로 그리 이른 귀가 시간은 아니었지만 유즈리하 딴에는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는 것이니 다음날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그러나 누가 배고픔 앞에 장사 없다 했었는가, 아사하기 전에 집으로 가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버스는 모처럼 바른생활을 실천하려는 유즈리하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아, 당 딸린다.”

허공에 건네는 혼잣말이었기에 당연히 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랬기에 갑자기 유즈리하의 눈앞에 모르는 손이 불쑥 들어왔을 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손 위에는 포장지에 싸인 초콜릿 하나가 놓여있었다. 아무 편의점에서나 묶음으로 파는 흔하디흔한 초콜릿이었다. 그 흔한 초콜릿에 유즈리하의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가 손 주인의 얼굴로 찬찬히 올라갔다.

자신과 같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차분한 푸른 눈동자와 밝은 레몬색 머리카락이 노을 아래 참 인상적이었기에 유즈리하는 저도 모르게 몇 분간 아무런 말도 없이 멀뚱히 여학생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여학생은 무안해하지도 않고 여전히 초콜릿을 내밀고 있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뒤늦게 조금 멍청한 질문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여학생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리하는 뜻 모를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고마워! 바스락거리는 포장지를 벗기고 유즈리하는 냅다 입안으로 초콜릿을 던져넣었다. 진한 단맛이 천천히 혓바닥 위에서 녹아내렸다. 달콤한 기쁨을 만끽하며 점점 작아지는 초콜릿을 입속에서 굴리며 유즈리하는 초콜릿을 선물해준 여학생을 슬쩍슬쩍 관찰했다.

교복을 보니 같은 학교 학생 맞는 것 같은데. 이름은 뭐지?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데 같은 학년은 아닌가? 아니, 사실 반 애들 얼굴 대부분을 모르는데 같은 학년일 수도 있지. 그냥 물어볼까?

마지막 남은 초콜릿의 흔적을 전부 삼키고 유즈리하는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버스 한 대가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생각에 잠겨있느라 전광판 안내를 못 들은 모양이었다. 제가 기다리던 버스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유즈리하는 여학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몸을 돌려 교통카드를 꺼내 들고 열린 버스 문 앞에 서 있었다.

잠시만, 이게 아닌데. 묻고 싶은 건 산더미인데 아직 질문 하나 꺼내지 못한 유즈리하는 드물게 당황하며 입만 뻐끔거렸다. 여학생이 버스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야 유즈리하는 간신히 한 문장을 소리쳤다.

“내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본래 묻고 싶었던 질문들과 거리가 상당히 멀었고 심지어 질문조차 아니었지만, 레몬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은 덜컹거리는 소음과 함께 버스 문이 닫히기 전 유즈리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술이 조용히 달싹였다.

버스가 떠나갔다. 홀로 남겨진 정류장 지붕 아래 유즈리하는 활짝 웃었다.

* * *

전날과 달리 버스정류장은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시끌벅적했다. 오늘부터 학원 특강이라도 시작했는지, 정류장엔 온종일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북적여 유즈리하는 벤치에 앉을 틈도 없었다.

그것까진 상관없었다. 유즈리하는 정류장 벽에 기대 입에 사탕을 굴리며 눈을 왼쪽 오른쪽으로 빠르게 굴렸다. 혹여 자신이 기다리는 이를 놓칠까 유즈리하는 발뒤꿈치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전전긍긍했다.

버스가 한두 대씩 차례대로 학생들을 싣고 떠나고, 사탕이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정류장은 어제처럼 텅 비었다. 그때까지도 그 레몬색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유즈리하는 멍하니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온 걸까. 어제 내가 대답을 잘못 들었나. 아니면 왔는데 서로 못 보고 지나친 걸까. 수만 가지 상상이 스쳐 지나가며 은근히 실망한 것도 찰나였다.

“안녕.”

담담한 목소리에 유즈리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어제 본 푸른 눈이 유즈리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레몬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 순간 유즈리하의 상념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찾았다!”

실망했던 만큼 반가운 마음이 컸던 탓이었을 테다. 유즈리하가 덥석 여학생의 소매를 잡자 잔잔하던 눈동자가 잠시 당황으로 흔들렸다. 악수하듯 소매를 몇 번 가볍게 흔드는 사이 조용히 우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너를 찾은 게 아닐까.”

그에 신경 쓰기에 유즈리하는 너무 들떠있었다. 드디어! 고작 하루밖에 안 지났건만 체감상 일주일은 기다린 기분이었다. 자유로운 손을 주머니에 넣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유즈리하는 작고 동그란 물건을 꺼내 여학생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마주 내민 여학생의 손바닥 위로 밝은 포장지의 사탕 하나가 떨어졌다. 여학생의 눈이 사탕에 닿았다가 다시 유즈리하를 바라보았다.

“이거 주려고 여태 기다린 거야?”

“그러면 안 돼? 참, 저번에 초콜릿은 진짜 고마웠어. 집에 가기도 전에 배가 등가죽에 붙어버리는 줄 알았는데 덕분에 아사는 면했어.”

…그렇구나. 대답은 반 박자 느렸지만, 여학생은 망설임 없이 사탕을 까서 입에 집어넣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유즈리하는 여학생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숙였다. 날카로운 눈매가 슬쩍 접어 웃으며 조금이나마 둥그레졌다.

“너도 XX학교 학생이지?”

“응. 넌 유즈리하, 맞지?”

유즈리하의 입이 헤 벌어졌다. 제가 처음 보는 사람이니만큼, 그가 자신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유즈리하는 돌려 말하는 재주라고는 티끌만치도 없었기에 솔직한 감상이 말릴 새도 없이 튀어나왔다.

“혹시 나 유명인이야? 어떻게 얼굴만 보고도 이름을 알아?”

“유명…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마주 보던 눈동자가 슬쩍 옆으로 굴러가는 것을 보니 솔직한 대답으로 맞서기엔 곤란한 질문이었나, 그리 관찰하던 유즈리하의 생각이 뒤늦게 본인의 이미지에 미쳤다.

날라리, 숙제를 개떡으로 알고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학생들의 반면교사. 모든 학교 선생들이 골칫덩이로 여기는 유즈리하. 머쓱해진 마음에 유즈리하는 여학생의 소매를 놓고 상체를 폈다. 어찌 보면 모르는 게 더 신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이름을 알고서도 먼저 다가온 게 제일 신기할 지경이었다.

“용케 나한테 말을 걸 생각을 했네.”

“나쁜 애 같아 보이진 않았으니까.”

정정한다. 이거야말로 유즈리하의 인생을 통틀어 들어본 제일 신기한 감상이었다. 유즈리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차고 넘치는 발언이었기에 유즈리하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나 학교에서 본 적 있어? 소문 같은 거 들어보지 못했나? 그리고…….

그러나 데자뷔처럼 유즈리하의 질문은 소리를 찾지 못했다. 익숙한 버스가 정류장에 덜컹거리며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 버스가 전날 여학생이 타고 떠났던 버스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유즈리하는 머릿속 모든 질문을 지우고 단 하나만 다급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버스 쪽으로 몸을 돌렸던 여학생이 뒤돌아봤다. 미미하다 싶을 만큼 작은 미소가 입술에 어려있었다.

“태량.”

안녕, 손을 흔들어주고 태량이 버스에 올랐다. 태량. 여학생의 이름을 잠시 멍하니 곱씹다가 유즈리하는 닫히는 문 틈새로 마지막 말을 건넸다.

“내일도 올 거지?”

버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돌아온 태량의 대답에 유즈리하는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버스가 시야를 떠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여기 학원 다니지는 않지?”

예리한 질문에 유즈리하는 씩 웃으며 익숙하게 손을 내밀었다. 펼쳐진 손바닥 위로 막대사탕이 하나 가벼이 떨어졌다. 벌써 일주일째 이어져 온 간식 교환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유즈리하와 태량은 작은 간식과 함께 간단한 질문도 교환했다. 그렇게 조금씩 초콜릿 하나로 시작된 인연을 키워가고 있었다.

유즈리하는 포장지를 까고 사탕을 입에 물었다. 동시에 발음이 반쯤 뭉개진 대답을 우물거리자 입 밖으로 튀어나온 얇은 막대가 이리저리 까딱였다.

“안 다니지. 그건 또 어떻게 확신했어?”

물론 학교도 제대로 안 다니는데 학원이라고 다닐 리가 없었다. 그러나 태량의 말은 보다 본질적인 부분을 찌르고 들어왔다.

“책가방을 안 들고 다니잖아.”

그렇구나. 어차피 펼쳐보지도 않을 교과서를 집으로 가져오는 건 너무 귀찮았던 터라 유즈리하는 책가방을 필수품으로 생각지도 않았다. 그렇지, 보통 학생들은 집으로 바로 하교를 하든 학원을 들러서 가든 책가방을 들고 다니겠지. 유즈리하의 시선이 힐끗 태량이 메고 있는 가방으로 향했다. 묵직하게 태량의 어깨를 누르는 모습이 들어보지 않아도 상당한 무게일 것이 뻔했다.

“다른 애들보다 늦게 끝나나 봐? 항상 이 시간에 혼자 가네.”

너는 학원에 다니고 있냐는 질문을 생략한 말이었지만, 태량은 당황하지 않고 긍정의 의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배우고 싶은 게 있어서 끝나고 추가 과외를 받고 있거든.”

“엄청 성실하게 사는구나.”

비꼬려는 의도는 없었고 그저 순수한 감탄이었다. 그렇게 살면 숨 쉴 틈은 있나?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었지만 그날따라 유즈리하는 태량의 눈가가 평소보다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유즈리하는 텅 빈 정류장 벤치에 걸터앉아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 쳤다. 척 봐도 같이 앉아있자는 얘기였기에 태량은 가방을 내려놓고 유즈리하 옆에 앉았다. 까득까득 남은 사탕을 깨물어 먹은 유즈리하는 막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익숙한 버스의 도착 시각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시간은 남아있네.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즈리하는 이어폰을 꺼냈다. 빠르게 엉킨 줄을 풀어내고 핸드폰에 연결하는 모습을 태량이 멀뚱히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톡톡 건드려 원하는 앱을 띄우고 이어폰 한쪽을 태량에게 건네자 태량은 망설임 없이 받아들면서도 이어폰과 유즈리하를 번갈아 보았다. 유즈리하는 빙긋 웃으며 한쪽 이어폰을 제 귀에 꽂고 핸드폰을 가리켰다.

“버스가 오기까지 5분 남았어. 좀 쉴 겸 한 곡 듣고 가.”

유즈리하의 제안에 태량은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꽂았다. 불가피하게 둘은 고개를 가까이 숙였다. 연결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와 기타 선율이 둘 사이의 침묵을 채워주었다. 곧 다가올 봄을 닮은 가수의 따스한 목소리의 가사가 대화를 대신했다.

And I am always waiting for your words……

마지막 음의 잔상이 고요한 저녁 속으로 흩어지자마자 전광판에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226번 버스가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태량 역시 안내를 들은 모양인지 이어폰을 빼고 유즈리하의 손 위로 톡 떨궈주었다.

“좋은 노래네. 이런 노래가 있는 줄은 몰랐어.”

보기 드문 확연한 미소가 태량의 입가에 번져있었기에 유즈리하는 솟구치는 만족감을 숨기지 않은 채 대답했다.

“가끔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노래 들으며 휴식하는 것도 좋지. 그렇지?”

그렇네. 다음에도 노래 추천해줘. 눈가까지 접어 웃는 모습에 유즈리하는 벌써 태량이 좋아할 만한 노래를 찾아 머리를 굴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깨달음은 순식간이었다.

아, 이게 호감이구나.

멀리서 달려오던 버스가 정류장 앞에 멈춰서고 문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태량이 벤치에서 일어서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멨다.

“다음은 네 차례지?”

간식 교환 얘기에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량이 손을 흔들고 버스 계단에 발을 디뎠다.

“내일도 만나자.”

유즈리하의 인사에 태량이 계단 위에서 몸을 돌렸다. 슬쩍 올라간 입술이 열리고 답이 유즈리하의 귓가에 닿는 순간 버스 문이 닫히고 출발했다. 홀로 남겨진 유즈리하는 버스가 떠나간 길을 바라보며 아쉬움에 잠겼다.

이게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기분이구나. 쓸쓸한 느낌만은 아니었다. 약속된 시간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도, 유즈리하는 알게 되었으니까.

내일은 내 차례지. 초콜릿을 들고 올까, 사탕을 들고 올까. 기분 좋은 고민을 하며 유즈리하는 매일 돌아오는 태량의 대답을 되새겼다.

그래, 내일 보자.

오늘도 유즈리하는 내일을 약속하는 태량의 단어를 마음에 품고 하루를 떠나보냈다.


Written 22-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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