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의 무대

Without Saying Love

카이멜 시레노바 x 리비에르 시라 AU (2000일 로그)

친애하는 카이멜에게,

편지를 받을 즈음 이삿짐을 챙기기 시작했을지, 아니면 짐 정리가 전부 끝났을지 감이 안 잡히네. 우체국 직원이 편지의 도착 날짜는 하루 이틀 차이가 날 수 있다고 했지만, 아무리 늦어도 네가 도시를 떠나는 날까지는 받아볼 거라고 말해주셨거든.

아무튼, 수고 많았어. 3년이나 머무른 곳을 며칠 안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았겠지. 네가 쓸데없는 물건을 사 모으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이런저런 생활품은 쌓이기 마련이니까. ‘그런 것까지 신경 쓰다니 의외군’이라고 네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네가 곧 돌아오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래도 얼른 실제 목소리를 듣고 싶네. 처음 듣는 건 잔소리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말이야. 실은 새로운 유리 장식품을 하나 들였거든. 자리가 없다 보니 집 정리를 싹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건데 사람이 사는 곳에는 짐이 정말 많이 쌓이더라. 물론 내 경우엔 짐보단 장식품이 많지만. 잔소리는 장식품 보여준 다음에 해줘.

도시를 떠나려니 어때? 기분이 좀 싱숭생숭할 것 같은데. 네가 평생 살던 우리 마을을 떠날 때와는 비교하지 못하겠지만, 3년이란 기간도 짧지는 않잖아?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에도, 사람들과 친해지고 정붙이기도 충분한 시간이었겠지.

네가 방학한 틈을 타 작년 여름에 내가 잠깐 놀러 갔을 때 기억해? 솔직히 그때까진 우리 마을이나 도시나 별 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 사실 인정이고 뭐고 압도당해서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어. 무슨 건물이 그렇게 높은지, 무슨 가게가 그렇게 다양한지, 그리고 사람이 이리 많은지. 네가 마중 나와주지 않았으면 분명 사람에 치이다가 혼이 쏙 빠졌을 거야. 그런데 기차역에서 붐비는 사람 틈에서도 너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어. 어찌나 반갑던지.

네가 다니는 학교도 구경하고, 마을회관보다 세 배는 큰 것 같은 도서관도 들어가 보고 (누가 이 많은 책을 읽을까 싶었지만, 어쩐지 책상에 앉아 한 권씩 돌파하는 네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아무 말 안 했었지), 정말 눈만 돌리면 새롭고 신기한 것투성이여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때 가로등이 눈에 띄었어.

한낮이라 불이 켜지지도 않은 가로등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으니 네가 물었었지. 우리 마을에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가로등이 뭐가 그렇게 신기하냐고. 내가 신기하지 않아서 쳐다보고 있다고 했더니 여전히 이상한 말만 한다고 너는 웃었고. 그렇지만 그때는 가로등을 보고 있기만 해도 안정감이 드는 기분이었거든.

내게 말은 하진 않았지만, 너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홀로 낯선 도시에 와서 온통 새로운 것들뿐인데, 평범하고 흔한 거리의 가로등이 익숙한 불빛을 밝히고 있다면, 조금쯤은 위안받는 기분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마을로 돌아와서 도시 얘기를 해주니 애들이 엄청 좋아했던 기억도 남아있어. 나와 조금 낯가리던 리리마저 네 소식을 들으러 쭈뼛쭈뼛 찾아왔었지. ‘카이멜 선생님은 어떻게 지낸대요?’라고 묻는데 눈이 올망졸망 귀여워서 놀리고 싶은 걸 참았어. 울리기라도 했다간 내 과외 학생한테 뭐 하는 짓이냐며 네게 혼날 테니까.

참, 저번에 내 편에 보내준 리리 선물 있지? 리리가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 전해달래. 감사 인사를 부탁받은 건 꽤 지난 일이긴 한데… 늦게 전한 건 리리한테 비밀로 해줘. 진료소 일이 바빴다 보니 깜빡했지 뭐야. 슬슬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시기라서 감기에 걸리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속출하고 있어. 다행히 심각한 환자는 없었지만.

네 부모님은 건강하게 잘 계셔. 나를 포함한 우리 집도 그렇고. 학교를 지나가다 본 리리도 쌩쌩해 보이더라. 너는 어때? 어디 아프지는 않지? 자기 관리에 철저한 건 알지만, 너도 사람이니 혹시나 해서 물어봐. 이건 네가 돌아오면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르려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지만 지우기도 뭐하니 그냥 이대로 둘게.

큰 짐은 따로 보낸다지만, 선물은 바로 전달하고 싶다고 네가 두 손 넘칠 정도로 짐을 잔뜩 들고 올 게 눈에 훤해서 내가 기차역으로 마중 나갈 거야. 밤늦게 나올 필요 없다고 사양할 게 뻔하지만, 돌아온 너를 처음 환영해주는 사람이 나였으면 하는 욕심도 있거든. 네가 이해해, 내가 제멋대로 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20년 넘게 날 알아 왔는데 이 정도 변덕은 너도 익숙하겠지.

3년 전, 네가 도시로 떠나던 날을 기억하려나. 그때도 내가 기차역까지 너와 갔잖아. 부지런히 서둘러서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기차역 자판기(우리 마을의 유일한 자판기였지, 도시에 가니까 눈 돌리는 곳마다 있어서 놀랐지만)에서 따듯한 커피 한 캔씩 뽑아 기차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있었어.

‘이제 한동안 얼굴은 못 보겠네.’ 네가 중얼거린 말에 난 웃었었지. 왜, 떠나는 게 갑자기 후회돼? 장난스러운 질문에 너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어. 그리고 드물게 내게 농담조로 맞받아쳤지. ‘후회는 네가 하지 않을까?’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머리를 기울이자 너는 기차가 들어서지 않아 플랫폼 밑에 훤히 보이는 철도를 응시하며 말했어.

‘네가 한 번쯤 말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무엇을, 이라는 빈말은 하지 않았지. 너는 조금 있으면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날 텐데 굳이 모른 척 시침 떼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어.

소리 내 말 해본 적 없는 감정. 나나 너나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우리의 관계. 형태가 없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서로를 마주 보는 소망.

그렇지만 그것뿐으로 우리의 전부가 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기에, 족쇄로 얽매이지는 않는 바람.

‘나 기다리는 거 잘해.’ 아직 그 감정의 형태를 잡을 때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서 네게 준 대답이었어. 온전하고 솔직한 대답. 그에 네가 피식 웃었지. ‘3년은 짧은 시간이 아닐 텐데.’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서서히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기차가 완전히 멈춰 선 후에 입을 열었어. 이 말은 경적 소리에 묻혀버리게 두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널 기다리기에 너무 긴 시간은 아니지.’

탑승객은 기차에 오르라는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우리는 움직였어. 네 가방을 짐칸에 싣는 걸 도와주고, 객실로 오르는 계단에 서서 넌 나를 뒤돌아봤지. 네가 웃고 있어서 나도 마주 웃을 수 있었어.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시간 날 때 편지하라는 말에는 아쉬움, 또 조금의 설렘, 그리고 기다리겠다는 약속이 담겨있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었어.

그 3년의 끝이 다가오네. 내가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듯이, 너도 그만큼 내가 내 감정에 형태를 주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우리 모두에게 적절할 때가 오기를 고대하며.

이 편지를 읽는 순간까지 나를, 우리를 믿어줘서 고마워. 기차역을 밝히는 가로등 밑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그때 못했던 말을 네게 전하기 위해서.

기다리던 초봄이 도래하는 시기에 서서,

리비에르


Written 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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