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의 무대

To Live for

카이멜 시레노바 x 리비에르 시라 AU (4주년 로그)

끝이 없는 전쟁. 비릿한 쇠 냄새와 혈흔의 악취가 코끝에서 떠나는 날이 없었다. 사방으로 난무하는 고함과 비명이 도리어 정겨울 지경이었다. 심장 박동보다 최후의 단말마가 자주 들려오는 곳이 전선이었다.

아군과 적군이 엉키고 뒤섞여 특유의 갑옷 색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눈부신 붉은 머리카락은 그 누구도 못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바람에 휘날렸다. 갑옷도, 투구도 없는, 긴 망토 자락을 휘날리는 여인은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에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검을 들고 달려드는 병사가 눈 깜빡임 한 번에 불기둥이 되어 타올랐다. 고통에 찬 목을 긁는 비명도, 제정신 아닌 저주도, 살이 타는 악취도 화염의 군주, 카이멜 시레노바에게 닿지 못했다.

“마법사를 죽여라! 저 붉은 마법사만 죽이면 승산이 있다!”

“마법사님, 저희에게 승리의 불꽃을!”

양쪽에서 질러오는 것은 사람도 아닌 짐승의 울부짖음과 별다르지 않았다. 카이멜 시레노바가 사선으로 손을 내리그었다. 빈손이었지만 그 어떤 무기로 단단히 무장한 병사보다 많은 죽음을 부르는 하얀 손이었다. 순식간에 뜨거운 불길이 갈라진 땅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카이멜의 금색 눈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시뻘건 화염이 타올라 사라지는 경계에 얼음 결정이 다수 반짝이고 있었다.

“혼자서 그렇게 날뛰면 내가 많이 섭섭하지. 우리 서로 알아 온 시간이 얼만데, 조금 기다려주는 건 할 수 있지 않아?”

부드럽고 얼핏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이 화염에 녹아내리는 얼음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바다색의 푸른 머리카락이 짧게 흔들렸다. 시린 하늘색 눈동자가 카이멜을 보며 휘었다. 남자의 순진하게 웃는 얼굴에도 카이멜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긴장을 유지했다. 하얀 장갑을 낀 남자의 손끝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마력이 육안으로 보일 만큼 위협적이었던 탓이었다. 카이멜이 죽였다고 생각했던 적군 병사들은 이미 멀리 후퇴하고 있었다.

쯧, 카이멜이 혀를 찼다. 저 마법사의 주특기인 환상은 몇 번이고 눈으로 목격했지만, 여전히 대응하기 귀찮은 능력이었다.

“본인이 늦어놓고 말이 많군. 아예 오지 말지 그랬나?”

환상빙결, 리비에르 시라. 겨울을 닮은 적군의 마법사가 거짓처럼 미소지었다. 정적은 잠시였다. 마력과 마력이 충돌하고,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여파가 반경을 휩쓸었다. 먼지가 걷힌 후에 여전히 제 발로 서 있는 사람은 두 마법사뿐이었다.

“오늘은 끝을 봐야 하지 않겠나.”

고저 없는 차분한 협박 같은 말에도 리비에르 시라는 웃으며 비명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손을 빙글 휘둘렀다. 얼음 결정이 휘몰아치며 날카로운 조각이 카이멜을 겨눈 채 허공에 매달렸다.

“싫은데. 오히려 우리 실력이 막상막하인 게 다행 아닐까? 일찌감치 끝이 났으면 서로 이리 즐겁게 합을 주고받는 일도 없었을 테고.”

사실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듯이. 참으로 의미 없는 말이 둘 사이에 머물렀다.

“설령 자네 말이 맞다 하더라도, 그게 이곳에서 뭐 그리 중요한가?”

카이멜의 등 뒤로 화염의 고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후끈한 열기가 리비에르가 서 있는 곳까지 닿았다. 허공에 띄운 얼음 끝이 녹아 물방울이 맺혔다.

“네 말마따나, 달라지는 건 없겠지. 어쨌든 우리는 피를 보는 것밖에 모르는 전쟁의 마법사니까. 하지만 우리 중 한 명이 죽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개인적인 유감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어. 도리어.”

네가 쉽게 죽어주지 않아서 참 기쁘다고 생각해. 지휘관이 들었다면 반역이라 기함했을 말이 리비에르 시라의 입에서 가볍게 떨어졌다. 호선을 그리는 리비에르의 눈을 따라 카이멜의 눈가도 가늘어졌다.

오늘도 쓸데없이 입만 살았군. 자네 마력이 그 화려한 말솜씨를 뒷받침해줄 수 있나 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몇 번째인지 셀 수 없는, 가차 없이 서로의 목숨만을 노리는 마법사의 대결이 펼쳐졌다.

* * *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평화의 날이 도래하자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백 년 이상 이어진 전쟁은 왕, 귀족, 백성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아물지 않는 흉터를 남겼으나, 살아남은 이들은 그뿐 만에도 감사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보듬어 다시 삶의 터전을 쌓아 올리고, 귀한 회복의 시간을 맞이했다.

“마법사를 처형해라! 전쟁의 대량학살자에게 죄를 물어라!”

그리고 바야흐로 마법이 저물어가는 시대가 찾아왔다.

전시에 누구보다 귀하게 대접받았던 마법사는 평화 협정 문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 누구보다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 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얼핏 보면 타당했다. 병사 하나가 병사 하나를 죽일 때, 마법사는 몇십, 많게는 몇백의 병사를 살해했다. 살육의 선두에는 언제나 마법사가 있었다. 국가가 씌우는 책임을, 자신의 고향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마법사의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역설적인 일이었다. 참혹한 전장을 견디지 못해 멀리 도망간 마법사 탈영병에 대해선 모두 잊었고, 전쟁의 영웅이라 떠받들어지던 아군 마법사는 한순간에 전범으로 추락했다.

“우리의 가족과 친구를 살해한 카이멜 시레노바에게 사형을!”

기실 그게 마법사의 죽음을 촉구하는 진짜 이유가 아님을 카이멜 시레노바도 알고 있었다. 전쟁의 죄를 물으려면 그 누가 타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었을까. 참혹한 전쟁을 시작한 먼 조상부터, 제 욕심에 전쟁을 이어간 국왕, 그저 명령을 따랐던 병사까지. 손에 피 묻지 않은 이는 없었다. 하지만 과거의 죄를 직시하기보단 묻어두는 편이 언제나 쉬운 길이었기에, 다들 모른 척 눈을 돌렸다.

마법사는 그저 그 희생양이 되기에 누구보다도 적합했던 인재였다. 한때 전쟁의 영웅이 되기에 걸맞은 인재였듯이. 상부의 명령이라는 목줄이 채워진 채로 전쟁터에 내몰아졌던 카이멜 시레노바는 이제 마력 구속구라는 족쇄를 찬 채로 단두대에 섰다. 적의에 가득 찬 관중의 시선이 날카롭게 카이멜을 찔러왔다. 그럼에도 전장에서 그랬듯, 화염의 군주는 허리를 세우고 꼿꼿하게 앞만 바라봤다. 담담한 표정에 한치 흔들림이 없었다.

“마법사, 카이멜 시레노바. 이명 화염의 군주.”

회피하지 않고 네 죄를 직시하라. 얼음장 같은 판사가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양피지를 둘둘 펼치며 죄목을 하나하나 읊었다. 상해죄, 침략죄, 살해죄, 반역죄… 그 끝도 없고 더욱더 화려해지는 목록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카이멜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그저 명분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이멜 시레노바, 당신의 죄를 시인합니까?”

“시인합니다.”

부정해봤자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관중에서 날아오는 돌이나 한둘 더 맞을까. 웅성대며 면전에 대놓고 욕하는, 한때 자신이 지키려 죽도록 노력했던 사람들을 보며 큰 원망은 들지 않았다.

그저 피로했다. 지긋지긋했다. ‘전쟁이 끝난다면’이라는 희망을 내려놓은 지도 까마득했다. 도리어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이 피투성이 길에도 끝이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한때 적국이었던 나라를 침략한 죄, 무자비하게 병사들을 살해한 죄, 아군 적군 고려하지 않고 치명적인 위해를 끼친 죄. 전부 시인합니다. 제가 단독으로 행한 죄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은 마법사였다. 마법사의 색출과 처형이 시작되자 아직 잡히지 않은 이들은 빠르게 도망쳐 자취를 감췄다. 자신의 휘하에 있었던 몇 안 되는 마법사 역시 이미 카이멜의 도움을 받아 피신한 지 오래였다. 그들을 쫓지도 않고, 그들의 행방을 찾지 않을 것. 카이멜 시레노바가 자신의 목숨을 내걸면서 얻어낸 대가였다.

일은 약속된 듯 빠르게 진행되었다. 판사의 지시에 따라 사형집행인이 카이멜의 무릎을 꿇렸다. 카이멜은 순순히 단두대의 틀 위에 목을 올렸다. 두 손목을 묶은 마력 구속구 수갑이 쇳소리를 냈다. 한겨울, 서리가 낀 처형대의 바닥은 뼈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머리 위에서 스산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자 카이멜이 잠시 눈을 감았다. 조금씩 내리는 눈이 머리카락을 차갑게 적셨다.

겨울의 마법사, 전쟁의 최후까지 자신의 최고의 적대자였던 리비에르 시라.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카이멜은 문득 궁금해졌다. 전쟁이 끝나고 더 전시 같은 상황에 몰아넣어지면서 카이멜은 휘하의 안위를 챙기는 데 급급해 적군의 행방에 대해 알아볼 정신은 없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끝나기 직전, 지금 와서야 생각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으리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으니 처형당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평화 협정이 맺어지자마자 영리하게 일찌감치 도망쳤을까. 그도 아니면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며 숨어있으려나. 그 남자가 취했을 법한 여러 행동을 상상하며 카이멜은 피식 웃음 지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입꼬리만 살짝 끌어당긴 작은 미소였다.

시간을 읊는 사형집행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멜 시레노바는 눈을 떴다. 전쟁터에서 죽음을 선사하며 눈 돌린 적 없었다. 죽음을 맞이할 때도 똑같이 뜬눈으로 맞이하리라 다짐했었다.

서걱서걱, 밧줄이 잘리는 소리가 메트로놈처럼 느리게 들려왔다. 얼음 서리가 낀 바닥이 옅게 반짝였다. 카이멜의 금색 눈이 커지며 파래진 입술이 벌어졌다.

툭.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떨어졌다. 관중의 환호와 함께 눈이 화염처럼 붉게 물들었다.

* * *

“겨울이어서 다행이야, 그렇지?”

여름에 서리가 껴있었으면 누군가는 수상하게 여겼을 테니까. 그럼 네 목이 잘리기 전에 빼낼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겠지.

살벌한 말이 가벼이 건네졌다. 카이멜 시레노바가 고개를 들어 빙글 웃는 푸른 머리카락의 마법사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둘 사이로 겨울의 칼바람이 휑하게 지나갔다. 외진 숲속, 높게 뻗은 나무의 그늘에 새 하나 지저귀지 않았다.

잠시만 실례할게. 새하얗게 얼어붙은 나무뿌리에 걸터앉은 카이멜 앞에 리비에르 시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카이멜의 손목에 걸린 마력 구속구 수갑을 받쳐 들고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던 리비에르는 이내 어려운 문제의 해답에 도달한 듯 화사하게 웃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파리한 손이 미끄러지듯 수갑을 어루만지자 그의 손가락이 닿는 곳부터 수갑이 얼어붙었다. 투명한 한기가 손목을 얼려버릴까 생각한 것도 잠시, 수갑이 산산이 부서져 그 잔해가 발치를 굴렀다.

수갑에서 벗어나자마자 카이멜의 손이 리비에르의 멱살을 잡았다. 리비에르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왔다. 둘의 얼굴 사이가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카이멜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살짝 떨리는 손이 수갑에 오래 묶여있던 탓인지, 분노했기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도대체 왜 나를 빼낸 건가? 내가 무슨 각오로 그곳에 선 줄 알고!”

고함이라기에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지만, 위압감은 부족하지 않았다. 지레 항복을 선언하듯, 리비에르는 두 손을 들어 보였지만 웃는 얼굴엔 변함이 없었다. 왜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모를까, 네가 생각하는 것쯤이야. 네가 나를 손바닥 꿰듯 알고 있듯이, 나도 네 동기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어. 서로만큼 잘 아는 사람도 이제 없을 텐데. 내 말이 틀려?”

“그걸 잘 아는 사람이!”

“네가 이렇게 나올 것도 어느 정도 예상했지. 걱정할 필요 없어. 넌 확실히 죽은 거로 처리됐어. 네 목이 잘리는 장면까지 내가 아주 생생하게 재현해줬거든. 있지도 않은 걸 불에 집어넣고 장작까지 잿더미가 됐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뭐하면 내가 다시 보여줄까?”

내가 누군데. 그 말과 함께 카이멜의 손에 잡혀있던 리비에르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카이멜이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홱 돌리자 옆에 앉아 싱글싱글 웃고 있는 마법사가 눈에 들어왔다.

하, 여전히 대처하기 까다로운 능력이로군. 헛웃음을 내뱉으며 카이멜은 미간을 문질렀다. 환상빙결이라는 이명을 가진 마법사가 가볍게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카이멜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이멜은 그를 잠시 응시했다.

얼음에 거짓을 비춰 환상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마법사, 리비에르 시라. 자신 역시 저 마법에 애를 먹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의 말대로 깔끔히 일이 처리되었을 거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별개로 저 뜻 모를 미소가 얄미운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카이멜은 그의 손을 무시하고 스스로 일어섰다. 리비에르는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자네 멋대로 쓸데없이 벌인 일이지만 그래도 목숨을 빚졌으니 감사 인사는 해두겠네. …하지만 다시 묻고 싶군. 대체 왜 나를 살렸나?”

서로의 안위를 챙길 만큼 우리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을 텐데. 평정심을 되찾은 카이멜의 차분한 물음에 리비에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새 어깨 위로 하얗게 내려앉은 눈이 사르르 휘날렸다. 친근한 사이였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전쟁뿐이었던 내 삶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응당 네 몫이어야지. 그때까진 그 목이 잘 붙어있어야 하지 않겠어?”

얼어붙은 하늘색 눈동자가 타오르는 금색 눈동자를 지그시 붙들어 놓았다. 말이 필요 없는 침묵의 대화가 오간 후 리비에르가 다시 가벼이 웃었다.

“내 목을 노리면서 계속 옆에 있으란 얘기는 아니지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데로 가도 상관없어. 그 지긋지긋했던 전쟁터에서 나만 살아나오기엔 뒷맛이 씁쓸했을 뿐이야. 보답도 필요 없고, 복수라면… 글쎄, 순순히 받아줘야 하나?”

그럴 생각 없다는 걸 알면서도 빈말은 여전히 잘하는군. 카이멜이 코웃음 치고 긴 붉은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냈다. 서서히 혈색이 돌아오는 입술이 열렸다. 그래서.

“이제는? 살려놨으니 어쩔 셈인가? 자네 말이야 거창하지만 이제 우리 둘 다 돌아갈 곳도 없지 않나.”

보아하니 자네도 도망자 신세인 것 같은데. 리비에르는 부정하지 않았다.

“돌아가야 할 곳이 없다는 것은, 반대로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얘기도 되지.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한 곳에 붙들려 있었으니까.”

너무 오랫동안 얼굴도 잘 모르는 왕들의 무기가 되어 휘둘렸다. 그 무기가 이제 사람이 되어 걷고자 하니 막막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이멜 시레노바나, 리비에르 시라나, 다른 마법사와 다를 것 없이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다. 명령이라는 목줄이 사라지자 그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그 공허함에 공포마저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속삭임이나 다름없는 혼잣말에 리비에르가 하얀 손을 뻗었다. 그의 검지 끝이 가리키는 깊은 숲속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옆에서 리비에르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이 숲의 끝에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는데.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카이멜 역시 들어본 적 있었다. 늙은 마법사에게서 어린 마법사에게로 내려져 오는 구전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카이멜이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공기의 마력 농도가 너무 짙어 평범한 사람들은 숨조차 쉬지 못하는 곳이라고 들었지. 그래서 동시에 마법사의 안식처이자 낙원이라 불린다고도 하고.”

“시작점으론 나쁘지 않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곤 시간이니까, 찬찬히 서두르지 않고 찾아보지 않을래?”

같이 말인가. 옅게 웃으며 묻자 싱그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그것도 나쁘진 않잖아? 고개를 저었지만 카이멜은 리비에르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한 발짝, 어두운 겨울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밟고 카이멜은 뒤돌아 리비에르를 바라보았다.

“그럼 가보지. 죽음의 계곡으로.”

“그리 말하니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죽으러 가는 것 같네.”

농담 섞인 말에 카이멜은 처음으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빛이 돌아온 눈동자가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아니, 이제 살아보러 가는 거지. 자네와 나, 둘 다 말일세.”

망설이지 않고 걸어 나가는 붉은 마법사를 푸른 마법사가 뒤따랐다. 두 명의 마법사는 다시 뒤돌아보는 일 없이 깊은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위대했던 마법의 자취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Written 2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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