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곡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리리 이데아
이곳에 새로운 태양은 뜨지 않는다.
리리는 시계탑을 올려다봤다. 높이 때문에 손바닥보다도 작아 보이지만, 리리는 저 시곗바늘이 제 키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째깍째깍. 바늘이 움직인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차원에서, 이 스테이지는 드물게 현실 세계와 미약한 연결고리가 남아있는 장소였다. 비록 하늘은 영원한 붉은 노을을 유지하며 그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지만, 리리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큰 시곗바늘이 12에 당도하자 리리는 숨을 삼켰다. 시계탑의 종은 울리지 않았다. 그 허무한 공백에 소녀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가, 이내 작은 숨을 토해냈다.
밝은 민트색 눈동자가 시계를 벗어나고, 소녀의 보폭은 시계탑 맨 아래 문에 다다랐다. 작은 손이 문고리에 닿자 문은 저항 없이 열렸다. 혹 페이스리스가 부근에 없나 휙 주위를 둘러본 후, 리리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붉은 하늘의 빛이 사라졌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좁은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흐릿한 등불이 존재하는 빛의 전부이며, 딱딱한 돌계단이 위로 쭉 이어졌다. 리리는 망설임 없이 첫 계단을 디뎠다. 신발이 또각거리는 소리가 벽에 부딪혀 울렸다. 규칙적인 그 호흡이 마치 시계 초침과 흡사해 리리는 미묘한 위로에 잠겼다.
또각또각, 지칠 만도 하지만 리리의 등반은 한참이나 멈추지 않았다. 아티팩트를 사용해 몸을 가볍게 하고 순식간에 날아 올라갈 수도 있지만, 리리는 고집스럽고 꿋꿋하게 한발씩 위로 내디뎠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오직 자신만이 노력의 증인이자 누구보다 엄격한 시험관이었다.
당연하게도, 리리가 원하는 곳에 도착했을 즈음 소녀의 숨은 폐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고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는 데 다시 한참 걸렸다. 이윽고 리리는 고개를 들고 얼굴선에 달라붙은 주황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소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시계탑, 꼭대기 층의 천장이었다.
그곳에 시계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저 밑에서 본 시간의 흐름과 똑같다는 걸 여러 해에 걸친 경험으로 인해 인지하고 있었다. 올해도 제시간에 이 방에 도달했다는 것을 확인하자 만족스러운 표정이 소녀의 입가에 걸렸다.
남은 시간은 5분. 리리는 탑의 난간에 걸터앉았다. 까마득한 높이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한 손으로 안정적으로 난간을 쥐고,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서 천으로 둘둘 싸인 물건을 꺼내자 작고 청명한 소리가 짧게 울렸다. 손바닥만 한 종을 조심스레 무릎 위로 내려놓자 흔들리던 방울이 잠잠해졌다.
발밑에서 초침 소리가 흘러갔다. 하늘은 리리가 처음 시계탑을 오르기 시작한 때와 같은 붉은색이었다. 고개를 젖히고 리리는 시계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영원한 순간 속에서 소녀는 시간이 바뀌는 찰나를 기다렸다.
세 개의 시곗바늘이 전부 위로 향했다. 작은 종이 허공을 갈랐다. 영롱한 메아리가 자정을 가리키는 시간에 맞춰 바람을 타고 퍼졌다.
그렇게 열두 번, 리리는 종을 울렸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 이는 소녀만의 새해를 맞이하는 방식이었다.
고된 길이 앞에 펼쳐져 있더라도 주저앉지 않겠다는 다짐이 이 작은 종에 깃들어있다. 소녀는 정상을 향해 오른다. 오늘도, 내일도. 작년에도 그랬듯이, 올해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돌아온 일 년의 서곡을 알리는 종이 소녀의 손에서 울린다.
Written 2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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