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속박
계약을 맺을 땐 신중하게
유달리 더운 날이었다.
아스팔트가 달궈지고 표면에 아지랑이가 필 만큼 더웠다. 밀짚모자로 보호하고 있는 정수리가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슈퍼에서 막 구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시내를 걷고 있었다. 살인적인 더위였기에 인도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뚝, 뚝, 아이스크림이 열기에 녹아 한 방울씩 떨어졌다.
숨 막히는 더위도, 손의 끈적임도, 등을 적신 땀줄기도, 전부 기억한다.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도로를 가득 메울 차들도 보이지 않아서, 이곳에 있는 건 자신 뿐인 것 같았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차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귓가에 쿵, 쿵, 소리가 울렸다. 자동차 경적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너무 더운 탓에 환청이라도 들리는 걸까? 열사병에 걸릴 지로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이 소리가, 이 장소가, 이 상황이, 너무 익숙해서―――――
“유지.”
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가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검정보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여긴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있는데. 살을 태우던 더위는 어느 순간 느껴지지 않았다. 끈적이던 아이스크림도 보이지 않았다. 상가 건물 유리창에 비춰진 건 밀짚모자를 쓴 초등학교 시절의 자신이 아니라, 이제 막 혼자가 된 고등학생인 자신이었다.
검게 빛나는 눈동자가 저를 응시한다. 희미한 미소는 언젠가 본 것 같았다. 언제였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가 말했다.
“내 이름을 부르렴.”
자,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特愛(특별한 사랑)
4. 속박
헉! 유지는 고개를 번쩍 들며 깨어났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상체를 일으키면, 피가 잔뜩 고인 웅덩이처럼 보이는 곳에 누워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주변을 살피면 소의 두개골이 사방에 쌓여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인간의 늑골 비슷한 거대한 뼈가 천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고개를 내린 유지는 손으로 고여있는 물을 뜨면, 피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맑았다. 이 공간 자체가 붉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피가 아니라는 점에서 유지는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기는 어디지? 설마, 나 죽어서 지옥에 온 건가?”
암만 봐도 지옥이나 다름없는 장소에서 눈을 뜬 탓에 유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나쁜 짓을 하며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 했는데, 지옥이라니! 유지는 억울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할아버지 몰래 파칭코를 방문했던 것이 떠오른 유지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지옥은 너무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가까운 곳에 떨어져 있는 소의 두개골을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나 진짜 죽었은 걸까나―――…
“언제까지 멍청한 모습을 보일 셈이냐.”
낮고 음산한 목소리에 유지의 고개가 돌아갔다. 돌아본 곳에 있는 것은 뼈로 쌓아올린 왕좌, 그 위에 누군가가 앉아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요소가 ‘이타도리 유지’ 그 자체였으나, 얼굴과 손목의 검은 문신이며 날카로운 눈매와 뾰족한 검은 손톱은 이타도리 유지의 것이 아니었다. 하얀 기모노를 두르고 목에는 검고 긴 천을 두르고 있으며, 발끝까지 검은색 바지로 보이는 하의를 입었고, 가벼워 보이는 짚신을 신고 있다. 유지는 자신은 절대로 입지 않을 차림의 또 다른 자신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저것이 바로 료멘스쿠나라고.
“…저, 스쿠나, 님?”
“어울리지 않게 높여 부르지 마라. 오히려 기분이 나쁘군.”
대놓고 짜증이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스쿠나가 말했다. 유지도 뻘쭘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뱉은 스쿠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지가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첨벙, 물에 잠겼음에도 기모노는 멀쩡한 것에 유지는 비현실성을 느꼈다. 죽어서까지 같이 있을 리는 없으니, 이것도 일종의 꿈인가? 유지가 알고 있는 상식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추측을 생각했다. 유지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건지, 스쿠나는 더욱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유지 앞에 섰다.
“이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군. 배짱이 좋은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윽! 그렇지만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풍경이 이런데 어쩌겠어!…요”
“그 어정쩡한 높임은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그래도 일단, 천 년 전에 살았다고 하니까……”
할아버지라는 말이잖아, 뒷말은 스쿠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삼켰다. 괜히 말하다간 정말로 크게 혼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유지가 말을 이어서 하지 않았음에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눈치를 챈 스쿠나는 더욱 유지에 대한 짜증과 한심함을 표정에 담았다. 이놈을 어쩐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스쿠나는 인내심이라는 이름의 조각들을 끌어모아 짜증을 최대한 누른 채 입을 열었다.
“…여긴 내 생득영역이다.”
“생득영역?”
“네놈의 수준에 맞춰서, 마음속이라고 해두지.”
“마음속…”
마음속 한번 살벌하네, 유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네놈은 내가 불러서 이곳에 온 거다.”
그러니 죽었다는 멍청한 생각은 버려라. 정말 죽이고 싶을 만큼 멍청한 생각이니까.
스쿠나는 나름 친절하게 설명했다. 아마도.
“······날 왜 부른 건데?”
스쿠나의 힐난을 흘러들은 유지는 스쿠나가 말한대로 존대를 그만두며 물었다. 스쿠나는 한 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감격인지 탄식인지 모를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하,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겠군.”
“그거 무슨 의미야?!
“네 놈이 생각만큼 멍청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의미다, 애송아.”
신랄한 스쿠나의 말에 유지는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유지는 앓는 소리를 내며 표정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쿠나는 두 무릎을 굽혀 유지와 눈높이를 비슷하게 맞췄다. 그럼에도 스쿠나가 유지를 내려다보는 각도인지라, 유지는 계속 고개를 들어야만 했지만.
“네놈을 여기에 부른 이유는 『속박』을 맺기 위해서다.”
“속박?”
“한 마디로 영혼 간의 계약이다. 둘 중 한 명이 속박을 어기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절대적인 계약이지.”
“……그런 걸 나와 맺어서 무슨 짓을 벌이려고.”
유지는 스쿠나를 경계했다.
이타도리 유지에게 스쿠나에 대한 친밀도는, 당연하게도 0이었다.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사람을 구하고자 주력이라는 힘을 얻기 위해 매우 강한 저주를 품은 주물을 삼키니 갑자기 제 몸을 차지했던 불청객 혹은 침입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유지의 경계 가득한 시선에 스쿠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올곧은 호박색 눈동자는 늘 불쾌했다. 그것은 쉽게 꺾이지 않는 백절불요의 상징과도 같아서, 천 년 전에 질릴 만큼 엮인 눈동자를 보면서 불쾌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스쿠나는 그 불쾌함을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이미 티를 내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척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이어서 말했다.
“속박의 조건은 세 가지. 첫째, 내가 『계활(契闊)』이라고 말하면 몸의 주도권은 내가 갖는다.”
“뭐? 그건 너무―”
“말 자르지 마라. 둘째, 몸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동안 네놈이 적대하거나 네놈을 적대하는 녀석을 제외한 누구도 해치지 않겠다.”
“에?”
“마지막 셋째, 네놈은 이 계약을 기억하지 못한다.”
조건은 이게 전부다, 그렇게 말하며 스쿠나는 일방적으로 말을 끝냈다. 스쿠나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들을 들은 유지는 당연하게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본인에게 불리한 조건이 섞인 내용으로 자신과 속박이란 걸 맺으려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걸로 괜찮은 거야? 유지의 반문은 당연한 절차였다.
“무얼. 네놈에게 한없이 유리한 조건이잖느냐.”
“세 번째 조건이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로 나한테 불리한 조건 아냐!?”
“허……, 그 부분인 게냐. 어차피 두 번째 조건 때문에 나는 아무나 내가 원하는 대로 죽일 수 없다.”
“그, 건 다행스런 일이긴 한데……”
“그리고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네놈은 이 속박을 잊어야 한다.”
“그건 어째서야? 아니, 그전에 그런 걸 맺을 정도로 나한테 의미가 있어?”
유지의 순수한 물음에 스쿠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속박이고 뭐고 전부 때려 치우고 머리를 반으로 갈라 시야에서 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눈앞에 그려지는 과거가, 그 미소가 스쿠나의 충동을 억제했다. 스쿠나는, 이가 갈리긴 했지만, 이번에도 최대한 참았다.
“거기까지, 는 네놈이 알 바가 아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뭐야 그게……”
“그래서 맺을 거냐 말 거냐.”
스쿠나의 재촉에 유지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조건들이었다.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유지가 생각해도 스쿠나에게 이득을 주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조건은 확실히 첫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을 덮을만큼 스쿠나에게 불리했다. 스쿠나가 몸의 주도권을 차지해도 유지가 적대하지 않는 한 스쿠나는 그 누구도 해칠 수 없다. 그런 상황이 되어도 몸을 차지할 메리트가 있는지 지금의 유지로썬 알 수가 없었다. 유지는 슬쩍 한쪽 눈을 떠서 스쿠나를 살폈다. 스쿠나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유지를 보고 있었다. 눈이 다시 감겼다. 이제 막 비현실에 발을 들인 유지로썬 스쿠나의 목적을 유추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다.
의식 아래 잠긴 상태임에도 들렸던 잔잔한 고백을 들었다.
“…좋아. 맺을게, 속박.”
그런 걸 들어버린 이상, 유지는 스쿠나를 마냥 경계할 수도 없었다. 제 마음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지는, 잘못된 대답일 수도 있는, 긍정을 답했다. 훗날 미래의 자신이 현재의 선택을 한 자신을 원망하게 될 지라도, 같은 순간이 온다면, 자신은 분명 같은 선택을 하리라 생각하며.
케힛, 하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며 웃는 얼굴을 보니 유지는 자신이 옳게 선택한 것이 맞는지 잠시 의구심을 가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첫 번째 목적을 이룬 스쿠나는 검지와 중지를 세웠다.
“속박은 맺어졌다.”
이제 꺼져.
그 말과 함께 손가락을 휘두르자, 유지의 얼굴이 정확히 절반이 잘렸다. 유지는 외마디의 비명 하나 지르지도 못한 채 의식이 끊겼다. 털썩, 유지의 몸이 쓰러진다. 스쿠나는 그것을 보고도 감흥 하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 자신의 왕좌에 다시 앉았다. 적막이 생득영역에 맴돈다. 소란스러움이 단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었음을 알기에 스쿠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송이는 이래서 귀찮았다.
"헉!"
눈이 번쩍 뜨였다. 반동으로 숙였던 고개가 들렸다. 왠지 모르게 한 번 겪었던 상황인 것 같아서 유지는 누군가를 찾듯이 주변을 살폈다. 어두운 내부를 밝히는 등불의 빛과 열기가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주변을 살피는 것을 멈추고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뜨면 익숙한 실루엣이 앞에 보였다. 위로 솟구친 백발에 검은 안대를 쓴 장신의 남자, 고죠 사토루였다. 그는 낡은 나무의자에 앉아 유지를 바라보며 가벼운 인사를 건냈다. 유지가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고죠는 미소를 지은채 한 가지를 물었다.
"지금의 너는 어느 쪽 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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