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 ss

요양자

療養者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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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귤 다섯 개가 든 그물망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망설임 없이 4층 버튼을 누르는 동행인을 확인한다. 두 사람 외에 탑승객은 없었다. 천천히 닫히는 강철 문 두 짝을 바라보다가, 도진은 무심코 두 손으로 든 그물망을 주물댔다.

"귤 물러요."

후드티 위에 패딩을 걸친 동행인이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하기에 도진은 움직임을 멈췄다. 아무래도 거울에 비친 모습을 훔쳐 본 모양이다. 당황한 티를 숨기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현은 작은 한숨을 툭 뱉고는 고개를 돌린다.

"어차피 내일모레 안에 퇴원하신다고 했던가?"

도진이 대답을 고민하던 사이 문이 열렸다. 한적한 병동의 로비. 오후 두 시를 가리키는 커다란 시계. 무심코 오늘의 날짜를 떠올린다. 12월 12일. 그러니까, 월요일. 월요일 대낮부터 병문안을 오는 사람은 역시 얼마 없는가 보다.

두 사람은 미리 머릿속에 입력해 둔 호수의 병실을 찾아 로비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음, 그랬던 거 같은데. 그... 편집자 분이."

"그렇죠?"

"응..."

"호재라고 생각하고 있을 걸요."

"호재?"

"적당한 규모의 스트리머가 행방불명. 알고 보니 사고로 2주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쪽 복도가 아닌 것 같다. 찾고 있는 호수와는 대략 이십 번이나 떨어진 숫자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다. 먼저 발걸음을 돌려버린 건 현, 어리버리한 얼굴로 뒤따르는 사람은 도진. 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잇는다.

"이거 진짜 좋은 떡밥이거든요."

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귤을 소중하게 안고 있으니 겨우 설명이 뒤따랐다.

"인터넷에서,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화제라는 거예요."

도진은 인터넷을 그다지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불특정다수의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어디에나 열려있다는 사실은 공포스러우니까. 물론, 작가로서, 자신의 책에 대한 불특정다수의 감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기야 할 것이었다.

"구독자 수가 얼마나 늘려나...... 와, 좀 부러운데."

그 자신이 운영하는 서점의 할로윈 디스플레이 사진을 찍던 현의 모습을 기억해낸다. 어려운 이름의 sns에 올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아요 수가 어떻고 팔로워 수가 어떻고 하는 설명을 언제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도진이다. 솔직히 sns라는 명칭도 아직 익숙하지 않다. 

도진은 애매하게 미소나 지어보이다가, 줄지어 선 문에 달린 팻말을 확인했다. 호수와 가까운 숫자들이 쓰여 있다. 복도를 나아갈수록 더욱이 가까워진다. 앞으로 남은 문의 개수를 헤아려 보니, 복도 맨 끝 방이 목적지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의 문이 열렸다. 사람이 한 명 튀어나왔다.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반대편은 벽으로 막혀있으니 당연한 행동이긴 하다.

모르는 남자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뜬 눈. 이마를 드러낸 헤어스타일. 기름한 몸에 잘 어울리는 셔츠와 코트.

확실한 생면부지의 타인이다. 적어도, 도진이 사는 아파트에 틈만 나면 방문하는 와인색 제네시스의 소유주는 아니다. 그 훤칠한 남자는 스트리머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 기름한 남자는 아무리 보아도 서른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으니까.

두 사람은 은근히 청년을 흘끔였다. 청년이 이쪽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은근한 미소를 지은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을 리는 없으니 웃음의 까닭은 다른 곳에 있을 텐데. 그런 고민을 하다가, 도진은 목적한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병상에 누운 백도화는 조금 놀란 얼굴로 병문안객들을 맞이했다.

백도화는 한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처음 깨달은 건 도화의 집 한 층 아래에 사는 영상 편집자 강성훈이었다. 스트리머와 편집자 사이인 두 사람은 서면 상은 물론이요 물리적으로도 서로의 집을 오가며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데, 어느 날부터 그러한 교류가 뚝 끊겼다. 당황한 성훈이 그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해 보았지만 전파 너머로 들려오는 것이라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건조한 인공 음성 뿐이었다.

성훈은 우선 친한 동생으로서 당황했다. 이 형이 연락도 없이 잠적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영상 편집자로서 염려했다. 당장 내일 새 영상이 올라갈 예정이었다. 오늘 저녁까지 도화에게 컨펌을 받고, 고칠 부분을 고쳐 수정본을 전달해야만 했다. 도화는 깔끔한 편집을 좋아한다. 다양한 MAD를 만들다가 영상 편집자로 전향한 성훈의 성향과는 약간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 컨펌이 필수적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좀 도화의 니즈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돌아오는 컨펌을 보면 역시 자신만의 착각인 듯했다.

도화가 잠적한 지 사흘 째가 되던 날, 성훈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 커뮤니티에 글을 남겼다. 사실 그때부터 도화의 커뮤니티는 온갖 독촉과 비난으로 혼잡했다. 성훈은 당연하게도 도화의 계정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채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훈의 채널은 이미 백도화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팬덤 내에서는 적당히 유명세가 있었다.

글의 내용은, 11월 25일부터 도화 형이랑 연락이 되지 않는다. 집에도 가 봤지만 없는 거 같다. 어디 나갔다가 사고라도 당한 게 아닌가 걱정된다. 도화 형이 연락도 없이 잠수 탈 사람은 아니니 더 걱정된다. 다들 조금만 기다려 달라. 댓글은 일찍이 막아두었다. 성훈의 채널에 댓글을 남길 수 없게 되자, 백청자들은 다시 도화의 채널로 몰려가 계정주의 행방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그 글을 현이 보았다. 

백도화라는 스트리머가 있다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던 그지만, 도화가 같은 동네에 이사온 것을 계기로 구독까지 해 두었던 참이었다. 이제는 도화의 방송 사이클도, 영상 업로드 주기도 파악했다. 동네 서점 주인이라는 건 의외로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은 직업이다. 유튜브 채널을 하나 잡고 파고들기엔 너무나 안성맞춤인 처지다.

슬슬 백도화 씨가 새 영상을 올리겠거니 싶었다. 최근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FPS의 후속작 같지 않은 후속작을 열심히 플레이하고 있지 않았나. 생방송까지는 챙겨보지 않지만 편집본이라면 10초 씩 뒤로 넘겨가며 보던 현이었다. 오늘은 또 어떤 캐릭터로 플레이할까 은근한 기대를 품으며 알림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자정이 넘어갈 때까지 새 알림은 뜨지 않았다.

하루 정도는 까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 날까지 새 영상은 올라오지 않았다. 이변을 느낀 현이 도화의 커뮤니티에 들어가 봤지만, 공지는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미공지 휴방에 화가 난 시청자들 뿐이었다.

"백도화 씨, 무슨 일 있어요?"

서점 모퉁이석에 걸터앉은 도진에게 유튜브 커뮤니티 창을 들이밀며 물었다. 오늘은 작업이라도 하고 있는지 글자로 가득한 한글 파일을 열어둔 채다.

"어, 아니...... 여행 가신 거 아니었어?"

"여행?"

"며칠 째 불이 안 켜져 있거든...... 도화 씨 집."

도진은 도화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날이 밝으면 서점으로 출근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기묘한 작가이기도 하다. 

미지근했던 11월도 이제는 막바지. 완연한 겨울에 들어선 세상이란 태양을 이르게도 물려버리지 않나. 요즈음 그는 거리에 늘어선 가로등이 켜질 때가 되어서야 서점을 나섰다. 그러니 아파트로 귀가하며 자연스레 오늘은 또 어느 집에 불이 켜져 있나, 를 확인하게 되는 것인데, 요 며칠 간 도화의 집에는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차장에도... 가 봤어. 차는 여전히 없던데... 그게, 음, 지난 주 목요일에 차 끌고 나가시는 걸 봤거든."

"예? 그걸 왜 지금 말하세요."

"안 물어 봤잖아..."

그래서, 현이 유튜브 댓글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는 그저 어디 여행이라도 간 줄 알았다고 한다.

현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휴대전화를 후드티의 주머니 안으로 꽂아넣었다.

그 날 저녁 도화의 편집자가 새 글을 하나 올렸다. 도화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내용이었다. 현은 그가 도화의 아랫집에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따지자면 그도 동네 이웃이다. 아파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적어 얼굴은 거의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현이 도진을 이끌고 그들의 아파트에 돌진한 건 다음 날 오후의 일이었다.

"도화 씨 집에 가겠다고? 가, 가서 뭘 하려고?"

"실종자 탐색엔 자택 수색만한 게 없죠."

"......집에 어떻게 들어가려고?"

"뭐, 어떻게든."

서점에서 한 동짜리 아파트로 이어지는 외길을 성큼성큼 전진한다. 도진은 어딘가 불안하다는 얼굴을 해선 현을 뒤따르고 만다. 서점 주인은 가끔 이런 스위치가 눌릴 때가 있다. 몇 년 전의 대학에서도 그러했고, 얼마 전의 잠실 추격전에서도 그러했고,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 사실을, 도진은 남몰래 되짚는다.

아파트 정문에 들어섰다. 누군가 1층 현관 앞을 비틀거리며 맴돌고 있다. 한 손에 들린 휴대전화는 액정이 켜진 채. 두 사람은 속도를 낮춰 그에게 접근한다.

"안녕하세요. 남편이시죠?"

현이 대뜸 내뱉었다.

도진은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상대를 바라본다.

성훈은 돌연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 소스라치듯 놀라 몇 걸음을 물러서다가, 꼴사나운 모습으로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나, 남편?"

도진의 필사적인 물음을 무시한 채 현은 그에게로 몇 걸음을 다가선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선, 주저앉은 '남편'의 얼굴을 뜯어본다.

성훈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입을 반 쯤 벌리고나 있다.

침묵.

희미한 코웃음.

비어나오는 신음.

"백도화 씨, 어디 가셨어요?"

"누, 누, 누, 누구...... 세요?"

"동네 이웃, 그리고 아마 백청자."

주저앉을 때의 충격으로 떨어져나간 휴대전화를 주워든다. 액정은 아직 켜져 있다. 현은 자연스럽게 통화 목록을 뒤지기 시작한다. 성훈은 기겁하는 목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다가, 허리 부근을 감싸며 도로 엉덩방아를 찧고야 만다.

"도화 형...... 발신, 발신, 발신. 도화 씨한테서 전화가 온 적은 없음. 최근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었네. 오후 2시 48분? 최근이라기보단 직전이네?"

도진은 달관한 얼굴로 돌아가는 상황을 살핀다. 자신에게 현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은 없음을 되새기고 나서, 분한 눈으로 허리를 매만지고나 있는 성훈에게 손을 뻗었다. 가여운 편집자는 그의 눈치를 잠시 보더니 손을 잡고 일어섰다.

"주, 주세요, 폰."

"무슨 전화였어요?"

"도, 도화 형이 입원했다고요!"

"입원?"

현의 눈썹이 묘한 각도로 기울어진다.

"누, 누군지 모르겠는데. 전화가 와서, 백도화는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맞장구를 치지는 않는다. 그저, 계속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할 뿐.

"......어, 어디 병원인지도 알려줬고, 병동, 호, 호수도 알려줬어요. 근데, 그, 역시, 모르는 사람이라서, 장난 전화 같기도 하고, 무, 무섭고, 그래서."

"배회하면서 고민 중이었다."

성훈에게 휴대전화를 건네며, 간단한 대답을 할 틈도 하나 주지 않고 현은 물었다.

"어디예요? 제가 대신 가 볼게요."

그리고, 정말로 그곳에는 백도화가 있었다.

손님이 왔는데도 눈 한 번 뜨지 않고 가만히 누워만 있다.

현과 도진은 이웃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근처 간호사들에게 사정을 묻는 건 현의 일이었다. 친한 친구라고 열심히 둘러대니 대강의 사정은 이야기해 주었다. 청계천에서의 화재 사고에 휘말려 사람들을 구하다가, 유독가스를 너무 많이 마셔 혼수상태에 이르게 됐단다.

"별 일이 다 있네요."

가 현의 감상이었다.

"누가 전화한 걸까..."

"번호라면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는 사람한테 대충 조사해달라고 하려고요."

도진은 대답은 않고 눈썹을 팔자로 만들기나 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성훈에게 꾸준히 연락했다. 

도화가 입원한 병원은 서울 소재이니, 경기 남부에 위치한 성훈의 자택과는 거리가 좀 있다. 마음만 먹으면 매일 같이 가지 못할 거리는 또 아니지만, 성훈은 아무래도 창백하게 식은 형의 얼굴을 보는 게 두려운 모양이었다.

"아, 아는, 아는 분이 그 근처에 사셔서, 자주 가 보겠다고 하셔서."

현은 당연하게도 그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도화 형 친구 분이요......"

"혹시 제네시스 몰아요?"

"에? 어, 어,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죠."

도진은 스피커폰 너머로 성훈의 음성을 듣다가, 어쩐지 그가 가엾다는 생각마저 하고 만다.

"이제 병원에는 못 가겠네."

통화를 끊은 현이 느긋하게 중얼댔다.

"절대안정이니까......"

도진이 시무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화의 친구이자 서울에 거주하는 제네시스의 소유주는, 김기철이라는 남자다. 

도화가 미심쩍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 현은 틈만 나면 아파트를 오가는 와인색 제네시스에 눈독을 들였다. 심증만을 차근차근 쌓아가던 어느 날 밤 아파트를 나서는 제네시스를 보고, 현은 무작정 그를 미행했다. 근처에 서 있던 도진은 운 나쁘게도 휘말려 졸지에 서울 밤나들이를 하는 신세가 되었었다.

와인색 제네시스가 잠실의 한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두 사람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 후 현이 어떤 조사를 했는지는 영 모르겠으나

"저 보고 조사할 거면 좀 제대로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확실해졌어요. 그 둘, 심부름센터 사람이에요."

맥락도 없이 뱉은 말의 맥락을 살피는 것으로 도진은 그가 잠실의 아파트 단지에 잠입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 후, 기철은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서점에 나타났다. 새카만 선글라스에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와이셔츠에 올블랙 정장을 걸친 꼴이란. 영화에 심심하면 등장하는 조폭의 똘마니 같은 착장이었다.

"우리 할 말이 있지 않나?"

험악한 말을 뱉으며 들어오기에 도진은 급하게 자리를 옮기려 들었지만, 기철의 시선에 가로막혀 몸이 굳고야 말았다.

살기 어린 말이 오가는 서점.

들어오려던 손님은 폭력의 아우라를 풍기는 남자를 보고 몸을 물린다.

이러다간 손님 유치가 제로에 달하겠다는 결론을 내린 서점 사장은, 슬쩍 한 발을 빼는 듯 싶었다. 양 손을 올리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좀 심심했을 뿐이에요. 왜, 스트리머도 조사일 하는데. 나는 하면 안 되나?"

그러나 도진이 생각하기에 이건 한 발을 앞으로 내민 것 같았다.

고성, 욕설, 위협.

그런 나날이 일주일 정도 이어졌다. 덕분에 서점의 한 달 매상은 근 3년 간의 최저치를 찍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서야 들었다.

"곤란하네. 하필이면 그 사람이 병문안을 다니고."

"친한 사람인 것 같으니까......"

"아... 나중에라도 마주치기 껄끄러운데."

껄끄러운 일을 부러 만든 건 네가 아닌가...... 라고 아주 잠시나마 생각한 도진이었다.

솔직히 그간의 소동이 재미있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해진다는 걸, 도진 자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몸이야, 근육이 좀 빠진 거 빼곤 멀쩡한 거 같애."

도화가 갸름한 뺨을 움직이며 웃었다.

"머리에 이상 있으신 거 아니에요? 뇌 CT라도 한 번 찍어보시죠."

말을 마친 현이 도진에게 눈짓했다. 귤을 건네라는 신호였다. 도진은 양 손으로 들고 있던 망을 병상의 도화에게 건넨다.

"이거 먹어도 되나? 실은, 아까도 미음인지 죽인지 모를 걸 먹었어요. 간이 안 느껴지더라."

2주 동안이나 소화를 하지 않고 누워있었으니 지금은 가벼운 보식을 하는 중이리라.

"CT? 일어났으니 어쨌든 괜찮은 거겠지."

귤 여섯 알이 줄 서 있는 망의 매듭을 푼다. 가장 앞의 녀석을 꺼내선 껍질을 죽죽 벗겨낸다. 새콤한 향이 즉시 병실 안에 퍼진다.

"유명하신 분이라 그런가 손님들이 많네요."

속살을 드러낸 귤의 반을 뚝 잘라 도진에게 건네다가, 도화는 어딘가 기이하다는 얼굴로 입가를 비틀었다.

"손님?"

"방금 어떤 분 다녀가시지 않았어요? 키 큰 남자."

"아, 그렇지......"

"인기인이셔요."

현은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싱글댔다. 도화는 그에게 대답은 않고, 반쪽 난 귤을 또 다시 반으로 갈라 입 안에 던져넣기나 하다가.

별안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맞아, 여기 일 층에 편의점 있거든? 담배 한 갑만 사다줘요."

"다, 담배?"

환자시잖아요, 라는 뒷말이 당혹감에 묻힌 것처럼 보였다.

"아니. 사고가 났었잖아, 내가. 뭐 잃어버린 거 없나 싶어서 코트 주머니를 뒤졌거든. 차 키도 있고 지갑도 있는데 글쎄 담배만 없어졌어."

도화는 병상 옆 탁상에 놓아두었던 지갑에서 제 카드를 꺼낸다. 탁상 위에 있는 것은, 지갑, 차 키, 스마트폰, 그리고 귤 다섯 개가 나란히 선 새빨간 망.

"담배 심부름은 담배 피우는 사람한테 맡겨야지. 내 거 알죠? 던힐 육미리. 한 갑만. 오케이?"

"우리 할 얘기가 좀 있는 거 같지 않아?"

병실 너머의 발소리가 잦아들었다. 무심히 문가를 바라보던 현은 병상으로 시선을 돌린다. 웃음기가 사라진 도화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도화 씨가 알려주셨죠? 제 신상."

"그래."

현은 의식적으로 허리를 곧게 편다. 등받이 없는 간이 의자가 끼익, 하고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눈앞의 환자는 아무래도 모드를 바꾼 것 같았다. 곡선 하나 없는 표정은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보던 모습과 전혀 다르다. 도화는 치렁치렁한 앞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고 나서야 입을 뗐다.

"내 친구가 궁금했으면 얘길 하지. 지하주차장까지 따라 들어가서 차 번호는 왜 찍어?"

"신비주의시잖아요. 제가 여쭤봤으면, 알려주실 거였어요?"

콧잔등을 덮고 있던 네모난 뿔테 안경을 벗었다. 두꺼운 테로 가려지지 않은 맨눈은 그 전에 비하여 훨씬 사나워 뵌다. 렌즈의 굴절 상태로 보아, 안경의 도수는 그리 높지 않을 것이었다. 현은 그런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챈다.

"뒷조사를 하고 싶었으면 티 안 나게 했어야지."

희번득하게 뜬 눈은 환자 복장으로 얻어지는 방심을 압도하는 효과가 있었다.

새카만 눈.

낮게 깐 목소리.

일렁이는 기염氣焰.

저 수정체 너머의 살벌한 불꽃은 대체 무엇을 연료로 타오른단 말인가.

무서운 기백이다.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범인凡人의 탈을 뒤집어 쓴 인간이다.

현은 시선을 피하는 대신 눈꺼풀을 조금 내리기나 했다.

"그 때 그 사람이 주차장으로 내려온 건 예상 밖의 일이었어요."

"차에 두고 온 게 있어서 가지러 갔다가, 자기 차 번호를 찍고 있는 별 미친 놈 하나를 봤다, 라고 하던데."

"예, 뭐. 잠실 아파트가 좋긴 좋더라고요. 주차장 문 열리는 소리 하나 안 나더라. 경첩 관리도 하나?"

그 후, 그대로 멱살을 잡혔다. 누가 보낸 새끼냐며 욕을 얻어먹었다. 현은 자신은 말단 똘마니라 아는 게 없다고 둘러댔지만, 갑작스레 코앞에 들이밀린 스마트폰의 렌즈는 차마 피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대뜸 당신 사진을 보내길래 놀랐어."

"이런 조사원 본 적 없냐고 물어보시던가요?"

도화는 대답을 않았다.

"젊었을 때 이런 짓 좀 해 봤나 봐?"

대신 비아냥대는 말을 뱉기나 했다.

"전 아직도 젊다고 생각해요."

"말 돌리기도 정도가 있어야지......"

"오동현은 잘 있죠?"

대화가 멎었다.

현은 잠시 도화의 표정을 살핀다.

얼굴 근육의 변화는 없다.

새카만 눈동자가 상대의 낯짝을 훑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당신......"

비틀린 입가에서 물음이 새어나오기도 전에, 병실의 문이 눈치 없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던힐을 들고 귀환한 도진에게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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