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데카메론
리버스1999 파비아 NCP 드림
*Warning: 사망 소재, 폭력성, 범죄, 부적절한 언어
*pc기준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적폐 날조 개인해석만 99%
@mint_ack cm
우리 일이야 항상 그랬어. 이번 의뢰에서 총을 맞대도 다음 의뢰에서는 등을 맞대야 할 수도 있는 거고.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 두면서도 나만큼은 그와 상관없는 사람인 마냥 살고.
과연 불행이라 불릴까? 흔하디흔한 희극으로 취급될지도.
또는......
레디메이드 데카메론
The Ready-made Decameron
/
자, 여기 두 사람이 있었다고 해봅시다.
어둠 속에 살다가 저마저도 어둠에 물들어버려 증오하는 것이 어둠인지 어둠을 닮은 무엇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인지도 모르는 채로 유년을 지내, 여전히 아는 것이라곤 공포와 고통과 외로움뿐이지만, 그럼에도 오늘을 살기 위해 몸을 일으켜 그림자를 늘어뜨린 채로 달을 등지고 아침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있고, 새벽녘의 첫 햇살을 받으며 아침을 맞이했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길어지는 그림자를 피해 도망쳐, 그것이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밤에 안주한 채로 달빛만을 좇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고요.
한 공간에 살면서도 결코 같은 시간을 살 수가 없어 잘못된 태엽을 맞물린 듯 삐걱거리면서도 어쩌다 한 번씩 눈과 눈이 마주치고 어깨가 닿을 때면 문득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다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내일이 오기도 전에 잊힐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것 정도일지라도, 그것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도 된다는 듯 그저 그런대로 만족한다며 웃어 보이고는 지난날들의 쓰디쓴 진심은 삼켜버린다면,
그 진심들은 창자 안에서 썩어 문드러지지 않았겠습니까?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무언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요?
/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너지?"
앞길을 막아선 인영에 파비아는 등 뒤로 칼을 빼들었다. 어림잡아 6피트쯤 되어 보이는 키에 소매가 헤진 군복을 입은 여자. 안면이 있는 것을 보아하니 비슷한 시기에 함께 고용된 또 다른 업자 정도이려나. 아마 주머니에 굴러다니는 이 넥타이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임이 틀림없었다.
"덕분에 잔금을 못 받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여자는 웃고 있었다. 받지 못한 돈에 대한 앙갚음? 또는 의뢰 실패로 인한 커리어의 흠집을 만회하기 위해? 이유가 무엇이든 여기서 피를 보긴 하겠다-라는 생각으로 칼을 고쳐 쥐던 파비아는 김이 팍 식는 기분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배알도 없는지, 아니면 돈 따위는 신경 쓸 거리도 아니라는 건지, 되려 시가를 꺼내 권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개 청부업자가 쓰기에는 꽤나 고급인, 이태리 장인의 것으로 보이는. 당최 알 수 없는 의중은 뒤로 한 채로,
"집어치우고, 뭐 하자는 건데?"
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민망함이란. 여자는 눈을 굴리고는 천천히 시가 커터를 꺼내 시가를 자르고 입에 물었다. 파비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곤 팔짱을 끼며 벽에 기대 그 행위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느리게(조금만 더 늦었어도 파비아는 참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천천히 뱉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아는 만큼 너도 날 알 테니 통성명은 됐고, 우리 친구가 벌인 짓에 대해서는... 결론만 말하자면, 유감은 없어. 꽤나 짜증 나는 놈이라는 건 다들 알 테니까. 인종차별, 아니면 의뢰비 가지고 장난이라도 쳤나? 아무튼, 네 의도도 딱히 알 바는 아니지. 그냥... 뭐랄까."
주황빛 네온사인이 골목길을 쪼아댔고, 시가 연기도 비슷한 빛으로 퍼지며 시야를 가려 그녀의 표정은 특정할 수 없었으나,
"그냥, 재미있는 놈 같았다고. 인사나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연기가 메케하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
그 길로 저녁식사를 하러 가서 와인을 마셨는지, 펍을 가서 위스키를 한잔했는지, 또는 그냥 길거리에서 취할 만한 것이라면 아무거나 집어 들었는지, 그것들은 두 사람마저도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매번 바뀌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녀는 자신을 리치라고 소개했으며, 그것마저도 본명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고, 파비아가 아는 것이라곤 그녀 또한 까다롭기로 정평 난 청부업자라는 정도였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잔을 부딪치기에 적당한 날이었고, 무엇이든 새로운 시작을 하는 데에 적당한 취기였다. 이를테면,
"그나저나, 지낼 곳은 있어? 개 한 마리 들일 여유는 있는데 말이야. 네가 필요하다면."
이런 것이라던가.
고용주를 죽인 몸이니 당분간 몸을 사려야 할 터였다. 돈만 주면 뭐든 해주는 개새끼를 원하는 머저리들은 많으니 그마저도 길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취한 머리로는 평소의 사고방식이 통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파비아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수락할 이유도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리고 그것은 리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룸메이트를 들일 이유는 없어도, 구태여 들이지 않을 이유를 찾지 않았다.
동거에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 절대로 적당한 양을 맞출 수 없는 파스타를 함께 해치워줄 사람이 필요했다거나, 전등을 갈 때 사다리를 잡고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정도의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두 사람 모두 일을 구하기 시작할 때쯤이면 집에 붙어있는 날이 더 적었고, 그렇지 않아도 서로에게 참견하는 일은 손에 꼽았다. 시간이 허락해 준다면 저녁이나 아침 식사를 함께 나가서 해결하기도 했다. 스카치를 따르며 지나간 날들을 그리워하거나 원망하는-둘은 대게 같은 말이었지만- 말들을 나누거나, 주워온 소파에 비슷한 자세로 자리를 차지하곤 허공에 시선을 주며 침묵을 나누었다.
크게 달라진 일이라곤 없었다. 장바구니에 젤라또가 두어 개씩 담기고, 집에 오는 길이면 유명 가수의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집어 오는 그런 사소한, 그런 것들만이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얄팍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그리고 단지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생활이었다.
/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그래, 걔, 그 여자 말이지, 의뢰를 잘 안 받았던 건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게을러서였더군. 돈이 떨어질 때까지 움직이질 않더라니까. 그러면서 시가는 꼭 고급 진걸 쓰지. 전기세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내가 종종 밤새 불을 켜놓고 있어도 못 본 척했고, 부엌 서랍을 열 때마다 우표까지 붙여놓고선 주소란을 새카맣게 칠해버려 보내지도 못할 편지들이 하나씩 늘어나도 입을 다물었어.
그러니, 젠장, 우리의 일상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고. 그런 무심함을 배려랍시고 베풀고 있었지.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되묻지 않았고,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연락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변명 거리야 많았으니까. 우리 일이야 항상 그랬다면서. 이번 의뢰에서 총을 맞대도 다음 의뢰에서는 등을 맞댈 수 있는 직업 아니야? 언제 어디서 죽어도 이상할 것 없지만 오늘은 아닐 거라고 믿고 살아. 걔가 그렇게 말했고 나 또한 그렇게 믿었으니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야. 이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그래, 그날은 좀 달랐다고 해야 하나, 나는 그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착각했지 뭐야. 내가 벌이고 있는 기행들에 대해 언젠가 설명해 주기를. 나야 내 이야기를 다른 놈들한테도 많이 지껄이고 다녔지. 특히 곧 뒤질 놈들한테는. 그럴 때마다 내 얘기를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가졌냐고? 전혀! 그놈들도 내 어두운 유년 시절을 맛볼 권리가 있으니까. 발밑에서 빌빌거리며 내 얘기를 듣고있는 놈들이 동정이나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린다면- 빵! 대가리가 터지는 거지. 뭐, 대부분 무서워서겠지만 내가 그걸 어떻게 구별하겠어?
아무튼, 타이밍이 좋지 않았어. 마침 집에 술이 다 떨어진 날이었고, 마실 거라곤 누가 사놓은지도 모를 미지근한 코코넛 주스가 전부였어. 맛이 최악이었지. 저녁이었는데도 방 안이 후덥지근했어. 버터 나이프로 접시에 눌어붙은 치즈를 떼어내다가 신경질이 났었고. 그런데도 걘 평소랑 별로 다른게 없더군. 나는, 아마, 약간 긴장했을지도 모르겠네. 아니면 그 여자가 그렇게 생각했거나.
/
"달의 뒤편은 너와 닮았을까."
그 비슷한 말로 시작했을 것이다. 약간은 다를 수 있지만 저런 류의 말이었음은 분명했다. 평소에는 하지 않았을 감성적인 말이었거니와 파비아가 꺼냈던 그 어떤 말과도 어귀가 맞지 않아 어색한 정적은 덤이었다.
"여길 벗어나지 않는 한, 평생 그 뒤편은 알 수 없겠지. 우리는 겉보기에 비슷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 보이는 대로만 믿으며 살아가게 되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이 궤도를 벗어나면서까지 네 이면을 알고 싶다? 그건 아니라는 거야. 일부러 회피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파비아, 네가 나와 어떠한 특별한 관계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 책임감을 느낀다면, 아주 약간의 부담이라든지 불편함이 느껴져 하기 싫은 말을 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걸 가만두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파비아는 그 말의 의미를 찾아 행간을 헤맸고, 곧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을 느꼈으며, 소파 등받이에 기대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 눈만 느리게 깜박이고 있는 그녀를 보며 한참을 구시렁거리다가, 제 자신이 답답해 화를 내려고 할 때쯤에야 의미를 알 것도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관계를 재정립하거나 동거를 그만두자는 말은 아니었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고루한 말을 믿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사는 데에 섹스가 필수적인 것도 아니거니와 그런 관계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해보지 않았던 그였기에,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이 기묘한 동거가 편하다고 생각한 그였기에 답지 않으리만큼 허둥대면서도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옳아, 어떤 정신 나간 작자들에게 한소리 들었나 본데 말이야-. 나도 '에로티카'는 사양이니까. 쯧, 나도 크게 마음을 두고 얘기를 꺼낸 건 아니라고, 이 빌어먹을 여자야. 아니 잠깐, 그러니까, 네 말은. 아무 사이로도 불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잖아? 친구마저도?"
"응, 친구마저도."
"허, 세상 참 불편하게 산다니까, 멍청하게."
그저 편하기 때문에 이 무엇도 될 수 없는 관계를 방치한다고? 파비아는 이상한 예감으로 속이 뒤틀릴 때마다 언젠가 리치가 사다가 채워놓은 젤라또를 퍼먹으며 그 생각을 의도적으로 지웠다. 아무 문제 없으리라 믿으며.
/
자, 그러니까, 다시.
여기 두 사람이 있었다고 해봅시다. 어둠 속에 살다가 저마저도 어둠에 물들어버려 증오하는 것이 어둠인지 어둠을 닮은 무엇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인지도 모르는 채로 유년을 지내, 여전히 아는 것이라곤 공포와 고통과 외로움뿐이지만, 그럼에도 오늘을 살기 위해 몸을 일으켜 그림자를 늘어뜨린 채로 달을 등지고 아침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있고, 새벽녘의 첫 햇살을 받으며 아침을 맞이했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길어지는 그림자를 피해 도망쳐, 그것이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밤에 안주한 채로 달빛만을 좇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고요.
한 공간에 살면서도 결코 같은 시간을 살 수가 없어 잘못된 태엽을 맞물린 듯 삐걱거리면서도 어쩌다 한 번씩 눈과 눈이 마주치고 어깨가 닿을 때면 문득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다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내일이 오기도 전에 잊힐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것 정도일지라도, 그저 웃어 보이고는 지난날들의 쓰디쓴 진심은 삼켜버린다지요. 쓰인 역사만큼이나 관계를 정의하는 말이 있다지만 두 사람은 이 메슥거리고 어지러운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로-또는, 의도적으로 방치한 채로?- 그저 끝이 오지 않기를, 이 새벽이 영원하기를 바라고만 있는다면,
새벽이 끝나고 비로소 새로운 해가 뜬 순간에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
일상은 낭만적이고 게걸스럽게 눈에 보이지만 투명한 방식으로 깨지기 마련이다. 두 사람은 여전히 잘 지냈다. 연기에 재능이라도 있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인지. 다만 모든 일이 그들의 시야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어떤 여자가 찾아왔어. 남자 정장을 입었던데, 모자까지 쓰고서."
"의뢰겠군. 이번에도 오래 걸릴까?"
"아니? 미친 작자였지. 뭐냐, '폭풍우'가 올 거라는데?"
리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았다. 폭풍우? 올 수 있지. 그럴 계절도 날씨도 아니지만. 재난을 경고하러 온 예언가라면 어설프고 종말을 숭배하는 선지자라면 우스운 이야기이다. 평소라면 웃어넘겼을 얘기였지만 오늘따라 리치는 그 전말을 캐묻듯 했다.
"그래서, 그 여자가 뭐래?"
"됐어, 잊어버려. 함께 무슨 비밀을 파헤치고 무얼 막고 하자는데- 이미 거절했거든."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한데? 말해봐, 어떤 황당한 얘기를 했길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죽을 거라나 뭐라나. 마도학자는 살 방법이 있으니 따라오라고. 그러면서 무슨 증후군? 얘기를 하던데-"
말은 끝맺어지지 않은 채로 맴돌았다. 파비아가 알기로는, 리치는 벌써 며칠째 집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원체 귀찮음이 많은 사람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었으나 척수를 타고 올라오는 불안감이란. 역시 그 수상한 여자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
"야, 너, 혹시..."
어디 아프냐? 파비아는 말을 완성하지 못하고 삼켜버렸다.
"아니, 됐다, 누가 그딴 걸 믿는다고."
/
현관에서 짜증이 잔뜩 서려있는 소리가 난다. 오늘따라 파비아는 녹슬어 삐걱거리는 문고리를 견디지 못했고, 기어이 문 옆에 세워져 있던 우산들을 전부 넘어뜨려 버렸다. 욕을 읊조리며 엉거주춤 들어오던 파비아는 소파에 반쯤 누워있는 리치를 보고 놀란 듯 굳었다. 겸연쩍은 듯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보며 리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모자 쓴 아가씨가 또 온 모양이지?"
발밑에서 오래된 나무판자가 삐걱대는 소리.
"신경 꺼. 그 "영웅"님이 뭐라고 하든 내 알 바도 아니고. 내 인생이 여기서 더 악화될 수 있을 것 같아?"
발밑에서 오래된 나무판자가 삐걱대는 소리.
"네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그게 널 막을 명분은 되지 못해. 내가, 네가,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를 너도 알잖아? 등신 같은 짓 하지 마."
발밑에서 오래된 나무판자가 삐걱대는 소리.
"누가!"
그리고 굉음을 내며 나무판자가 산산조각이 난다. 파비아는 조각난 판자를 발로 걷어찼다.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바닥에서는 먼지가 일어나고 여자는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다.
"누가 등신 같은 짓을 한다고? 네가 말하는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이런 거였어? 제기랄, 네 인생관은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건데? 친구 사귀는 거? 그딴 건 지나가는 개미 새끼들도 해! 지금 당장 밟아 죽여도 모를 것들도 친구 놀음은 하는데, 고작 네가, 뭐가 특별하다고?"
"파비아, 내가 그렇게 아까워?"
"갑자기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정도껏 해.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내가 네 삶에서 중요해?"
"하... 글쎄."
"네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나에게 무언갈 해줄 마음이 있어?"
"... 그럴 리가."
"내가 널 아낄까? 당연하지.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할 수 있나? 물론. 이런 건 네게서든 내게서든 어떤 대답이 나와도 괜찮은 물음이지 않아? 괜찮지 않은 건 이런 것들이지. 내가 널 위해서 내 무언가를 포기할 수 있나? 파비아, 우리는 암묵적으로도, 그날 이후에는 명시적으로 약속한 게 있었지. 서로의 삶에 그 무엇도 되지 말자고. 사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잖아. 이런 순간이 올 거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잖아."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울분을 토하고 폭력을 휘둘러서라도 그녀의 말 중 어떤 부분이 틀렸다고, 납득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 그리고,"
그 웃음이다. 매번 머릿속을 뒤엉키게 만드는 짜증 나는 웃음.
"아프냐고는 물어봐도 돼, 멍청아. 그건 아무것도 아닌 룸메이트끼리도 할 수 있는 거야."
/
이 이야기는 예술은커녕 흔한 잡지에도 실리지 못할 이야기일 뿐이다. 라디오에나 한 번쯤 나올 수 있으려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그런 사연으로 넘겨버릴, 딱 그 정도의. 무수히 많은 불행들 중에서 결코 특별할 것 없는 아류작. 병의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여자는 그 병의 수많은 희생자 중 하나일 뿐이며, 주인공 이 상황을 털어버리고 일상으로, 또는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야 하는 인물이다. 주인공이 과거의 누군가를 잊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거나 미련에 발목이 붙잡힌 채로 다리를 질질 끌거나. 어느 쪽이든 뻔하디 뻔한 이야기라서, 잠깐의 여흥이 될 수 있을지마저 의심스럽지 않은가.
그날 이후에도 리치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 무슨 증후군의 증상이 어떤지, 치료법은 있는지, 현재 앓고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 따위는 모른다는 듯, 전부 나쁜 우연의 일치라는 듯 남겨진 사람들로 일상은 어영부영 굴러갔다. 파비아는 모자 쓴 여자의 의뢰를 받아들였고, 오는 길에 시가 한 통과 스카치 한 병을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리치는 여느 때처럼 반기며 잔 두 개를 꺼내 스카치를 따른 다음 시가를 입에 물었다. 파비아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온갖 욕을 섞으며 늘어놨고 리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거나 웃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은 나가서 먹을까?"
파비아는 그녀의 웃음을 진심으로 싫어했으며, 그마저도 언제나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
Memento Vivere
너는 살아야 할 운명임을 기억하라
리치는 다음 날 아침에도 밖을 나가지 못했다. 대신 파비아가 볼멘소리를 내며 집 냉장고를 뒤져 치즈 약간과 눅눅해진 크루아상, 살구 잼 등을 찾아냈다. 카푸치노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에스프레소를 내려 상을 차린 파비아는 리치를 부축해 식탁까지 옮겼다.
"내 고향은 피에몬테라고, 말했었나? 아마 네가 오늘 그 모자 쓴 여자를 따라간다면,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그 꼴로? 파비아는 리치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지만, 하나만은 확신했다. 지금 상태로는 그녀가 이 섬조차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파비아-,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사랑한다고? 그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단어인가? 영화를 본 적이 없어도, 독서에 취미가 없어도, 적어도 그 빌어먹을 예술들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안다. 비참하고 처절하고 더러우며 무거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말했던 사랑은. 그게 사랑이 맞긴 하던가?
차라리 그래, 내 손으로 죽여왔던 그것들처럼 울부짖거나 엎드려 빈다면 아무 미련 없이 죽여줄 수 있다니까-
그리고 또 파비아, 파비아. 거슬리게 이름은 왜 계속 부르는 건지. 어지러우니까 제발 좀 그만 말해.
"... 어둠이 네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을 때,"
말하지 마.
"그때가 되면 말이야,"
아니, 제발, 내게 어떤 말도 남기지 말라고.
"피에몬테에 한 번 와줄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다. 파비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리치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게 언제가 될지 두 사람 모두 진작에 눈치챈 것이 하나의 이유였고, 이 부탁을 약속으로 맺을 만큼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는 것 또한 이유였다.
리치는 그저 웃었고, 이번만큼은 파비아도 그 웃음을 싫어할 수 없었다.
/
그러나 거리로 나오면서는,
역시 싫다,
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fine.
+주저리
무릇 절정에 달한 환희의 이면에는 괴로움이 생겨나듯이, 비참 뒤에는 홀연히 즐거움이 찾아와서 경하스러운 결말을 맺는 법입니다.
보카치오, 데타메론
리치>파비아: 사랑? 글쎄요? 그런건 사람들이 만들어낸 어떠한 개념일 뿐인데 내 사랑과 네 사랑의 정의가 같다고 말할 수 있나?<-여기에 가까움
파비아>리치: 암튼 사랑은 아님. 근데 옆에 있던 사람이 지는 그냥 죽겠다면서 떠나라고 하면 짜증은 나겠죠
사랑 없는 건조한 서사를 쓰려고 했어요. 그치만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개연성이 허락되는건 어쩔 수 없는 유혹이라… 그래서 그 중간 어딘가의 사랑이 있을지도? 근데 없을지도? 하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폭풍우 증후군은 증상이 어떨지 모르겟고 날조도 하기 귀찮아서 그냥 얼버무렸어요 그러려니 해주세요
++23.06.06아니미친오랜만에읽었더니개못씀나중에고칠래
이건그냥귀여워서자랑
름청님 cm
- 카테고리
- #2차창작
- 페어
-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