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GOV] 흑기사

2020 인스턴트 조각글

 한때 흑기사였던 자는 성기사가 되었다. 새카만 어둠을 흘리는 입에선 음산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고 붉게 빛나는 안광은 공포스럽게 흩뿌려지곤 했다. 흑룡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제법 꾸민다면 그럴싸한 마왕정도는 될 법한 모양새다. 그런 그는 성기사가 되었다. 아, 성기사는 아니다. 원래 용사의 동료는 성기사였으니, 동료가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쨌든 구 흑기사 현 용사동료 흑기사(본인은 그걸 선호하는 것 같으니) 그 넓직한 품에 담았던 조그마한 온기를 기억하고 있었더랬다. 그보다 조금 더 큰 온기의 머리칼이 흔들릴때, 흑기사는 하얀 눈은 한 번 깜박였다. 푸르르디 푸르른 머리칼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제꼈다. 치르르르, 가슴부위의 팬이 돌아가며 허연 연기를 내뱉었다. 냉각장치가 가동하고 있었다. 핏-핏-핏 들려오는 경고음이 액체의 스며듬을 알렸다. 동여맨 망토로 갑옷 겉면을 훔친 흑기사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주 새까맣고 조그만 등이 보였다. 조금 더 큰 줄 알았는데, 그 작은 온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흑기사는 - 그 등이 바닥에 눕는 것을 보았고 - 잠이 든 것도 보았고 - 추위에 떠는 것도 보았으며 - 빛 한 움큼마저 받지 못하는 새까만 죽은 눈도 보았다. 포탄이 빠져나가 한층 가벼워진 몸은 두둥실 물 밖으로 떠오르는데 어둠 사이사이 가라앉는 식은 온기를 잡을 길이 없었다. 흑기사는 다시 헤엄쳐 내려갔다. 한 번 이미 달아올랐다 식어버린 가슴부위에서는 물을 빼내려는 팬이 미친듯이 돌아갔다. 물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팬 날개가 부러져 통째로 뚫린 가슴팍으로 압력에 눌린 물들이 수없이 쏟아졌다. 콸콸콸콸 흑기사도 제법 무거워져 가라앉았다. 깊게 난 구멍 사이로 가라앉은, 이미 가라앉아버린 두 빛줄기로 흑기사는 걸어갔다. 걸음이 무거웠다. 아주 오랫동안 가라앉은 흑기사는 저 홀로 반짝이는 화면 앞에 앉았다. 앉으니 몸에 찼던 물이 도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아주  이상하기 짝이없었다. 구멍난 부대에서 물이 참... 구멍으로 안나가고 왜 머리 끝에서 나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핏-핏-피핏 들려오는 경고음에도 흑기사는 눈물을 훔치지 않았다. 이 아이만큼은, 너만큼은, 너만이라도, 너만은........ 비로소 몸이 가벼워진다. 흑기사는 물이 아니라 다른 쇳덩이들도 빠져나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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