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 살은 과녁을 빗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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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 살은 과녁을 빗나가고
Billie Eilish - No Time To Die
불은 삶을 씻어 납작하게 만들었다. 온갖 성가신 요철과 떠들썩한 가닥갈래들 조차 남김없이 태워 고요히 잠재웠으니 횡주(橫走) 하는 낱알들조차 어미 품에서 잠든 어린 포유 짐승처럼 온순했다. 소란스러운 삶을 일소하는 불의 무자비함은 일견 다정하기까지 했으므로, 그것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도 고통스러운 비명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만 적막했다.
어둠 속에서 외마디로 들려오는 자장노래를 듣고 안니발레는 의식을 차렸다. 피렌체 출신의 고명한 조각가가 슬하 거느린 도제들의 야무진 손길들을 모두 물리고 직접 끌과 정을 들어 베고 빚어낸 것보다도 완벽한 모서리를 지닌 몸이 비스듬하게 좌정했다. 그러나 사위를 가늠케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었다. 대신 혼이 뚜렷하게 깨어나 자신과 세상을 살폈다. 새삼스럽게 향방과 위치를 가늠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너의 갈망이 여기에 있나니. 정신은 욕망에 후행했다. 들끓는 이상도, 버석대는 허무도, 섬예한 지성도, 난폭한 분노도. 욕망이 횃불을 치켜들고 앞서 비추는 길을 달리고 있노라면 저승녘의 개들처럼 따라붙었다. 그러므로 까마득한 암흑 속에서도 손을 뻗어 주위를 더듬을 필요가 없었다. 그 대신 호명으로 족했다.
내 이름은 안니발레 오사 디 안테.
그는 눈을 떴다.
두 발로 딛고 서서 보면 처량한 폐허였다. 맨발로 밟아 걷는 도중에도 찌르는 듯한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으니 살가죽과 그 안에 들었던 번잡스러운 육의 부산물 같은 것들은 불에 씻겨 사라져버렸다고 여기는 편이 옳은 것일 텐데, 우습게도 낯의 반절 정도를 뒤덮은 화상 자국만큼은 선명하게 만져졌다. 아직 아주 새롭게 태어난 것 또한 아니구나. 짐작하면서 안니발레는 이곳을 명계와 이승의 문간 즈음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혹은 낡고 닳은 꿈이려거니.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리오.
질문을 쥔 채로, 안니발레는 무너진 회당과 내려앉은 궁전을 지나 사토로 돌아간 광장을 가로질렀다.
도시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시각이 아닌 정신과 개념에 의해 건설된 영역이었으므로 명도와 채도가 무의미했다. 의미 있는 가치의 축이라고 한다면 무너졌는가, 그렇지 않은가 정도였으니 영역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따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화상 흉이 그대로인 것도 알 만한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안니발레는 겹쳐 쌓인 석회암들을 건너 걸었다.
황폐한 도시 가운데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건축물은 언덕 위에 있었다. 눈을 들어 올려다 보지 않아도 그것이 신전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 수 있었다. 신이 아니라면 그 누가 모조리 폐허로 돌아간 쇠망의 역사 속에서 반듯한 열주와 어캔더스 잎 조각을 간수하겠는가. 허망한 기록처럼 고요히 선 그것은 자신을 위해 예비된 것이었다. 손수 허물고 으깨어 되살아날 틈마저 묵살하라고. 너의 갈망이 여기에 있나니. 그렇다면 마땅히 화답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그는 언덕을 걸어 올랐다. 걷는 동안 손안에 자연스레 무언가 들어찼다. 이것으로 부수라. 쥔 것이 무엇인지는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니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족했고.
바짝 마른 알레포소 나뭇가지를 헤치고 비스듬한 언덕의 경사를 따라 걸으면서 안니발레는 파괴와 재생에 관한 오래된 격언들을 떠올렸다. 새삼스럽게 애쓸 필요도 없이 정신의 가장자리에 새기고 있는 것들이었으나 막상 겪어보니 들어 아는 것과는 또 달랐다. 일신의 끝을 재료로 삼아 새 불을 지피는 것은 껍데기 송장 안에 새 짚이 채워진 채로 올림피아 성소로 내몰리는 것과 또 달랐고, 그가 바라지 마지않는 전소의 결말과도 또 다를 것이었으므로 이것과 저것을, 저것과 이것을 분간하여 나누어 두어야만 했다.
‘내가 바라는 끝이 아니다. 아직은.’
되뇌면서 감각을 되새겼다. 안니발레 오사 디 안테가 바라는 끝은 질기고 길어 면면이 혼백에 기록될 것이다. 기록이 완료되는 그 순간 곧바로 모질게 불타오르겠지만 아무튼간에 이루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으므로 아쉬움 따위는 남지 않을 것이다. 찢고 죽여 마침내 신이 된다면, 생각해보라. 신의 혼은 격이나 위세가 또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그 혼백을 바탕 삼아 불로 지지는 인처럼 강렬한 것으로 그들의 패배를, 살신의 위업을 새기리라.
먼 전망에, 선득한 희열이 부싯돌 불티처럼 일었다가 곧 가라앉았다. 머지않아 신전의 초입이었다.
신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불명확했다. 으레 놓이는 상징물이나 특징적인 양식 같은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주인 없는 신전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보다는 주인을 특정할 수 없는 신전에 가까웠다. 만신(萬神)의 사원. 신앙 그 자체를 향한 숭배.
‘적합하구나.’
단조로운 감상을 안고 들어서서 입구 주랑을 지나칠 때 즈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망하는 혼이여. 불결에 태우러 오셨나이까.”
안니발레는 놀라지 않았다. 권속의 망령이거나, 권능이 지난 자리에 흔적처럼 남은 잔재이리라. 그는 봉헌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입을 열었다.
“권능과 영광을 폐하러 왔느니. 함께 사토에 묻혀 죽겠는가?”
“폐한 후에는 무엇이 남겠습니까.”
목소리는 틈도 두지 않고 나지막이 따라 들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
“죽음을 위한 죽음, 파멸을 위한 파멸에 과연 대의가 있겠습니까?”
“비빌 언덕을 잘못 골랐구나. 이 생의 길목마다 큰 뜻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폐하시겠습니까.”
“손에 든 것으로 폐하리라.”
“무엇을 드셨습니까.”
질문을 듣고 나서야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벼려온 할버드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은 거울 조각이었다. 허무가 묻어 있었다. 적막한 시선이 가만히 그것의 깨진 모양을 쫓았다. 만상의 암흑. 끝 간데없는 공(空). 삶의 모서리를 돌 적마다 입을 벌리고 있던 괴물 같은 어둠. 그대로 달려들어 머리를 박고 기절했던 어린 날의 어리석음. 안니발레는 입매를 움직였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들지 않았구나.”
“폐하실 수조차 없겠군요.”
“아니.”
“아닙니까?”
“아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아무도 아닌(Ουτις) 것으로 폐하리라.”
목소리가 다물렸다. 그래, 그래야지. 옛 지혜를 누구보다도 숭상하는 너희가 아닌가?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었던 영웅의 승리담 앞에서라면 신의 찌꺼기가 할 말이 없어질 만도 했다.
성소의 정 중앙에 다다른 안니발레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거꾸로 뒤집었다. 무언가 떨어지는 동시에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기묘한 충족감이 불결처럼 번져 올랐다. 그들은 죽으리라. 아무도 아닌 자(Ουτις)가 쏜 과녁을 빗나간 살(ἁμαρτία)에 맞아서.
성소의 중앙에서 연료 없이 검은 불이 일어났다. 모든 것을 태우는 불 사이에서 안니발레의 몸뚱어리가 다리부터 재로 변해 거꾸러졌다.
불 속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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