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러산트에서는 모든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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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산트에서는 모든 것이 좋았다
이맛가에 떨어진 물방울이 여윈 뺨을 지나 귓바퀴에 고이는 것을 느끼면서, 에밀은 저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다. 코러산트에서는 모든 것이 좋았다고.
가난한 거짓말이었다. 금세 내부의 반론자가 거수했다. 모든 것이 좋지는 않았다. 다만 이보다는 나았을 뿐이지. 대부분이 동의했다. 발언자는 입을 다물었다.
대개의 경우, 에밀 카민스키의 정신은 정교하게 가꾸어진 유리 숲에 비유될 만했다. 강직한 슬픔으로 쓰인 도덕률의 지난한 승리가 잇달았고, 거짓과 기만이 쉽게 패배하는 곳이었다. 어려운 승리와 쉬운 패배가 병립했다. 그 숲에서 에밀 카민스키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리 숲속에서는 역행할 수 없었다. 무지개를 품은 잎들 사이에서 거꾸로 걷다가는 무른 살갗을 베이고 만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숲은 처참히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침만 남은 시계처럼 도덕률은 관성의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문장은 면밀히 수정되었다. 모든 것이 좋지만은 않았다. 다만 이보다는 나았을 뿐이고, 정말 좋은 것이 있었을 따름이라고. 그렇게.
그는 어둠 속에서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박약한 삶을 어떻게든 추슬러보려는 원초적인 의지였다. 때로는 손에 잡히는 살이나 피보다 희미하고 투명한 사유가 생을 이었다. 구속구에 매인 채로, 남자는 기억을 더듬는다. 코러산트에는 좋은 것이 있었다. 무엇이 좋았지. 무엇이 아름다웠지. 그리고 무엇을 사랑했지.
팔다리를 옥죄는 구속구나, 전신의 고통이나, 허기, 목마름 같은 것들보다 그를 더욱 절망하게 하는 것은 정말 좋았던 것들이 원해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기억들은 해류를 타고 먼바다로 떠나갔다. 떠나간 기억들이 쇄편들을 보내왔다. 에밀은 그 기억들이 떠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대신 연안에서 아름다웠던 것들의 잔해를 주워 올렸다. 가난한 채집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입술과 이마에 대고 절실히 눌렀다. 사금파리들이 파고들었다.
코러산트에서는 모든 것이 밝고 높았다. 거인 같은 건축물들로 뒤덮인 별에서는 초목을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어렵사리 보존된 한 뼘 어치 온실을 에밀은 유독 귀하게 여겼다.
에밀은 경전을 치밀하게 해석하는 일이나 검식을 아름답게 다듬는 일보다 금어초와 태양금의 가지를 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고, 공의회 사람들은 언제나 그의 유별남을 비웃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웃음은 늘 뼈 없이 양순했고 다정한 말씨 아래 숨겨진 검은 없었으니 실로 무골호인이었다.
남자 스스로는 벼린 날이 없었을지도 모르나 그가 거두어 기른 것은 날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민틋한 비웃음과 은근한 멸시가 지나가면, 남자 대신 제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보복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짧은 틈 동안 모멸은 교활함으로 응징되었고 업신여김은 약삭빠름으로 교정되었다. 어쩌면 그것을 보다 이르게 알아차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뒤늦게 생각한다.
이윽고 스승이 돌아보면, 제자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이 무고한 낯으로 눈을 깜빡였다. 사면을 맴도는 걸음과 손길을 바라는 눈동자, 곧잘 품에 파고드는 버릇 같은 것이 애정을 갈구하는 부호들임을 알았으므로, 그는 기꺼이 품을 벌렸고 곁을 허락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 둔한 정신으로 남자는 생각한다. 어둠이 사랑을 간대흙 삼아 자랐다면 그 토양을 물에 풀어 대양에 섞이도록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하여 이름을 붙이거나 탐색할 계제조차 주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혹은 그녀에게 보다 이르게 상실이나 패임이 주는 고통을 의젓이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후회는 꼬리를 물었다. 남자는 전반적인 생을 돌이켰다. 고칠 수 있을 만한 구석들마다 찾아가 모서리와 면, 선과 축을 바꾸어보았다. 수십만 가지 만일이 연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차마 사랑을 후회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사랑이 그들의 원죄였다.
옛 규율의 금지는 허울이 아니었다. 제다이에게 사랑은 금지된 항목이었고, 으레 금지된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기어코 살아남았다. 생존한 것들만이 금지된다. 죽은 것들은 금지될 까닭이 없다. 그것은 신이 파종한 씨앗처럼 수만 가지 생명이 되었고, 다른 모든 생명처럼 자신의 연원에서 벗어나 제각기 알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본디 애정이었던 것은 조바심이 되었고, 조바심은 정신에 흠집을 냈다. 흠 사이에서 밤과 어둠이 자라났다.
유리. 그렇게 이름을 불렀을 때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아보는 낯에 서려 있었던 것은 결코 제다이의 얼굴에서 보여서는 안 될 것들이었으므로. 지금도 가끔 꿈에서 그 얼굴을 본다. 분노와 체념, 원망과 슬픔, 그리고 그런데도 끝내 숨죽지 않았던 일말의 사랑.
사랑.
결국, 마지막에 남은 가르침은 기어이 그것이었으므로, 남자는 실패한 스승이었다.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졌다. 에밀은 눈을 감았다.
“깨어 계셨네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머지않아 손길이 끼쳐왔고, 패이고 마른 뺨에 손톱과 손금이 닿았다. 눈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퍽 다정했다. 이윽고 입술이 부딪혔다. 유리. 신음같이 이름이 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손을 뻗어 등과 허리를 끌어안고 싶었으나 손끝을 움찔거리는 것만으로도 단단히 매인 손목과 팔꿈치에 거센 아픔이 일었다.
고초를 당한 제 것만큼이나 여자의 숨 또한 수척했다. 그 와중에도 염려가 일었으나 그것은 희미한 관성 같은 것에 가까웠다. 낯은 평이했고 어조는 매정했으니 어쩌면 그조차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짤막이 섞이던 숨이 멀어지자 저도 모르게 입술이 달싹였다. 간명한 애원이었다. 조롱하듯이 차가운 웃음소리가 귓가에 선명했으나 낭패감을 느낄 여력도 없었고, 그 대신 잇새에서는 톱으로 썬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와서, 염치도 없으시지.”
잇새를 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파도 같은 분노가 여실했다. 에밀은 해명하려고 했으나, 그다음으로 마치 마련된 순서처럼 목이 졸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한때 남자의 제자였으며 연인이었다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적이 된 여자는 그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목을 졸랐다. 마치 그럴 가치조차 없다는 것처럼.
“유리, 제발…….”
흐느낌처럼, 발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름뿐이었다. 속죄도 고백도, 탄원도 남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유리. 아주 오래전에는 그 음절 사이에 사랑이 섞이곤 했는데. 사실 지금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회한과 증오, 슬픔과 원망, 그 모든 것들이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니.
뭉툭한 환원의 결과였으나 남자는 수긍했다.
의식이 연안을 떠나기 전에 숨을 조르던 힘이 누그러졌다. 떨리는 눈가를 누르는 여자의 손끝이 채집된 사금파리처럼 날카롭고 차가웠다.
“제게 애원하지 마세요.”
날카로운 손은 남자의 헌 낯에 어렵지 않게 흠집과 상처를 냈다.
“용서를 빌지도 마시고요.”
베인 곳의 아픔보다 슬픔이 더 지독했다.
“죽지도 마세요.”
저보다 오래 사셔야 해요. 속살이는 목소리는 숫제 예언에 가까웠으나, 그보다는 저주였다. 오래 괴로우시기를 바라요. 뺨의 상흔 위로 눈물이 스몄다. 오래 쓰라릴 것이었다. 남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사랑으로부터 발아한 절망이 그에게 입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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