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우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그러니 우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8

원고 by 인간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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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요?”

“매일 그렇죠… 하하.”

“어휴, 수고가 많으십니다.”

“한창 어른들이랑 말하기 싫어할 나잇대라고 하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조금은 말해주었으면 하는데. 하곡은 말을 덧붙이는 대신 나직히 웃었다.

사천의 관아에서 내어준 마차는 금방 쓰러져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것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두 시진 즈음 들었을 때 맹가는 가장 가까운 도시에 마차를 멈춰세우곤 아예 새 마차를 가져왔다. 이산의 인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역참을 지날 때마다 말이 두어 번 교체되었고 마부도 세 번 정도 바뀌었다. 산동까지 자기가 모시겠다며 웃는 입꼬리가 시원한 사내였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던 주제를 꺼낸 건 맹가였다. 열흘의 일정 중 셋째 날부터였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주희는 한참 침묵하다가 “별 일 없었어요.” 하곤 일 년여 간의 여정을 -그걸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일축했다. 아예 대화라는 행위 자체를 포기해버리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맹가가 팔짱을 끼곤 고개를 기울였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번쩍였다.

“정말로?”

“…….”

“주희, 내가 전부 알 수 있음에 불구하고 네게 직접 묻는 이유를 알 거라고 믿는다. 다시 묻지. 그간 무슨 일이 있었지?”

“… 언제부터 말씀드릴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머뭇거리며 꺼낸 말은 경악하기에 충분한 내용 뿐이었다.

희가 꽤 많은 것을 -사실 대부분- 생략하고 축약했기 때문에 칠일 째 되는 지금까지 맹가와 희의 대화 내용이라곤 군데군데 빠진 내용을 다시 보수하는 것에 그쳤다. 마차를 바꾸고나선 노숙하는 일이 줄었으므로 마을의 여관에서 머무는 날엔 자정까지도 방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런 날엔 희는 마차에서 꾸벅꾸벅 졸다가도 작은 소리만 들리면 번쩍 깼다. 그러고는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떠돌아다니면서 민감해진건지 원래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작 일 년 조금 넘게 떨어져있던 것 뿐이었는데 눈앞의 주희는 하곡이 알고 있는 주희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래도, 뭐…….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요. 괜찮아질거라고 믿습니다. 신의를 모르는 아이는 아니니까요.”

“그래요? 이렇게 오래 어른들을 속이고 다녔는데요.”

“따지고보면 속인 것도 아닙니다. 나가겠다고 편지도 남겼고.”

그걸 편지라고 부르면 순자께서 “그게 어떻게 편지냐! 선전포고지.” 하시겠지만.

“저였으면 아주 크게 혼냈을 겁니다. 지금은 너무, 좀, 뭐라고 해야하나.”

“언성 높여 화내시는 분은 아니에요. 몇 번 화내신 적은 없고.”

“하긴, 재판 때도 그러셨죠.”

“… 오셨습니까?”

“저야 시골에 살아서 아무것도 몰랐으니 말입니다. 다들 흥분해서 어디로 가길래 투기장이라도 벌어졌나, 싶었는데 재판이었지 뭡니까.”

그땐 다들 괴상한 열기에 홀려있던 때였다. 굳이 상기시키고 싶은 기억은 아니었던지라 하곡은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화를 끝마쳤다. 희의 상황에 빗댈만한 것도 아니었다. 하곡의 말이 없어지니 더 물어볼 의욕도 없어졌는지 마부도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곤 말을 재촉했다.

역참에 도착한 건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질 무렵이었다. 대화 소리는 역참에 도착하기 몇 시진 전부터 잠잠해졌지만 막상 천을 거두고 나온 맹자나 희의 표정 둘 다 좋은 편이 아니었다. 뭔가 심각한 일이 있었나보군. 하곡은 캐묻는 대신 희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움츠러들었던 손이 온기의 주인을 알곤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 손이 잡히는 것마저 무서워 할 이유가 있나? 아무리 제가 갑작스럽게 잡았다곤 해도.

“피곤하지?”

“아뇨, … 괜찮습니다.”

“그래도. 잔소리 계속 하시지 않던.”

“선산으로 돌아가면 더 하시겠다던데요.”

“하하, 괜한 으름장만 놓으시는거겠지.” 맹자는 한 번 입밖에 낸 말은 죽어도 이루는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해도 도움되는 위로는 아니었다.

“식사는 따로 방으로 가져다줄까? 맹자님 뵙기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 꾸중 한 번 들었다고 겸상을 거부하면 더 혼날 것 같으니까요.”

그런 걸로 혼내시진 않을텐데. 하곡은 말을 덧붙이는 대신 희의 손을 단단히 깍지 껴 잡았다. 역참이 내어준 방이 둘밖에 없어 희와 하곡이 같은 방을 써야했다. 맞잡은 손을 가만 내려다보던 희가 중얼거렸다. “도망 안 갑니다, 선생님.” 도망갈까봐 붙잡은 것처럼 보였을까? 하곡이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 그냥. 어릴 땐 자주 이렇게 잡았잖아.”

… 그땐 그랬지. 제 손이 작으니 놓칠까봐 단단히 붙잡고 다니던 기억이 난다. 주희는 새삼스러웠던 온기를 실감하며 숨을 내뱉었다.

새벽녘에 홀로 깨어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정확히는, 지인들이 다 있는 곳에서 혼자 깨어있는 게. 누구에게 들킬까봐 소리 죽여가며 걷는 건 거진 반 년만이었다. 떠돌던 날의 대부분 주희는 새벽마다 산에 있었다. 그 편이 들킬 일이 적었다.

누구에게?

“… 여관에서 한 장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성미가 급하십니다.”

별안간 칼들고 습격하는 이들에게.

칼이 어깻죽지와 귀 바로 옆을 갈랐다. 길이나 소리를 들어선 비수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한 짧은 검일 것이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슬쩍 기울이자 두 번째로 날아온 검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카락 일부가 잘려 어깨 위로 떨어졌다.

삼수. 그늘 아래서 온통 새하얀 빛이 쇄도했다. 어깨부터 내달린 격통에 주희가 막힌 숨을 토해냈다. 영리한 치다. 어깨에 박힌 검은 길이가 길지 않았으나 상대는 여전히 그늘 속에 있었다. 검의 길이와 빛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치였다.

“… 심상치 않은 분이라 인식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심장에 맞지 않은 걸 후회해야 할 걸.”

“여기서 저를 죽이지 못할 걸 압니다.”

“왜?”

“유 앞에선 황상께서도 대담하게 일을 벌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일개 군졸이 어찌 유를 거스르겠습니까?”

“쯧.”

칼날을 타고 미끄러진 달빛이 상대의 손목을 비췄다. 오얏꽃이 수놓인 매듭이 처음 눈에 띄였다. 듣기론 이산 장군이 오얏꽃을 쓴다고 했는데. 이마저도 의도한 것일테다. 주희는 그림자 속에 시선을 고정했다. 검이 떨어지며 흑청색 내의 일부를 잘라냈다.

“일부러 검은 옷을 입고 나온건가?”

“… 원래도 이런 옷입니다. 피가 묻어도 티가 안 나잖아요.”

“어차피 앞으론 삼베옷만 입을텐데.”

“바라마지않던 일입니다만 한동안은 자제해주십시오. 곧 하남이지 않습니까.”

습격한 괴한- 그러니까, 이 자의 목소리가 유독 낯익었다. 약 칠일 남짓한 시간 동안 길 위에서 숱하게 들은 목소리다. 당장 오늘도 듣지 않았나? 그의 등 뒤에서.

‘저였으면 아주 크게 혼냈을겁니다.’

하던 그 치. 주희는 상대의 정체를 캐묻는 대신 두어 걸음 물러났다. 일부러 캐물어봐야 도움 될 것이 없었다.

열흘 째 되던 날 마차가 여남에 도착했다. 개봉의 남관인 주마정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한 달 뒤 청명을 준비하기 위해 이르게 상경한 상단들의 짐마차 행렬이 끝도없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오얏꽃 무늬가 경계를 서는 군인들 사이로 펄럭였다. 낯선 광경에 맹가가 눈을 찡그렸다.

“… 추밀원이 명절 치안 관리를 담당하진 않을텐데.”

“이산 장군은 형부 소속이잖습니까?”

“추밀원보단 형부가 움직이기 좀 더 편하니까. 검문을 하나?”

산동으로 보낼 생각이 없으시군. 주희는 목덜미에 향고를 덧바르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편백향은 다른 향을 지우는 효과가 있다. 운이 좋은건지 맹자께서 부러 모른 척하시는건진 모르겠으나 아직까진 어깨의 상처를 들키지 않았다. 다행인 일이었다.

검문을 하려는지 남색 옷을 걸친 군졸이 마차의 천을 걷고 들어왔다. 보통은 대표 한 명만 내려 인적사항을 확인할텐데. 그림자의 크기를 봐서는 꽤 거구였다. 주희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목깃에 수놓인 운사가 햇빛을 받아 흐릿하게 반짝였다.

“이 장군.”

하곡이 반갑단 목소리로 호명했다. 사내가 짧게 고개를 까닥여 예를 표했다.

“추밀원이 치안 관리도 담당하고, 별 일이군.”

“그럴만한 일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도 회암을 찾아야 하고….”

그리고, 시선이 닿았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검은색으로 염색이라도 해 둘 걸. 같은 것이었다. 이산이 여유당전서의 일원이었다는 건 송의 모두가 당연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 붉은 머리를 내보이고 있는 건 자충수였다.

맹가와 하곡의 허용 범위는 알았지만 이산은 모른다. … 막말로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등에 화살이 박힐 수도 모르는 일 아닌가.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이산이었다. 산동으로 가시려면 좀 걸릴 겁니다, 말하는 어조가 여상했다.

“자네가 추밀원에서 행동하는 것도 어색한데.”

“형부와 추밀원이 둘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건 형부의 행세다, 이건가?”

“서천상단 습격 사건은 형부 소관이니 말입니다. 서 소저께서 ‘회암’을 찾기도 했고.”

서 소저?

“아니, 여기 있었네! 회암!”

무어라 할 틈도 없이 손목이 붙들렸다.

서혜는 순식간에 이산의 뒤에서 튀어나와 주희의 손목을 붙잡고 -어지간한 군인들보다 날랜 몸짓이었다- 그대로 잡아끌어 마차 밖으로 그를 ‘꺼냈다’. 주희는 가장 안쪽에 앉아있었으므로 데려왔다는 말보단 꺼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햇빛 아래서 붉게 흩날리려는 머리카락 위로 흑단을 덮은 서혜가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보니 그들의 짐마차 뒤로 서천의 행렬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 상단주께서는요?”

“먼저 가 계세요. 개봉까지는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으니 아예 우리 쪽에서 증언을 들으면 어떻냐고 하시던데요.”

“이산 장군이 말입니까.”

“네.”

이산은 여전히 입구를 등진 채 마차 안에 있었다. 가림천을 하나 두고 그와 이산이 등을 맞대고 있었다. … 이 거리라면 대화 내용은 숨기지 못한다. 회암이 필요하다 했으니 당장 죽이진 않을테지만 감시는 붙을 거고, 상단 쪽에도 이산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간 주워들은 장군의 수사 방식을 감안하면 없는 것이 더 이상했다.

어디까지 말해줘야하지. … 어디까지 말해야 송이 주희를 죽일 수 있지? 주희는 제 머리를 덮은 흑단의 끝을 매만졌다. 시선이 자연스레 상단의 짐마차로 향했다. 한 달 뒤에 있을 명절을 준비한다기엔 그 수가 적었다. 시장 조사를 목적으로 각지의 특산품만 싣고 온 것이 분명했다.

“다쳤죠?”

“… 티가 많이 납니까?”

“겉옷까지 걸치고 있으니 티가 덜 나긴 하는데. 가까이 붙으면 피냄새가 좀 나긴 하네요.”

“일부러 향고까지 발랐는데요.”

“편백이 탈취까진 안 해주는 거 알면서요. 약은요?”

“없습니다.”

“염색약도 없어요?”

“… 팔았는데요.”

“그게 일 년치 분량이었는데 팔았다고요?!”

“…….”

거짓말을 했어야 했나. 주희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총관이 어처구니없는 낯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니 어쩐지, 서안에 왜 우리네 말이 있나 했네! 말도 팔고 약도 팔고 그럼 대체 사천까지 어떻게 갔어요?”

“… 걸어서?”

“아 진짜 미련하게 구네! 그럼 돈은요. 남았을 거 아냐.”

“…….”

산적에게 뺏겼는데. 목숨도 앗아갈까 약간 기대했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총관은 말이 없어도 상대의 전후상황을 파악하는 것에 능했다. 모르긴 몰라도 정당하게 사용한 적이 거의 없다는 건 눈치챈 것 같았다. 어처구니 없는 표정에 점점 화가 덧붙었다. 그가 미련하게 굴긴 했다.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한 주희는 붙잡힌 손목을 이끌고 짐마차의 가림천을 확 걷었다. 마침 이산이 나오려는 차였다.

“인사 드릴거죠?”

“왜 돈을 이상한 데에- 아니, 아무튼. 네, 그래야죠.”

“상단 쪽엔 제가 말씀 드려둘테니 같이 타고 가세요. 이쪽 마차도 곧 출발할 것 같으니까.”

“희야, 너는.”

하곡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도망갈까 염려하는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이런 곳에서 도망갈 수 있을리도 없었고- 따로 떨어진다는 상황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일말의 걱정도.

… 주희는 평소처럼 흐리게 웃었다. 당장 하곡이 걱정할 일은 없었다.

“통솔할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뒤를 계속 따라갈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가세요.”

“…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거겠지만. 정말 그래도 되겠어?”

“안 될 건 또 무어 있단 말입니까? 먼저 가서 쉬고 계세요. 금방 가겠습니다.”

서천의 검문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예 마차에서 내린 이산이 눈짓하자 마부가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맹자께서 허락하지 않았다면 마차가 출발조차 하지 못 했을테니 이 정도는 허용 범위 내였다.

마차가 여남의 성문을 통과하자 군인들이 소리 높여 다음을 외쳤다. 주희는 길에서 한 발짝 물러난 채 상단의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다쳤나?”

“… 운신이 어려울 정도는 아닙니다. 회암을 찾는다고 들었는데요.”

“사천에 박혀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리 적극적일 줄이야.”

비아냥대는 것 같진 않은데. 상황 자체가 불편하니 무슨 말을 들어도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아마 그마저도 제 착각일 것이다.

주희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숙였다. 불필요한 경계는 잘 될 일도 그르치게 했다. 이산 앞에선 안 하는 것이 좋았다.

“형부의 이산일세. 자네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 주희입니다. 회암으로 부르시려거든 그리 부르셔도 좋습니다. 둘 다 저니까요.”

“재판관 앞에서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걸. 회암과 주희의 이름값이 동일하진 않을테니까.”

“주의하겠습니다.”

아, 역시 그날 밤에 머리를 물들여둘 것을. 뒤늦은 후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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