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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이의 연말이면 삼하인, 임볼릭인가. 축제 자체는 즐기지만 삼하인을, 불사의 밀레시안이 즐기는 건 기만이 아닌가 싶어서 조용히 지나감. 아이던은 축제 진행 때문에 바쁠 테니 다 끝난 새벽에 잠깐 얼굴 보고 올듯. 임볼릭은 어 봄의 시작과 관련된 축제라는데 맙이너기에선 일요일이라... 티르 코네일애서 마지막 추위를 느낄 듯. 여관에 앉아 따듯한 것을 마시며 창밖 보는 하펜 보고 싶다. 봄눈은 4월에도 내린다지만(한국의 경우. 맙이 설정은 모르겠다) 흰눈 나리던 울라대륙 풍경이 아쉬워서 자꾸만 내다보네. 할렉이 뭐 발레스는 천지가 눈인데 아쉬워하냐고 묻겠지. 너는 에린에 오기 전에도 겨울만 있는 곳에서 온 것처럼 말한다? 되묻는 하펜에게, 할렉은 에린 이전의 일들은 다 잊어버렸다고 대답했지. 할렉이 하펜한테 에린 이전의 삶을 물었으면 좋겠다. 옛날 이야기를 듣듯 흥미로. 그러면 하펜은 에린 이전의 삶이 있는 밀레시안이고, 할렉 저는 정말 에린에서 나고 자란 듯 들으려고.

한국이란 곳은 에린보다도 더 사계절이 뚜렷했어. 점점 아니었지만. 나이를 세는 기준이 조금 달라서, 새해가 되면 나이를 먹었어. 삼하인 한 가운데에 나이를 먹는 거랑 비슷하려나? 여름이면 주로 발레스에서 지내잖아. 울라의 여름은 더우니까. 그래도 종종 울라로 돌아오는 건, 돌아온다는 말이 되는 것 같아서 그래. 그곳도 여름은 너무 더웠으니까. 물론 높은 건물이나 여름임에도 시원한 에어컨... 넌 모르는 셈치자 그래. 시원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상자도 없지만 내리쬐는 태양이랑 푹푹 찌는 길거리는 비슷하니까. 그래도 그늘에 앉으면 시원했어. 그제서야 땀이 식고, 머리카락 아래를 느릿느릿, 정말 천천히 지나가면 넌 그걸 싫어하지만. 여름이 맞구나 싶었어. 여름하면 더위를 퍼뜩 떠올리는데도 그에서 몇 걸음 떨어져야 여름이구나, 여름이 맞구나. 바람에 얇은 옷자락이 흔들리다 등에 스치잖아. 나는 그걸 좋아했어.

카페에 들어오거든 보통은 테이블을 찾았다. 굳이 바리스타 앞에 앉는 건 말을 걸고 싶거나, 걸어주길 바라거나, 말하고 싶거나, 프레야였다. 프레야는 셋을 다 걸쳤다. 일행이 있더라도 바에 앉는 경우는 갈래가 많지 않았다. 제 삼자의 의견이 필요하든 단둘이 있을 상황을 피하던. 단골손님들은 서로 우연히 마주치기 위함이었다. 프레야는 혼자서도 그랬다. 아니지. 단골손님은 대개 혼자, 많아도 둘씩 들어와 무리가 되었다. 돌아갈 적에도 둘에서 하나로, 혼자에서 두 사람으로 바뀌는 게 다였다. 그런 점에서 갈라 선생님과 하이드 씨는. 적어도 이번 주는 단골손님의 카테고리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의자를 빼 앉기도 전에 예의 특제음료를 주문했다. 하이드 씨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분명 친우에게 말하려 입술을 뗐는데, 나오는 말은 커피 주문이었다. 갈라에게서 내 쪽으로 눈을 도륵 굴리며 말했다. 저 친구 마시는 거 나도 한 잔 줘 보게. 첫 모금을 마시는 하이드 씨는 떨떠름해 보였다. 또다시, 갈라 선생님 대신에 우리가 뒤집어 썼다.

역시 뱀파이어한테는 안 맞습니까?

헤. 역시라니 실례라고. 좀 더 따듯했으면 할 뿐이야.

나는 이 정도가 좋아.

갈라 선생님이 편을 들었다. 평소 한 편을 들어주지 않던 그였다. 그렇다면 단순한 의견이겠으나 작금의 하이드 씨를 생각하면 곤란했다.

두툼하고 커다란 손이다. 주먹을 쥐었대도, 실은 그래서 표가 났다. 내 것은 느슨하게 쥐어 크기를 부풀려도 갈라의 주먹과 달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매끈했다. 흉 하나 없이 보드랍기까지. 손목을 꺾고 손가락을 펼쳤다. 수 십 년을 모델로 지낸 바 호흡보다 쉬웠다. 그래, 직업도 호흡도 다르지. 갈라의 호흡은 매순간 심호흡 같았다. 이번에도 커피잔을 들며 진중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잔은 덩치에겐 장난감 같았다. 소꿉장난을 할 때에 숨을 고르는 갈라라니. 상상만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어지는 생각에, 반창고 밖으로 비져나온 상처가 우스웠다. 뱀파이어의 손톱이 할퀴어도 종내 저리 아물겠지. 소꿉장난처럼 긁는다면, 카페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다. 택시나 같이 탈까. 입술을 가리고 물었다. 곧 자리를 털 수 있었다.

새하얀 케이크였다. 생크림 케이크하면 기대 내지는 생각하는 그대로였다. 한가운데 과일 몇 개와 초콜릿 한 조각이 전부였다. 생일상 앞에 앉을 두 사람이라면. 좋고 싫고를 논하기 전에 단것에 관심이 없었다. 좋아한단 말은 못하지만 싫을 것도 없었다. 무열은 담배를 끊겠답시고 사탕을 까먹기도 했으니. 둘은 단것에 군것질을 먼저 떠올렸다. 식사로 삼지 못할 것들이니 선호도에서 밀렸다. 예, 아니오 외에 다른 답을 내놓으면 쉬워졌다. 그렇게 무난하고 익숙한 생크림 케이크를 가리켰다. 점원이 초를 몇 개 넣을지 물어 곤란했다. 제 삼의 답으로 얼버무릴 수 없었다. 거짓말은 쓸 수 있었다. 무열은 나이를 잘 모르겠다 긁적였다. 점원은 봉투에 짧고 긴 초를 열 개씩 넣었다. 계속 들고만 있을 순 없으니, 결국은 케익 앞이었다. 무열은 우선 기다란 초를 세 개 꽂았다. 스물아홉으로 해드릴까? 너스레에 무열은 초를 들었다. 네 개의 초는 길이가 같지만 크림을 파고든 정도는 달라 들쭉날쭉 했다. 무열은 라이터를 꺼낼까 하다가 성냥을 집었다. 네 번째 초에는 불을 붙이지 않았다. 다른 세 촛불이 깨끗한 심지를 밝혔다. 노래를 훌쩍 넘겨 생일 축하합니다, 그 말만 하고서 촛불을 후 불었다.

겨울이니 만큼 해가 빠르게 기울었다. 여름이라면 이런 하늘은 여섯시에나 봤던가. 당연하게도 풍색이 전혀달랐겠지. 계절은 돌아오는 법이니 다르겠다 생각해도 맞았다. 태초엔 나열하는 순서에 따라 봄이었을까. 여름이나 겨울부터 시작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나도 겨울생이니까. 계절이랄 게 없었다 생각하기에는. 남북극에도 있는 게 계절이었다. 그를 포함해서, 다큐멘터리를 보고 머리에 남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늦은 밤이었고 화면에도 검은 하늘이 광활했다.

아주 검은 밤은 아니었을 테다. 하늘을 덮어버린 극광에 색이 죽어버렸을지 모른다. 카메라는 하늘을 한껏 확대해서 찍었다가 원경으로 바꾸었다. 물 위에 뜬 유화물감 같던 것이 아지랑이로 융단으로 변모했다. 그 융단은 색의 경계를 가지지 않았다. 어느 지점을 찍는다 해도 족족 다른 색이 나올 것만 같았다. 주관적인 색감이든, 특정 값으로 수치화한 것이든.

그 형형색색은 브라운관 밖으로 나와 하나의 계열로, 푸른 빛을 띄었다. 정원이의 하얀 잠옷 위에서도 제각각 다른 깊이였다. 눈동자 위에선 희고 네모반듯한 빛으로 축약되었다. 지려가 떠올랐다. 계절만 기억하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라고. 북극의 적설도 그랬던 것 같다. 동네 골목에 눈이 쌓이거든 가로등 없는 자리를 떠올렸다. 그럴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선물로 고를지 이미 알았다. 꽈배기 무늬가 들어간 목도리. 지금이야 촌스럽지만 받았을 당시엔 눈에 띄지도 않았다. 목도리보다는 나였다. 두르고 출근을 했다가, 하 경위가 웬일로 목도리를 했냐는 말을 들었다. 서에서 목도리를 한 적이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언젠가부터 목까지 지퍼를 올리거나 옷깃을 여미고 장갑을 끼고 말았다. 특기할 이유도 없었다. 목도리를 하면 따듯하긴 하겠으나, 따듯한 정도를 모르니 필요도 못 느꼈다고. 원숭이와 꽃신 같은 추측만 있었다.

점원은 받을 사람의 나이를 듣고선 목도리 하나를 가리켰다. 군청색에 무늬가 없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니 곧 나이를 먹는다는 걸 감안한 모양이었다. 그 보다 어렸을 때, 서른이면 온전한 어른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와 나는 거리에서 서른즈음에란 노래를 자주 들었다. 짙고 무거운 색이 어른의 몫이란 인상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매번 어두운 옷만 입는 친구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점원이 두 발짝 떨어진 매대로 안내했다. 이미 아는 내 물건을 보고 웃음이 나오려 했다. 앞에 서자마자 이 목도리를 고른 이유를 알았다. 마냥 밝기만하면 부담스러워 하는 나를 위해 베이지색을 골랐고, 무늬는 상관 없었다. 선물은 고르는 과정까지가 그 선물이고, 그러니 나는 지금도 선물을 받는 중이었다.

그는 목도리를 대강 목에 두르고 등뒤로 넘겼다. 다시 풀어 점원이 가르쳐준 대로 귓불까지 감싸줬다. 목도리를 손으로 누르고 슬쩍 뺨을 부벼보는 게 마음에 든 눈치였다. 누가 고른 선물인데. 안목도 안목이거니와 나는 그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준비한 선물은, 기억 대로 지포 라이터였다. 아직 그때에 사는 그가 고를 법했다. 이러니 얼핏 보면 목도리는 대충 고른 선물이었다. 지포 라이터는 너무 눈에 띄지 않겠나? 물론 마지막에 눈이 가는 건 이 얼굴이겠네만. 목구멍까지 말이 올라왔으나, 과정까지가 선물이니 조용히 라이터를 켰다.

나와 열 살,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차이였다. 스물아홉과 서른아홉으로 두고 보면 차이가 컸다. 내가 그 나이일 적의 일들을 생각해 그리 보이는 것일지도. 스물아홉이면 잘 변하는 때였다. 더군다나 군상극이니 떠드는 밀실을 네 번을 들렀다. 류 순경을 거쳐 다시 류태현이 된 그는 꽤 달라졌다. 통원 치료를 관두겠단 말 뿐만이 아니었다. 이기고 지는 걸 따지고 있느냐 언성을 높이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와 내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음은 예전부터 알았다. 지금 따지는 지점도 거기가 아니었다. 류태현은 제가 변한 게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리어 내가 병원에 가보라 말하는 상황에서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그 웃음도 환상통을 향했다.

변하는 게 두렵나. 변한 게 두렵나.

스물아홉도 서른아홉도 아는 나는 속으로 물었다. 스물아홉의 나라면 변하는 게 두려울 테다. 서른아홉인 내게선 동질감을 느끼지 못 하고. 그런 서른아홉이 되어가는 게 두렵다. 그러면 지금 나는 어떤지. 변하길 바라면서 변하려들지 않았다. 누가 그럴 작정을 하겠냐마는. 친한 친구의 총 생각이 났다. 서태준이 눈앞에 나타나길 바라면서도 피하던 버릇이 여전했다. 죽은 누나의 유리잔에 손을 뻗었다가 곧 거뒀다. 손이 닿았다간 직접 방아쇠를 당긴 손마저 내가 될 것만 같았다. 언젠가 방아쇠에 걸고 떨던 손처럼 손목이 흔들렸다. 시선을 따라간 팔목, 가슴, 숨소리도. 가슴을 내려다보는 것인데, 고개를 들지 못하는 꼴로 보이겠다. 보이는 모습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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