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CP

Forgotten Myosotis

티온랩실 by 티온
4
0
0

! 만우절 IF) 류건우가 그날 의자를 걷어차지 않았더라면

작업곡 - HIGHLIGHT 'DAYDREAM'


분명 마지막으로 만나고 2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왜 그날따라 류건우가 유독 지쳐보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박문대는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낮술 괜찮냐.' 라고 묻는 류건우의 힘없는 부탁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그 결과 지금 박문대의 눈앞에 있는 건, 그렇게 강한 주량으로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술을 처먹고는 이 맑은 대낮부터 말 그대로 꽐라가 되어 버린 류건우였다.

"형, 건우 형! 괜찮아요? 걸을 수 있으시겠어요...?"

"으..."

글렀다. 류건우는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취했다. 자기라도 술을 안 마시길 잘했다고 생각한 박문대는 계산을 마치고는 몸도 못 가누는 류건우를 어르고 달래며 일으켜 세우는 것에 성공했다. 

"형, 정신 좀 차려보세요..."

"어엉......"

"네?"

귀를 가까이에 대자 그제야 류건우가 뭐라고 웅얼거리는지 알 수 있었다.

"스티어..."

"아."

박문대는 어렵지 않게 그 이름을 떠올렸다. 스티어. 류건우가 소식을 찾아보던 아이돌이었다. 흘리듯 본 것이었지만, 스티어가 얼마 전 해체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미안..."

"저보다는 형 몸에 더 미안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평소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말을 꺼내며 투덜거리던 박문대는 흘러내리는 류건우의 몸을 추슬렀다. 어깨에 얹힌 팔이 예전의 자신만큼 가느다래서, 늘 크게만 보이던 형이 오늘따라 너무 가볍고 작아 보여서, 박문대는 결국 아무 말 없이 형을 부축하며 제 집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류건우를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으."

눈을 뜨자 웬 낯선... 아니,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류건우는 공시 생활을 끝낸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지독한 숙취에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폈다. 얼핏 보면 저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세간살이, 그렇지만 분명 저보다는 덜 삭막한 분위기의 내부. 박문대가 살고 있는 원룸이었다.

"형, 정신이 좀 드세요?"

"어... 어. 어젠 미안했다."

"형이 뭘 하셨는데요?"

평소엔 말랑하기 그지없던 박문대의 질문에 제법 가시가 돋친 것 같아 류건우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걸 본 박문대는 한숨을 폭 쉬더니 류건우의 옆에 앉았다.

"아무것도 안 하셨어요. 씻지도 않고 그냥 주무시던데."

"그랬냐. 미안하다, 세탁비라도 보낼게."

"아뇨, 그건 괜찮아요. 해장국 사왔으니까 끓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내가 할게."

"어제 그렇게 술을 퍼마셔놓고요?"

듣고보니 할 말이 없다. 류건우는 조용히 박문대의 침대 위에 앉았다. 보글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박문대가 수저 두 쌍을 식탁 위에 놓고는 냉장고에 넣어둔 물을 꺼내 류건우에게 건넸다.

"여기 물이요."

류건우는 군말 없이 물을 삼켰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 더불어 자신이 어제 뭘 하려다 실패했는지까지 떠올려버린 류건우가 조용히 손을 들어 눈을 감쌌다. 그 모습을 조금 슬픈 눈으로 지켜보던 박문대는 주방으로 가 잘 끓는 냄비를 가스불에서 내리고는 류건우를 불렀다.

"다 끓었으니까 해장하러 오세요."

"... 그래."

박문대가 류건우를 침대에 눕혀두다 본 흐릿한 목의 흔적. 박문대는 그 흐릿한 흔적으로부터 6년 전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그래서 그랬다. 괴로워하는 이유를 굳이 지금 캐내지 않는, 나는 언제까지고 당신의 말을 기다리겠다는 선언. 때로는 따뜻한 무관심이 더 나은 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류건우가 박문대에게 그랬듯이.


"류청우 씨."

류건우는 익숙한 이름을 입술에 얹었다. 한때 그에게 살아갈 에너지를 주던, 류건우가 유일하게 챙겨보던 그룹의 리더가 가진 이름이었다. 그러자 앞에 앉은 사람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감춘 체격이 좋은 남자, 류청우였다. 류건우는 앞에 앉은 류청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저희 팬이셨다고요."

그걸 팬이라고 할 수 있나, 싶어 류건우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하기엔 제 앞에 있는 남자에게 미안했다. 류건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류청우 역시 류건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여름 특유의 습한 공기 탓인지, 아니면 그냥 시간이 흐른 탓인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머그잔에는 어느새 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물방울이 잔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류건우는 무어라 말을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데이터 팔이의 얇디얇은 인맥과 대학교 지인들의 인맥을 어찌저찌 모아붙여 성사된 만남이었지만, 애초에 무엇 때문에 자신이 류청우를 불러낸 거였는지도 불확실했다.

"왜 저희를 보셨던 건가요."

류건우는 고개를 들어 류청우를 보았다. 모자 너머로 보이는 가라앉은 눈빛은 상처입은 짐승의 그것과 비슷했다. 류건우는 치미는 감정을 꾹 눌러담으며 답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확실히 답할 수 있었다.

"열심히 하는 게 눈에 밟혔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금 달랐지만, 이 정도 답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류건우는 그렇게 생각했고, 상대 역시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류건우는 어둡기만 하던 류청우의 검푸른 눈에 카페의 조명이 반사되는 것을 시야에 담았다. 류청우는 얼음이 녹은 커피를 홀짝였다. 그들은 그대로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깬 건 류청우였다.

"언젠가."

류청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티어의 멤버들이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을까요."

해체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그룹의 재결성.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그들의 화제성은 나락으로 간 지 오래였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류건우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마스크에 얼굴의 반이 가려져있긴 하지만, 류청우는 희미하게 웃는 것 같았다. 그 눈에 담긴 것이 기쁨인지, 희망인지, 씁쓸함인지. 류건우는 단 한 가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얼마 전의 자신이 굴복할 뻔했던, 저 밑바닥에 깔린 무기력. 필사적으로 발버둥친 끝에 마주한 무저갱. 그리고 류건우는 그런 사람을 그저 내버려둘 인성은 못 됐다.

"청우 씨가 다시 무대에 오르는 걸 보고 싶어서요."

"...?"

"기다릴 겁니다. 류청우 씨의 새로운 무대."

류청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류건우는 잔에 남은 커피를 후루룩 들이키고는 일어섰다. 얼음은 다 녹았지만, 커피는 여전히 차가웠다.

"저도 포기하지 않을테니, 류청우 씨도 포기하지 말아주십시오."

류청우, 차유진, 김래빈. 언젠가 꼭 그들이 함께 하는 무대를 직접 보고 싶었다. 류건우는 류청우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카페를 나섰다. 그 뒷모습을 류청우는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탁자에는 류건우가 흘린 것 같은 명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류청우는 떨리는 손끝으로 명함을 주워들었다. 왼쪽 어깨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류청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얼마 뒤, 본인으로부터 온 연락을 통해 류청우는 스티어의 전 멤버였던 이세진이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스티어는 마약 그룹이 아니라는 그 단호한 말에, 류청우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테스타 박문대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무언가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몸이 보송한 걸 보면 악몽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가만히 눈을 뜨고 누운 박문대의 귀에 문 밖에서 도마와 칼이 닿는 것 같은 통통 소리가 들렸다. 누가 아침이라도 만드나보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문대의 귀에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배세진의 목소리였다.

"류청우! 양배추는 다 된 거지? 감자랑 당근은 너무 크게 썰면 안 돼!"

"알았어, 세진아."

온화하게 대답하는 류청우의 목소리와 함께, 양념장을 만들고 있는 듯한 선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 세진아. 간 좀 봐 줄래...?"

"으~음. 설탕 좀 더 넣어볼까!"

"그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그럼 간장을 좀 더."

그러다간 양념장에 맞추느라 음식 양이 한 다라가 될 거다. 박문대는 기분 좋은 소음에 미소지었다.

"문대 형이 깨시기 전에 끝내야 하는데...!"

"Oh, 가능해?"

"아마도...?"

잔심부름을 도맡은 건지 이따금 냉장고와 선반을 여닫는 막내들. 박문대는 한동안 그 나른함을 만끽하다 몸을 일으켰다. 좋긴 했지만, 역시 요리는 자신이 하는 게 가장 속 편했다.

"뭐 하십니까."

"아, 늦었어! 문대문대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났어?"

"뭔 소리야."

간단하게 타박한 박문대가 주방을 둘러보았다. 손질된 닭, 채소, 예상대로 한 그릇을 꽉 채운 양념, 그리고 커다란 냄비와 함께 불 앞에 선 배세진과 그 주변을 꽉 채운 산만한 덩치들. 무엇을 하려던 건지 감을 잡은 박문대가 피식 웃었다.

"찜닭인가요."

"그, 네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니까..."

"그런데 왜 아침부터 이러고 계셨어요."

"오늘! 만우절이니까,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

역할 바꾸기라도 하고 싶었나본데, 순순히 부는 것을 보니 깜짝카메라는 깔끔히 포기한 모양이다. 박문대는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럼 같이 해요."

"그, 그래!"

"어떻게든 먹을만한 건 나오겠죠."

"야!"

가벼운 놀림에 발끈하는 배세진을 보며 박문대는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은 행복한 만우절이 될 모양이었다.


- 후일담

"그런데 문대야. 오늘따라 왜 늦잠을 잤어."

"그러고보니 어제 문대 형님이 유독 머리를 자주 짚으시던데..."

"뭐? 박문대, 아프면 말을 했어야지...!"

"Oh, 문대 형 전에 분명히 아픈 거 안 숨긴다고 약속했어요."

"무, 문대야, 병원엔..."

"그래, 우리 오늘 간만에 병원 갈까? 문대문대 상태도 확인할 겸?"

"아뇨, 저 괜찮습니다."

"하하, 세진아 혹시 체온계 어디 뒀는지 기억나니."

"큰달 씨에게도 연락할까?!"

"아뇨, 그럴 것까진 아닙니다. 아니 필요없다고."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진 주변을 보며 박문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이걸 만우절 장난이라고 할까, 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 모든 건 업보였다. 만우절에도 굳세어라 박문대.

+) TMI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Myosotis는 Forget-me-not, 물망초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Forgotten myosotis라는 제목은 작중에서는 테스타 박문대가 꾼 꿈과 스티어 시간선의 스티어, 둘 모두를 뜻하는 걸로 의도했었는데... 꽃말을 한 번쯤은 부정해보고 싶었거든요. 근데 마침 딱 어울리는 소재가 있는거에요. 그 시간선은 이제 류문대와 큰달, 류청우, 배세진, 차유진, 김래빈만이 아는 잊힌 시간선이고, 그 꿈은 말 그대로 있을지도 몰랐던, 그러나 실현되지 않은 허황된 가능성에 불과한 잊힌 시나리오니까요.

+) 23.04.10 수정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