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못
팬픽이었던 것.. 리네이밍
새 계절의 싸늘한 바람이 팔뚝을 스쳤다. 겸은 옷깃을 여몄다. 무더운 날이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도 맑은 하늘이었다. 충분히 끓지 못해 남아버린 물기를 머금은 채로, 다가올 추위를 견딜 곳을 찾아야 했다. 디뎌온 길은 전부 무너져있었다.
어젯밤, 마지막 동족이 떠났다. 겸의 손위 누이였다. 산 아랫마을에서 산 낡은 옷을 입은 채였다.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한 누이는 굽잇길을 내려가며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겸은 작은 등이 조금씩 작아져 마침내는 누이의 기운조차 느낄 수 없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것은 영원한 이별이었다.
백록산. 겸과 동족들이 평생을 살아온 산은 이제 이전의 푸른 빛을 잃었다. 10년을 끌어온 전쟁 때문이었다. 백록산 인근을 치리하던 선(銑)이 멸망하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끝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는 동안 백록산의 험준한 암벽은 천연 요새의 역할을 했다. 적군을 몰아세워 몰살하는 거대한 벽. 피를 받은 땅이 진동했고, 겸을 포함한 흰 사슴 일족은 밤낮을 괴로워했다.
곧 날이 추워질 텐데. 혈혈단신 산에서 내려간 누이가 걱정되었지만 전할 방법이 없었다. 어두워지는 하늘에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낸 초생달을 보며 겸은 누이의 무사 안녕을 빌었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바라보던 겸은 마른 땅 위에 가볍게 발을 굴렀다. 익숙한 길 위에 하얀 사슴 한 마리. 붉은 암벽이 하얗게 보일 만큼 가득하던 동족들은 이제 없다. 얕은 숨을 들이쉬고 겸은 땅을 박찼다. 몸이 가볍게 떠올랐다. 같이 뛰는 발굽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산, 마른 나무 사이로 외로운 소리가 메아리쳐 돌아왔다.
겸도, 떠나는 이들도 모두 알았다. 신수(神獸)인 그들이 산을 떠났을 때 벌어질 일들을. 더러는 살았으나, 대부분은 얼마 안 가 굶주린 인간들의 먹이가 되었다. 누이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산 아래로 내려간 이들도 있었지만, 인간의 시선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은 똑같았다. 정상에 도착한 겸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동그란 코끝에서 뿜어져 나온 숨이 하얗게 뭉쳤다 이내 흩어졌다.
달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 아랫마을은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였다. 겸은 그 모습을 고요히 바라보다가 발을 두 번 굴렀다. 잔잔하게 울리는 땅. 공중에서 몸을 돌려 땅을 짚었을 때, 겸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시간이 없었다. 풀어진 신발을 여미고 겸은 달리기 시작했다. 짐승의 모습을 했을 때보다는 느렸지만 험한 산길을 시원하게 달렸다.
도착한 곳은 산 깊은 곳 얕게 흐르는 강줄기. 겸은 그 옆에 자라난 커다란 나무 아래 멈춰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강가는 밝은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단단한 체격의 사내. 겸은 숨을 깊게 삼켰다 토해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돌풍에 청색 옷깃이 흔들렸다. 이윽고 내내 그리워하던 얼굴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겸은 아프게 웃었다.
사슴못
“겸아.”
겸을 발견한 눈가가 휘어졌다. 그 모양이 이 밤의 달 모양을 닮았다. 겸은 푸드덕 몸을 떨었다. 마음의 울림이 온몸을 지배한 탓이었다. 손을 흔드는 그에게 다가가며 겸은 살짝 비틀거렸다.
수많은 동족을 산 아래로 보내고, 누이마저 산을 떠난다 했을 때 겸은 이곳을 떠날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럼에도 하루, 또 하루, 함께 가자던 누이까지 먼저 떠나보낸 것은 눈앞의 사내 때문이었다. 긴 시간, 차곡차곡, 마음을 내어준 사람 때문에.
“오랜만이다.”
어깨를 감아 안는 팔. 그 가벼운 압박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등을 토닥이는 손이 썩 다정했다. 무게는 곧 겸을 놓아주었지만, 몸을 스치던 온도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덤덤하게 돌아선 등이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언제 저렇게 자랐지. 눈치채지 못한 사이 키도 체격도 처음 만난 날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달조차 뜨지 않은 고요한 밤, 둘은 처음 만났다. 목을 축이려 찾은 강가에 그는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칼에 맞은 상처로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난자당한 청색 옷은 그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끊어질 듯 간간이 이어지는 숨소리를 들으면서도 선뜻 나설 수 없었다. 인간의 눈을 피해 숨어 사는 짐승의 숙명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며 이 산에서 죽은 인간이 몇이던가. 저기 암벽에는 수백 수천 명의 피가 뿌려지기도 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산속에서 인간이 죽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죽어가는 이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일까. 모든 피를 쏟아낸 듯 창백한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끝내 겸은 그를 지나치지 못했다.
연승화. 망한 선(銑)왕조의 막내 왕자. 열흘 만에 눈을 뜬 승화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적국 자객의 칼에 맞아 죽음에서 간신히 삶으로 돌아온 소년은 죽음의 공포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겸은 그 작은 소년에게 마음을 주게 되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승화는 곧 건강을 되찾아 산에서 내려갔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눈에서 보이지도 않으면 깊어지는 마음도 어느 선에서는 멈추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겸의 우스운 착각이었다. 승화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산에 올라와 처음 만난 그 강가에서 계곡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겸의 이름을 불러댔다.
저러다 지쳐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편이 승화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으리라 생각하며. 그러나 승화도 쉬운 사내는 아니었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고작 이름과 백록산에 산다는 것뿐이면서, 깊은 숲 낯선 길을 어렴풋이 더듬으며 몇 시간을 이름을 불러댔다. 결국 지는 쪽은 겸이었다. 자객의 공격을 받아 생사를 헤매던 사람을 그리 둘 수 없는, 가볍지 않은 마음의 이유로.
“겸아.”
“그래.”
“나, 연천으로 가기로 했다.”
담담하게 뱉어낸 말의 무게에 겸은 숨을 들이켰다. 연천. 선의 땅을 두고 싸우는 세 나라가 접전을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병사가 죽어 나가는 곳. 땅으로 스며든 핏물 때문에 붉은 강이 흐른다는 곳. 연천에 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승화의 처지가 곤란해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선(銑)이 몰락한 후 적장자는 효수되었고, 차남은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뒤 얼마 안 되어 자결했다. 선의 복원을 갈망하는 백성들에게는 이 어린 왕자가 하나 남은 희망이었다. 승화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연(煙)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탄생한, 바람 앞 등불 같은 나라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승화의 어깨는 무거워 보였다.
“오랫동안, 이곳에 오지 못하겠구나.”
네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장난스러운 말투 끝에 눅눅한 감정이 묻어났다. 겸은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고민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가지 말라고 말리고 싶었다. 이미 망한 나라의 왕자가 더 뭘 할 수 있겠냐고, 모두 허튼짓이라고, 하루 또 하루 목숨을 구걸하며 살라고. 아픈 말로 상처 내고 주저앉히고 싶었다.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더더욱.
너는 왜, 하필이면 선의 왕자로 태어나서. 이제 제법 찬 바람이 불었다. 백록산보다 더 북쪽에 있는 연천은 곧 눈발이 날릴 것이었다. 부드럽게 몸을 휘감고 사라지는 바람이 기분 좋은지 승화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람을 만지려는 듯 움켜쥐는 손은 창백한 달빛. 겸은 툭툭 가슴께를 두드렸다.
“오늘 좀 이상하네, 겸.”
“…….”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좀 어울려주지.”
“……왜, 그런 말을 해.”
울컥. 목구멍 안에서 설움이 올라왔다.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 해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길을 떠나면서, 그런 말을 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사정없이 흔들리는 겸의 눈동자를 발견한 승화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울지마, 울지마. 내가 미안해. 겸아. 다급히 어르는 목소리와 팔을 당겨 안는 온도에 겸은 뚝뚝 눈물을 흘렸다.
“울지마라. 응? 울지마.”
“…….”
“출정 전 마지막 얼굴을 우는 모습으로 기억하게 할 거야?”
토닥토닥. 끌어안은 뒤통수를 다독이는 손. 겸은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떠날 수 없는 시간 속, 승화의 품에서 세상이 멈추기를.
“언제 떠나?”
“내일.”
“…….”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거짓말. 겸은 말없이 승화의 어깨에 쿵 이마를 부딪쳤다. 단단한 몸은 흔들릴 줄을 몰랐다. 금방 돌아올게. 돌아오면 옛 궁이 있던 곳에 가서 아버지와 형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낼 거야. 함께 가서 전승의 기쁨을 나누자. 백성들과 음식을 나누고, 술을 마시며 춤을 추자. 그 자리에 꼭 나와 함께 해줘. 우리 함께 기쁨을 나누자.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달콤한 말에, 겸은 속아 넘어가기로 했다.
그가 꿈꾸는 그 자리에, 함께하는 꿈을 꾸기로 했다.
승화는 불편한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밤낮없이 이어진 전쟁에 몸은 녹초가 되었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라는 부하들의 청이 있었지만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악몽들이 다시금 승화를 찾아오고 있었다. 지천으로 널린 궁인들의 시체, 목이 베인 채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있던 아버지, 화살에 맞아 죽어가던 어머니, 궁 입구에 걸려있던 형의 목, 포승줄에 묶여 적군에게 끌려가던 형제들. 그리고 궁인들의 옷에 싸여 그 참상을 바라보던 자신. 전쟁은 애써 눌러 내렸던 감정들과 잊은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승화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스승은 모든 것은 숙명이라고 했다. 반드시 마주쳐야만 했던, 반드시 지나가야만 했던, 숙명. 그것이 준 아픔까지도. 승화는 습관적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검은 가죽끈 끝에 녹색 보석이 달린 단순하고 둔탁한 모양. 이곳 연천으로 떠나오기 전 겸에게 받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일한 유산이야.’
‘…….’
‘그러니까 꼭 돌아온다고 약속해.’
간신히 눈물을 눌러 참는 얼굴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붉어진 눈가, 동그란 코끝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입을 맞추고 나면 떠나기 싫어질까, 자신만을 바라보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그와 함께 사라지고 싶어질까, 애닳는 마음을 접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물을 참느라 한참 말이 없던 겸은 걸고 있던 목걸이를 승화의 목에 걸어주었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낡은 끈과 그럼에도 빛나는 녹색 보석. 보석은 어쩐지 겸을 닮았다.
승화는 그것을 부적이라 생각했다. 이 전쟁에서 자신을 살아 돌아가게 할 부적. 칼을 쥔 상처와 굳은살로 엉망이 된 손에 목걸이를 쥐며 승화는 돌아갈 일을 생각했다. 전장으로 들어온 지 벌써 석 달. 연천에는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였다.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그래.”
승화는 목걸이를 품 안으로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장한 신하들과 달리 칼은 들지 않았다. 오늘은 교전지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승화는 신하가 잡아준 말에 훌쩍 올라탔다. 말은 훅훅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말 목덜미를 살살 쓸어주며 승화는 긴장감을 덜어내려 노력했다. 이제 이 지지부진한, 누구에게도 득이 없는 전쟁을 끝낼 것이다. 연, 동북쪽의 청, 서쪽의 대원, 세 나라의 협상일. 연천의 중앙에 있는 평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긴장을 늦추시면 안 됩니다.”
“…….”
“청과 대원의 진영에서 군사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협상은 그저 미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
정예군을 움직여 평원 인근에 주둔 시켜 두었습니다. 유사시 수 분 내에 협상지로 도착할 것입니다. 승화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달려 일각이면 평원이 보일 것이었다. 감히 한 시간 뒤의 일을 상상할 수 없었다. 승화는 고삐를 크게 휘둘렀다. 앞발을 들어 올리며 흥분하던 말은 빠르게 튀어 나갔다. 스무 명 남짓의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약속한 시각에 못 미쳐 승화 일행은 평원에 도착했다. 사위가 고요했다. 병사들은 승화의 주변을 둘러싸고 사주를 경계했다. 간혹 먼지바람을 일으키는 바람만 지났을 뿐, 청도 대원도 보이지 않았다. 약속한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아악!”
승화의 앞에 서 있던 병사가 쓰러졌다. 어깨에는 어린아이 팔 길이만 한 짧은 화살이 박혀 있었다. 청의 것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병사를 내려다보며 승화는 묵힌 숨을 내쉬었다. 협상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두두두두, 무수한 무리가 땅을 구르는 소리가 나더니 평원 북쪽에서 검은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을 낮추십시오!”
신하가 건네주는 검을 뽑으며 승화는 몸을 낮추었다. 병사들은 더욱 가까이 승화를 감쌌다. 병사 중 하나가 짧은 나팔을 불었다. 우우웅 하는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적국의 병사들이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승화는 검을 고쳐잡았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적군의 행렬은 족히 천 명은 되어 보였다. 그중에는 검은 옷을 입은 청의 군사도 있었고, 붉은 옷을 입은 대원의 군사도 있었다. 함정이었다.
궁수도, 창병도, 기병도 없었다. 함께 온 스무 명의 병사가 전부였다. 주둔해 있다는 정예병들은 언제 도착할 것인가. 저 무리와 싸워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셈을 해도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생각이 부딪히고 깨지는 사이 달려든 적군과 승화의 병사가 처음 칼을 부딪혔다.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싼 적군은 미친 듯이 밀고 들어왔다.
승화도 검을 휘둘렀다. 하나를 쓰러트리면 셋이 달려들었다. 비명과 고함과 사방으로 튀는 핏물. 흡사 사자 우리 속 토끼처럼 적군의 한 가운데에 갇힌 승화의 병사들은 차츰 지쳐가고 있었다.
“우리 병사들이 오고 있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십시오! 비명과도 같은 신하의 목소리에 승화는 동시에 세 사람의 허리를 베었다. 잠깐 틈을 내어 든 허리. 남쪽의 언덕 너머로 한 무리의 기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연의 문양이 그려진 녹색 안장. 승화는 다시금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적군을 베려는 찰나.
“전하!!!”
몸이 주저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밭은 숨을 토해내자 피가 뿜어져 나왔다. 무거운 고개를 들어 올려 제 몸에 창을 찔러 넣은 적군을 베어냈다. 빠르게 달려온 기병들이 승화의 주변을 둘러쌌지만, 승화가 쓰러진 것을 본 적군들은 더욱 맹렬히 달려들었다. 수적 열세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승화의 눈앞에서 수 필의 말이 쓰러졌다. 말에서 떨어진 병사들은 곧장 적군의 창과 칼에 베이어졌다. 몸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파고든 창끝에 독이 묻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두꺼운 옷을 뚫고 연천의 추위가 느껴졌다. 손과 발이 차가워졌고,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죽음이 코앞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죽음이란 것은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죽음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병사들을 흐릿한 시야로 바라보는 마음은 처참함 그 이상이었다. 힘겹게 칼을 쥔 손끝이 파랗게 죽어가고 있었다. 땅의 움푹 팬 곳들에 핏물이 고여 들었고 그 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참상. 승화는 순간 겸의 얼굴을 떠올렸다.
겸아, 겸아.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부르면, 백록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른 나무 사이로 얼굴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그때 네게 입 맞추고 올걸. 네 곁을 떠날 용기를 다시 내지 못할 것 같아서 도망쳐 버렸다. 겸아. 겸아. 승화는 감각이 없는 손으로 목걸이를 찾았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 끝에 달린 보석을 들어올린 승화는 옅게 미소했다. 그래 이 푸른색은 정말로 겸을 닮았다. 차가운 듯 보여도 깊은 곳에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 그를 닮았다.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곧 끝이 온다는 것이 느껴졌다. 승화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목걸이, 녹색의 보석에 입을 맞추었다. 돌려주겠다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해 미안해. 언젠가 시간을 돌아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그때는.
마지막 숨을 들이쉬는 순간 목걸이에서 찬란한 빛이 흘러나왔다. 강하고 부드러운 빛은 평원의 모두를 감쌌다. 마지막 숨을 들이켜던 순간 승화는 그 빛 속에서 눈보다 더 하얀, 커다란 사슴의 형체를 보았다. 흰 사슴은 기이한 소리로 울었다. 그 울음소리에 화답하듯 쓰러졌던 말들이 푸드덕 고개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죽었던 병사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일어섰다.
사슴은 다시 한번 울었다. 구슬픈 소리였다. 이번엔 적군들이 하나씩 쓰러져갔다. 멀리에서 달려오던 병사 하나가 쓰러졌고, 말들이 날뛰며 병사들을 털어냈다. 갑작스러운 혼란에 평원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사슴은 마치 일을 다 했다는 듯 발을 바닥에 두 번 구르더니 승화에게로 다가왔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마침내 승화의 앞에 도착했을 때 사슴은 비틀거리며 땅에 주저앉았다. 승화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었지만 쉽지 않았다. 손끝은 완전히 검게 죽어있었다.
“꼭 돌아온다면서.......”
“.......”
“왜 이러고 있어.”
미안해. 답해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꽉 막힌 목에서 핏덩이가 흘러나왔다. 이제 더 이상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간간이 들리는 가쁜 숨소리는 내 것인지, 사슴의 것인지,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인지 알 수 없었다. 겸아, 겸아!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승화는 겸의 이름을 끝없이 불렀다.
“승화야.”
“.......”
“승화야아.......”
몸을 누르는 가벼운 압력. 익숙한 체향. 승화는 이것이 환상이 아니길 바랐다. 점점, 의식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승화는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밝은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빛 속에서 거대한 사슴은 괴로움으로 몸부림쳤다. 마침내 빛이 사라졌을 때, 땅에는 고요히 잠든 승화만이 남아있었다.
“그 전투를 마지막으로 10년의 전쟁을 끝낸 연은 삼국을 통일하고 국가를 세우게 됩니다.”
겸은 교재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의를 잘못 선택했어. 출튀할 걸. 조별 과제도 없고 과제도 쉽고, 시험도 교재에서 다 나온다는 얘기에 선택했는데 지루해 죽을 지경이였다.
“하나 재밌는 얘길 하자면 연의 초대 황제인 태무제는 연천 전투에 나갔다가 적군의 창에 찔려 목숨이 위험했다고 해요.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야. 살아 돌아온 병사들이 하는 말이 하나같이 똑같았어. 큰 빛이 일더니, 황제가 일어났다. 실제로 연의 역사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어요. 역사학자들이 이를 어떻게 볼지에 관해서 수많은 토론을 했어요. 탄생 신화가 없는 황제를 신격화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전투의 대승을 부풀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혹은? 실제 있던 일이다.”
뭔 말 같잖은 소리야. 겸은 들고 있던 펜을 내던졌다. 수강 정정 때 이 과목을 못 버린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은 심정. 시계는 수업 종료 2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금요일에 또 봅시다.”
수업이 좀 지루하다고 수업 시간 다 안 채우고 끝내주는 교수님을 어떻게 버려. 겸은 어깨춤을 추며 이미 정리해두었던 짐을 챙겨 들고 제일 먼저 강의실을 벗어났다. 겸은 곧장 친누나가 운영하는 학교 인근의 카페로 달려갔다. 점심도 같이 먹고, 커피도 한 잔 얻어먹을 겸.
SNS를 통해 꽤 이름이 알려진 누나의 카페는 언제나 사람이 미어터졌다. 정신없이 바쁜 누나를 뒤로하고 포스 뒤에 가방을 내려놓은 겸은 앞치마를 맸다.
“왔어? 일찍 왔네?”
“교수님이 일찍 끝내줬어.”
“잘 됐다. 주문 좀 받아줘. 정신이 하나도 없네.”
이미 그러고 있지요. 겸은 비즈니스 미소를 장착하고 포스기 앞에 섰다. 손가락이 부러지라 주문을 받고 테이블을 치우고 하다 보니 조금 한산한 시간.
“배고파.”
“저 테이블만 빠지고 나면 밥 먹자. 알바 곧 올 거야.”
“맛있는 거 사줘.”
“아, 예. 당연히 그래야죠.”
손님들한테 들리지 않게 누나와 떠들고 있는데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순간 손님들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쏠렸다. 오. 누나가 감탄하는 소리도 들렸다. 어깨가 딱 맞는 셔츠, 걷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팔. 누가 봐도 좋은 몸. 하지만 그보다 잘생긴 얼굴이 더 눈에 띄는 남자. 진짜 잘생겼네. 진한 인상에 어쩐지 좀 사나워 보이긴 했지만 냉한 얼굴이 매력적이었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겸은 눈을 휘어 웃으며 물었다. 메뉴판을 보는 듯 머리 위를 바라보던 남자는 겸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좀 놀란 표정을 짓던 남자는 한참을 말없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겸을 바라봤다. 왜 저래. 왜 쳐다보지. 왜 주문 안 하고....... 그만 좀 쳐다봐라, 반하겠네.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남자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지만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저....... 손님?”
“.......”
“주문.......”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큰 사이즈로. 남자가 내민 카드를 받고 다시 돌려주면서 겸은 남자를 흘끔 쳐다봤다. 다시 봐도 잘생긴 얼굴. 묘하게 익숙한 느낌은 뭔지 모르겠다.
“아아메, 큰 거로 하나.”
“저 남자 너한테 반한 듯.”
“헛소리하지 말고 커피나 내리시죠.”
“나가기 전에 전화번호 물어봐.”
“아 시끄러워!”
누나는 낄낄거리면서 커피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내가 누나랑 사는지 형이랑 사는지. 웃기셔, 장난기는 우리 집 유전이야. 그거 주고 밥 먹으러 가자. 저기 알바 온다. 누나는 앞치마를 벗으며 먼저 매대를 벗어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괜한 말을 해. 기분만 이상하게. 핸드폰을 쳐다보던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는데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묵직한 걸음걸이.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겸은 괜히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굴렸다. 앞에 남자가 선 것을 느끼고 겸은 컵을 앞으로 내밀었다. 컵이 가볍게 들렸다.
“맛있게 드세요.”
습관적으로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테이블 위로 종이 한 장이 내려앉았다. 이게 뭐야? 겸은 자기 바로 앞까지 내밀어진 종이를 받아들었다. 명함? 이걸 나한테 왜?
“연락해요.”
기다릴게요. 남자는 살짝 미소지으며 뒤돌아 가게를 떠났다.
연승화 대표. 명함에 적힌 이름은 그랬다. 대표?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뭐지? 왜지? 혼란스러운 중에 돌려본 명함 뒷장에는 처음 보는 회사 로고와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쿵쿵쿵. 알 수 없는 짧은 한마디에 왜 가슴이 뛰는지. 날뛰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겸은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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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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