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레이/ 사랑스러운 데다 무섭지 않은 이야기
세리레이 2023 여름 합작 글 백업입니다.
그 일을 한 것은 단순 호기심이었다. 아니면 선의였을 수도 있겠다. 어른으로서, 그리고 영능력자로서 청소년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의 말이다.
배움에는 제한이 없다. 고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야간 학교에는 모여있다. 정말 학교에 다닐 나이대의 아이부터, 세리자와처럼 학습의 때를 놓친 청년, 이제라도 배움을 시작하고자 하는 어르신까지. 학생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이자 친구가 된다.
그중에서 가장 혈기 왕성하고도 활기찬 부류를 고르라 하면 세리자와는 당연 십 대 아이들을 꼽을 터였다. 말도 움직임도 많고, 그래서 선생님께 혼나기도 하지만, 풀은 죽지 않는다. 그런 아이들이 세리자와의 학급에는 몇이고 있었다.
아이들을 세리자와는 가만 지켜보기만 하였다. 건들지도 않고 말도 걸지 않고 예술 작품을 감상이라도 하는 양 그저 보기만 하였다. 가까이 가면 해가 될까 봐 내린 결정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청소년들을 지켜보던 어느 날, 두 아이의 수다를 들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믐달이 뜨는 날 새벽 두 시, 입에 식칼을 물고 화장실 거울을 보면 미래의 배우자 얼굴이 보인대.
썩 흥미로운 주제다. 이성에 관심이 사뭇 많을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터였다. 그러나 세리자와는, 흘러가는 대화에서 영적 위협을 느꼈다. 새벽, 칼, 거울. 하나 같이 악령이 좋아하는 물건이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치환하자면, 위험하다. 혹시 악령이 칼을 들고 설치기라도 한다면…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괴기현상에 관여하는 영은 보통 중급 한두 마리다. 강한 악령은 본거지를 마련한 지박령인 경우가 의외로 다수다. 설치는 것들은 약하다. 빈 수레가 요란, 뭐 그런 거다.
그러므로 미래의 배우자를 보여준다는 영은 세리자와의 상대도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충분히 위험할 수도 있음이 사실이다. 주변의 누군가가 다치는 건 싫다. 말 섞어본 적 없는 학생들이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 선의를 베푼 것이다. 학급 아이들이 시험해 보기 전에 선수를 치고, 혹여나 악령이 튀어나온다면 제령 하기로 하였다.
분명 그랬는데. 처음에는 단순 선의였는데. 세리자와는 입에 물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우선 걱정과는 반대로 악령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영체가 나오기는 하였으나 평범하고 선한 귀신이었다.
배우자를 보여주는 영은 참견쟁이였다. 자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오랜만이라고, 선의 혹은 취미로 미래의 짝을 보여준다고 녀석은 떠들어대었으나 고백하자면 무엇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혼란스럽다. 새벽 두 시가 되기 직전, 선의를 베풀기로 결심했을 적에, 어쩌면 아이들의 수다를 들었던 그때. 세리자와는 막연히도 결론을 내렸었다. 무엇도 나오지 않겠지. 소문이 사실이고 배우자를 보여주는 영이 실존한다고 하여도 세리자와가 바라본 거울에는 어느 형상도 비치지 않을 터였다. 배우자고 결혼이고, 전부 남의 이야기다. 자평을 해봐도 세리자와는 모자란 것이 많았다. 버린 세월이 인생의 절반이고 나머지도 탐탁지 않다. 이런 사람을 데려갈 바보 천지가 세상에 있을 리가.
그러니까 누군가가 거울에 비친 이 상황이 당황스럽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라면 좀 나았을까. 하지만 거울이 보여준 것은 아는 사람이다. 아는 것을 넘어 매일 보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 어쩌면 호감이라는 것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
레이겐 씨잖아, 저거.
마음 같아서는 녀석의 멱살을 붙잡고 외치고 싶었다. 장난치지 말라고. 레이겐 씨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 호감은 그 호감이 아니라고. …아마도 아닐 거라고. 그래, 아마도. 아마도?
그러나 사고는 정지한 지 한참이었다. 영이 사라지고, 날이 밝아올 때까지.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창밖으로 빛이 들어올수록 거울 속 세리자와는 뚜렷해져만 갔다. 레이겐의 환상을 현실의 복제가 완연히 덮었을 즈음이 되어서야 정신을 약간 차렸다.
침대에 누웠다. 조금이라도 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임기가 에러를 냈을 때 하는 방법, 하드 리셋. 쉽게 말해서 껐다 켜기. 지금 세리자와는 에러가 났다. 그러니 몸과 머리를 껐다 켜야겠다.
…끌 수 있겠냐고, 기계도 아니고. 결국 세리자와는 밤을 꼴딱 새웠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세리자와는 영 등등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나 폭주하는 사고는 이것이 출근인지, 혹은 신랑 입장인지 제대로 구분하지를 못했다. 그 탓에 세리자와는 피곤한 몸뚱이로도 당당히 걸어와 레이겐의 옆에 자리하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레이겐 씨.”
“어어.”
레이겐은 대충 대답하고는 눈치를 보았다. 뭐야, 쟤. 정상이 아니다. 분명 아니다. 다크서클은 눈 밑에 가득한데 입꼬리는 바짝 올라가 있다. 그 와중에 목소리는 밝다. 이상하다. 여태까지 알던 세리자와가 아니다. 더위라도 먹었나. 레이겐은 노트북 구석에 표기된 기온을 보았다. 32도, 덥긴 하다. 레이겐은 털털거리는 구식 선풍기를 틀어 세리자와를 향하도록 두었다.
세리자와는 감사하다며 입꼬리를 더욱 올리더니 평소처럼 숙제를 꺼냈다. 그러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레이겐은 안심했다. 아니면 방심했을지도 모르겠다. 손님을 기다리며 농땡이를 피우던 어느 때에, 세리자와는 입을 열었다.
“레이겐 씨, 레이겐 씨는 결혼하실 생각 있으세요?”
세리자와 녀석, 결혼 같은 거에는 흥미 없는 줄 알았더니. 그러나 둘 다 혼기가 꽉 찬 것도 사실이다. 스몰 토크 주제로는 손색이 없다.
“글쎄다? 좋은 인연 만나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안 하는 거지. 굳이 무리해서 할 생각은 없어. 결혼은 삶의 한 방식일 뿐이니까.”
“그렇군요. 레이겐 씨도 할 생각은 있으신 거구나….”
“그래서, 왜 물어보는데? 어디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냐?”
레이겐은 딱 그런 타입이었다. 제 연애사를 까발리기는 싫지만, 남의 연애 이야기에는 관심이 있는 부류. 그런데, 여자와는 거리가 아주 먼 줄 알았던 부하 녀석이 결혼 얘기라니! 레이겐은 신이 나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아뇨, 그냥… 어제 생각을 좀 해 봤거든요. 일도 좀 있었고.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나… 결혼할 거면 레이겐 씨랑 하고 싶어서요. 한 번 물어본 거예요.”
그러나 세리자와가 꺼낸 말은 연애와도, 여자와도 거리가 멀었다.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쪽이 더위를 먹은 건지 쟤가 더워서 미친 건지 둘 다인지. 일단 확인은 해 봐야겠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세리자와여, ‘레이겐 씨 같은 사람이랑 하고 싶어요.’가 아닐까?”
“아뇨. 레이겐 씨랑 하고 싶은 건데요.”
“아? 아아! 네가 아는 레이겐 씨가 또 있구나? 하 참, 엄청 희귀한 성인데 또 있을 줄은 몰랐네. 나도 언제 한 번 소개해 줘라, 응?”
“아뇨. 제가 아는 레이겐 씨는 당신뿐인데요.”
“………….”
미친놈. 더운 탓인지 저 미친놈 탓에 난 식은땀인지 구분도 안 되는 땀 한 줄기가 목덜미를 지나 흘렀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순전 직장 동료인데, 결혼이라니. 저 자식 결혼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진짜 미쳤나?
그때 레이겐의 시야에 깊은 다크서클이 들어왔다. 레이겐은 어지러운 더위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물어보았다.
“…세리자와, 그 다크서클은 뭐냐?”
“아, 밤을 새웠거든요. 결혼 생각 때문에….”
뒷말은 필요 없거든. 입 밖으로 소리 내지는 않은 채 해결책을 내놓았다.
“밤을 새웠다고? 안마실… 아니 제령실 가서 좀 자. 간이침대 있으니까 뭐 불편해도 잘만 할 거야.”
“예? 벌써 같이 자요?”
“그렇겠냐!!”
거대한 몸뚱이를 안쪽 방으로 밀어 넣고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닫았다. 안쪽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고막 근처에서부터 튕겨내었다. 레이겐은 차분히 상황 정리에 나섰다. 어제 사무소에서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손님은 세 명이 왔으며 출장은 나가지 않았다. 퇴근은 정시에 했고 저녁은 컵라면을 먹었으며 세리자와에게 연락은 따로 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도 그러했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 루틴을 반복하고 출근했더니 세리자와가 범상치 않은 상태로 와서는… 젠장,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이틀 전, 사흘 전 기억을 뒤져보아도 일상의 반복뿐이다.
이런 식으로 추측을 해 보았자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레이겐은 제령실의 문을 슬며시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이 찜통이라도 되는 양 더운 공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그새 세리자와는 더위에 지쳐 해롱거리는 모양새였다.
“…세리자와, 설명해라.”
“네?”
“그거 있잖냐, 그거. 결… 혼인가 뭔가. 네가 방금 말한 거. 여간 찜찜해야지.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얼른 풀자고. 어?”
“오해….”
세리자와는 밖으로 나와 제자리에 털썩 앉았다.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가 그의 땀방울을 말렸다. 세리자와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첫 단어를 드디어 정한 양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요… 어젯밤에 미래의 배우자를 보여준다는 영을 만났거든요. 그런데 그 영이 제 미래의 배우자가 레이겐 씨라고….”
“뭐야, 그런 거야?”
어이없다는 듯 레이겐은 비웃었다. 영? 미래의 배우자? 퍽도 그러시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환상을 깨부수는 것의 전문가인 이 레이겐 아라타카를 만났으니.
“세리자와여, 하나만 묻지.”
“네? 네.”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것은, 순수한 네 의지인가?”
“…!”
정곡을 찔렀다. 레이겐은 차근차근, 말을 이어 나갔다.
“잘 생각해 봐. 우리는 상사와 부하, 직장 동료. 순전 그런 관계야. 연인 사이도 아니고 약혼을 한 건 더더욱 아니지. 그런데, 뭐? 그 영이 네 미래의 배우자가 나라고 했다고? 그게 진짜일 확률이 몇이나 될까? 세리자와, 잘 들어. 녀석들은 교활하다. 악령이 아니더라도 영이라는 족속들은 아주 교활하다고. 널 속일 수도 있고 널 상대로 장난을 칠 수도 있는 거야. 그런데 정말로 예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영의 말을 듣고 결혼을 결심해? 무언가 되게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그 영은 순수했어요. 악의라고는 하나도 없었고요. 그 아이의 말은… 진짜인 거 같았어요.”
“…세리자와여, 미래가 그러하다면, 너는 사랑하지도 않는 나를 억지로 사랑해서 결혼할 생각인 거야? 네 의지는 어찌 되든 상관 없이?”
“….”
“뭐, 녀석의 말이 진짜라고 해도 말이다, 절대적 운명이라는 건 없거든. 미래는 말이다, 과거처럼 결정된 것이 아니라서 언제든 변할 수 있어. 그래, 네가 움직이는 대로 말이야. 나보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만나면 되는 거고, 나를 굳이 사랑하고 싶지 않다면 사랑 안 하면 돼. 노력하면 미래는 변하고, 곧 현실이 되거든. 네가 더 이상 방구석 외톨이가 아닌 듯이.”
고개를 떨군 세리자와를 향해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였다. 레이겐은 입꼬리를 올리고, 자신이 생각해도 멋진 명대사를 날려주었다.
“그러니까, 운명에 너를 꿰맞추지 마, 세리자와.”
그리고 어떠했더라. 아, 그래. 세리자와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네, 감사합니다. 레이겐 씨.”라면서 정신을 차리고 일을 했다. 뒤끝이 없는지 사이가 서먹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영 등등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한동안은 말이다.
시간이 흘렀다. 종류가 다른 매미가 싸우기라도 하는 듯 시끄럽게 울어대는 한여름이 찾아왔다. 선풍기가 하등 쓸모없는 온풍기로 변모하고 아이스크림이 간식이 아니라 생필품이 되어가는 날씨에 레이겐은 백기를 들었다. 선풍기만큼 오래된 에어컨을 켜고 냉기와 냉방비에 덜덜 떠는 시기가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야간 학교는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문을 닫은 학교에 찾아가는 것은 잊은 물건 찾기나 심령 체험 외에는 의미가 없으므로, 세리자와는 대신 영 등등에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레이겐과 붙어있는 시간도 덩달아 많아졌지만, 그는 의외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레이겐의 일침은 맞는 말투성이였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바뀌는 것이다. 완전히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 그리고 초면의 영과 레이겐 중 믿을만한 이는 당연히도 레이겐이다. 잠시 바보 같은 착각을 했다. 늘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세리자와는, 미래의 배우자에 대한 망상을 털어내었다.
*
여름이었다.
다만 그 여름이라는 것은 뭉게구름과 푸른 하늘과 물기 가득한 풀잎으로 대표되는 낭만적인 계절의 한편이 아니었으며, 도리어 불쾌한 햇볕이 정수리 위에서 아른거리고 그것이 사라지면 장맛비가 쏟아지며 이윽고 벌레가 들끓는 그러한 여름이었다.
그날은 내내 비가 왔다. 건물이 흔들리나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장대한 비가 내리고 그 사이로 이따금 천둥 번개가 난동을 부렸다.
오후 1시인데도 밖이 어둡다. 레이겐은 노트북 구석의 ‘날씨’를 눌러 일기예보를 보았다. 내내 비다. 새벽 4시까지 줄곧 비 소식이다. 아마 그칠 때까지 이 정도로 쏟아붓겠지. 오늘 장사는 종 쳤다.
3시쯤 되자 빗줄기가 잦아들었으나 이것은 추후 물 폭탄을 투하하기 위한 하늘의 준비작업이라 보는 것이 타당했다. 직감이 알려주었다. 이때 도망쳐야 한다. 어차피 종일 손님도 없었다. 일찍 접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레이겐의 우산은 조그만 접이식 우산이다. 이 정도 물줄기는 막을 수 있겠지만, 나중의 폭우에는 순전 손에 들린 장식으로 전락하리라는 것을 그는 안다. 그러니까 지금 집으로 대피해야 한다. 까딱하다가는 사무소에서 밤을 새우며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거나, 쫄딱 젖은 회색 쥐와 같은 꼴로 집에 도착할 것이다. 그건 싫었다. 그러니까.
“가자, 세리자와.”
“벌써 가나요?”
세리자와는 시계와 상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학교가 방학이 아닐 때보다도 이른 퇴근에 의아한 모양이었다. 레이겐은 치켜세운 엄지로 창밖을 가리켰다.
“더 쏟아지기 전에 돌아가자고.”
재빨리 짐을 챙겨 사무소를 나섰다. ‘금일 휴업’ 푯말을 걸어두고 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리자와와 레이겐의 집은 같은 방향이었다. 정확히는,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다 세리자와는 골목길로 꺾어 들어가야 했으며, 레이겐은 대로로 쭉 나아가야 했다.
갈림길까지 쭉 걸었다. 별말은 하지 않았다. 한다고 하여도 빗소리에 묻힐 것이 분명하였다. 의미 없는 수다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단 집에 가고 싶었다.
세리자와가 골목으로 몸을 숨기기 직전이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비가 쏟아졌다. 정확히 45도 기울어져 내리는 비는 순식간에 바짓단을 적셨다.
성인 남성의 건장한 육체가 물살과 바람에 밀려 휘청거렸다. 레이겐의 작은 우산은 뒤집히기까지 했다. 몇 번 덜그럭거리는 정도로는 우산을 고치지 못했다. 재정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몸을 숨길 처마도 없다. 아니, 있다고 하여도 처마는 제 기능을 차마 못 할 것이다.
젠장, 글렀구만. 이대로 집까지 뛰어야 하나. 속옷까지 푹 젖을 생각을 하니 벌써 기분이 더럽다.
그래도 별수가 있나. 빠른 결심을 하고 박차를 가하려던 레이겐을 누군가 붙잡았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으며, 어떠한 ‘힘’이라 보는 것이 옳았다. 잘 모르겠지만 익숙한 그 힘, 초능력이다.
“…너! 사람에겐 초능력을 쓰지 말라고!”
“죄송해요! 하지만 불러도 못 들으신 거 같아서….”
“그래서, 왜? 더 쏟아지기 전에 들어가야 한다고! 우산 뒤집힌 거 안 보여?”
세리자와는 금세 뛰어왔다. 우산을 그의 머리 위로 드리워 주며 빗줄기를 막아주었다. 투박한 빗소리 사이로 이어지는 단어의 나열은 상냥한 불필요였다.
“보여요! 보여서 그래요. 조금만 가면 제 자취방이에요. 괜찮으시면 좀 쉬다 가세요.”
자취방이라. 레이겐은 잠시 고민했다. 이미 다 젖었다. 옷도, 구두도, 대가 나간 접이식 우산의 손잡이도. 그러니 이대로 돌아가도 되었다. 터덜터덜 걷다가, 편의점이 나오면 우산을 재정비하고, 따뜻한 음료를 사 몸을 덥힌 뒤, 남의 사정도 모르고 폭우를 죽도록 쏟아붓는 하늘의 탓을 해도 되었다.
그러나 레이겐은, 돌아가기 싫었던 것이다. 알고 있다. 돌아가봤자 아무것도 없을 터다. 비는 계속 내리고 습기 가득한 날씨에 옷은 마르지도 않는다. 꿉꿉하고 외롭고 기분은 줄곧 더럽다. 그러다가 폭우에 오감을 맡긴 채 외로이 잠든다….
“…그럴까.”
어울리지도 않는 어리광에 허락을 내었다. 우울을 좋아하는 인간은 없다. 그러니까, 약간의 친절에 기대도 괜찮지 않을까. 레이겐은 그리 생각했다.
세리자와의 집은 정말로 가까웠다.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있었다고 보아도 되었다. 이렇게 가까운 데에 살고 있었다고? 가끔 지각하는 세리자와의 행태가 이해되지 않았다가도, 레이겐은 집이 가까울수록 자주 지각한다는 학창 시절의 법칙을 깨닫고 홀로 수긍하였다.
조금 낡은 빌라의 3층에 세리자와의 집은 있었다. 그는 열쇠로 문을 열고는 레이겐을 먼저 집에 들여보냈다. 집은 전직 히키코모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생활 쓰레기봉투가 바닥에 있고, 먹다 남은 과자가 좌식 테이블 위에 있기는 했는데 이 정도는 인간미의 영역으로 봐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세리자와는 “죄송해요, 더럽죠…?” 하곤 말을 아끼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깨끗하다며 레이겐은 손을 저었다. 말하는 일이 거의 없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레이겐 씨, 추우시죠? 그, 다 젖어서….”
“어, 뭐… 춥지는 않은데, 축축해서 불편하긴 하네. 옷 있냐?”
“잠시만요. 아, 그보다 씻으시는 게 낫지 않아요? 욕실 괜찮으시면 빌려드릴게요.”
“그래도 돼?”
세리자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사실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집에 문짝이란 현관과 저것밖에 없으니. 욕실이 없는 글러 먹은 집이 아니라면 저 공간의 용도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러면, 좀 쓸게.”
레이겐은 욕실로 들어와 젖은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셔츠 단추를 배꼽 근처까지 풀었을 즈음, 문이 벌컥 열렸다. 세리자와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와서는 찬장에서 칫솔을 꺼내주었다.
“생각해 보니까 칫솔을 안 꺼내드렸더라고요. 이거 쓰시면 되는… 데…….”
세리자와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상사가, 언젠가 망상을 했던 그 사람이, 옷을 반쯤 헐벗고 있다. 셔츠를 당겨 몸을 가렸으나 가슴골이나 배는 전부 보였다. 셔츠가 물기에 젖어 도리어 돋보이기까지 했다.
어벙하게 서 있던 세리자와는 칫솔을 떨어트리고는 도망치듯 욕실을 빠져나왔다. 욕실 문에 기대서 사과하는 것도 잊지를 않았다.
“죄송해요, 레이겐 씨… 그, 벗고 계신 줄… 모르고….”
“……그래. 뭐. 괜찮아. 다 벗고 있지도 않았는데.”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세리자와의 사죄는 레이겐이 이를 닦는 내내 그치지 않았다. 마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를 외는 신하 같기도 하였다. 정말 그런 것이 문을 열면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세리자와의 용서 구하기는 레이겐이 ‘그만’을 명하고 나서야 그쳤다.
문을 잠그고 옷을 마저 벗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남의 집이기도 하고 간단하게 샤워만 할까 했는데, 있는 것은 비누와 샴푸가 끝이었다. 샴푸가 올 인 원 제품인가 했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레이겐은 문을 똑똑 두드리고는 집주인에게 물어보았다.
“세리자와, 바디워시 같은 건 없냐?”
“바디워시? 없는데요. 찬장에는 있으려나… 찾아볼까요, 잠시만 들어갈게요.”
덜컹거리는 문고리가 무서웠다. 방금 그렇게 부끄러워했으면서, 또 들어오겠다고? 사전고지했으니 괜찮다 이건가? 혹시나 해서 문을 잠가둔 것이 다행이지. 하지만 세리자와 녀석이라면 문을 따고 들어올 가능성도 충분하다. 레이겐은 다급히 외쳤다.
“아냐, 들어오지 마! 비누로! 비누로 씻을게!!”
“그러실래요? 알겠어요.”
밖이 조용해졌다. 소동이 잠잠해지자마자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세리자와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당연한 것이, 세리자와는 비누로 몸을 씻는다. 물만으로 몸을 씻거나 샴푸로 몸까지 씻는 괴상한 습관을 들이지 않은 이상 분명 그럴 터다. 그렇다면 체향의 대부분을 샴푸가 책임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으로 거품이 안 나는 비누로 미끈한 빗물의 불쾌함을 제거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뭐 이 정도면 되었다.
세리자와의 체향에 둘러싸인 채로 레이겐은 샤워부스에서 나섰다. 아까보다 훨씬 개운하다. 세리자와의 이름을 부르자 밖에 수건과 옷가지를 두었다는 답이 돌아온다. 눈을 감으라고 단단히 명령을 내린 뒤 팔만을 내어 마른 수건을 가져왔다. 머리를 대강 말리고 새까만 잠옷을 몸에 걸쳤다. 속옷이 없는 점은 아쉽지만 남의 것을 뺏어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잠자코 있기로 했다.
“다 씻으셨어요?”
“어어, 욕실 잘 썼다.”
축축한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릴 적이었다. 뒤편에서 세리자와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도 밖에는 비가 쏟아진다. 의아함을 담아 눈치를 주어도 세리자와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우산을 잡았을 때, 레이겐은 부하의 이름을 불렀다. 어디 가는지는 알아야겠다. 아니, 애초에 손님을 두고 몰래 나가는 집주인이 어디 있는데. 어이없음 반, 궁금증 반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디 가냐?”
“편의점이요. 집에 먹을 것도 없고 그래서.”
“지금? 좀 이따 가. 비도 엄청나게 오는데. 지금 배고픈 것도 아닐 거 아냐?”
“전 지금 배고픈데요.”
“…어, 그러냐.”
4시를 갓 넘긴 시계를 노려보던 레이겐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세리자와를 멈춰 세웠다.
“…저기. 세리자와.”
“네?”
“편의점 갈 거면 그… …좀 사 와라.”
“어떤 거요?”
“…속옷, M 사이즈로.”
제가 생각해도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한 레이겐이 묘하게 귀여웠다. 속옷 심부름을 시키는 상사라니. 세리자와가 생각해도 무언가 이상했다. 그러므로 세리자와는, 의문을 제기했다.
“저희가 벌써 그런 사이였나요?”
“…! 그, 그게! 아니, …됐다. 사 오지 마. 안 사도 돼.”
“네? 어… 알겠어요.”
세리자와가 집을 나선 뒤, 레이겐의 마음을 덮쳐오는 것은 묘한 자괴감이었다. 아니, 필요한 것은 맞다. 속옷까지 다 젖었으니까. 그렇다고 말이야. 부하에게 이런 심부름을 시키면 역시 이상한 거지. 하지만 동성이잖아. 남자 대 남자라고. 걔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팬티도 안 입고 자기 옷 입는 게 더 기분 나쁜 거 아냐? 잠시만 잠시만….
젠장, 세리자와의 집에 오고 나서 계속 무언가 이상하다. 분위기가 자꾸 이상해진다. 원래 남과 같이 집에 있다는 게 이리 이상한 것이었나?
그때 레이겐의 뇌는 과거의 어느 날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세리자와가 배우자 운운을 했던 그때. 정말로 세리자와와 결혼한다면…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건가. 허, 젠장.
으스스한 감각에 몸을 떨던 레이겐의 뒤로 문이 열렸다. 그렇다고 해서 유령은 아니고, 순전 편의점을 다녀온 세리자와였다. 그렇지만 레이겐에게는 세리자와가 유령만큼 달갑지 않았다. 남성 속옷 M 사이즈를 건네는 손도, ‘저 잘했죠?’하고 그를 쳐다보는 강아지 같은 눈빛도 모든 것의 원흉인 장맛비만큼 반갑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리자와는 편의점 도시락 두 개를 꺼내 좌식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나무젓가락을 뜯어 가지런히 두고 레이겐을 불렀다.
배가 고프진 않다. 그렇지만 배부르지도 않다. 식욕이 그를 꼬드긴다. 결국 레이겐은 ‘한 입만 먹을까’라는 핑계로 테이블 앞에 앉는 것이었다.
진짜 조금만 먹을 생각이었다. 적확히는, 가라아게만 먹고 빠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리자와는 그 가라아게도 못 먹게 할 생각이었나보다.
“그보다 이러니까… 우리 부부 같네요.”
먹은 것이라곤 공기밖에 없는데, 사레가 걸렸다. 레이겐은 몇 차례고 기침을 하다가 겨우 되물었다.
“뭐, 뭐라는 거야?”
“아뇨, 같은 집에서 씻고 먹고 그러니까요. 부부 같지 않아요?”
“어, 안 같아. 그러면 뭐, 룸메이트는 부부냐? 뭔 논리야. 같은 집에서 씻고 먹으면 부부라는 건.”
“그렇지만요, 저번에 말한 것도 있잖아요? 미래의 배우자 이야기. 그거 사실 진짜일지도 몰라요.”
“시끄러워, 저번에 말했잖아. 운명 같은 건 없다니까? 확정된 미래도 없고.”
“그러니까 레이겐 씨와 제가 짝이 되는 미래도 있을 수 있는 거죠. 오늘을 계기로 레이겐 씨와 연이 생겨서 결국 결혼까지….”
못 들어주겠다. 레이겐은 젓가락을 내려두고 푹 젖은 정장을 챙겼다. 고장 난 우산을 어떻게든 고치고 입 모양만으로 중얼거렸다. 미친놈. 아직도 환상 속에서 못 벗어났구만.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도망쳐야지.
“어어, 그럴 수도 있지. 물론 가능성은 아주 아주 아주 낮겠지만 말이야. 그보다 세리자와, 나는 일이 생각나서 말이다. 좀 가볼게? 옷 빌려줘서 고맙다…!”
“잠시만요 레이겐 씨!”
레이겐이 문을 벌컥 열었을 때, 밖에는 아까보다 더한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천둥과 번개가 3초에 한 번씩 내려치는, 난장판이었다. 이 날씨에 나서면 진심 죽을 수도 있겠다고 레이겐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세리자와는 소리를 죽인 채 다가왔다.
“레이겐 씨? 제 방에서 더 쉬다 가세요.”
“어, 어…?”
“전 괜찮으니까요. 네?”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 비는 총탄처럼 날아온다. 이 날씨에 나가면 죽는다. 분명 죽는다. 레이겐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설마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
“…그날부터네요, 레이겐 씨와 제가 사랑을 시작한 건.”
“시끄러워…. 그 얘기 언제까지 할 거야?”
“제가 까먹을 때까지요?”
“평생 하겠다는 뜻이잖아, 그거.”
“그렇죠.”
“너는 진짜….”
세리자와는 장난스레 웃으며 레이겐의 손을 잡았다. 같은 디자인의 심플한 반지가 둘의 왼손 약지에서 반짝였다.
레이겐은 제 신세를 한탄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폭우가 아니더라도, 비가 내릴 적이면 늘 세리자와를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평생을 약속한 어리숙하면서도 믿음직한 이 남자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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